75화
“내가 벨루카와 함께 정령의 힘이 들어간 목걸이 하나를 만들어 줄게. 그걸 이용하면 벌거벗고 있어야 하는 순간이 없어질 거야.”
“진짜?! 언제 만들어 줄 거야?”
록사나와 벨루카를 번갈아 보며 키얀이 반색했다.
“재료가 필요하니까, 내일 저녁때쯤 완성될 거야.”
“응!”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는 키얀을 마주 보며 록사나도 피식 웃었다.
앞으로 키얀이 나체를 들킬 염려도 없었고, 나름 그녀의 교육이 잘 끝난 거 같아서 마음이 어느 정도 홀가분해졌기 때문이다.
‘저렇게 좋을까. 나도 안심이 되지만.’
록사나는 자신들이 사용한 잔들을 정리하고 키얀을 별채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목걸이가 좋을지 고민하며 벨루카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음 날 저녁, 키얀이 록사나의 방으로 찾아왔다.
“키얀?”
록사나가 당황한 얼굴로 방과 연결된 테라스 창문을 열었다.
키얀이 창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왜 멀쩡한 문을 놔두고 이리로 온 거니?”
창을 닫고 멀뚱히 서 있는 키얀을 소파에 앉혔다.
“이 길이 더 빨라.”
“아.”
공부 외에도 키얀에게 기본적인 다른 교육도 필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 록사나였다.
“아무리 창문 쪽이 더 빠르다고 해도 다음부터는 문을 통해 제대로 된 길로 다녀야 해.”
“응.”
록사나가 누나처럼 타이르자 키얀도 가볍게 수긍했다.
“잠시만.”
서랍에서 록사나가 목걸이를 꺼내 올 동안 키얀은 자신의 무릎에 자리 잡은 벨루카의 털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정령에게 물었다.
“넌 인간으로 변신 못 해?”
“아우울.”
금세 꼬리가 축 처진 벨루카가 몸을 벌떡 일으켜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키얀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에는 배신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반면에 키얀의 표정은 평온했다.
정령은 인간의 모습으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닌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사이 록사나가 돌아와 벨루카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작은 상자에 담아 두었던 목걸이를 꺼내 키얀에게 내밀었다.
목에 딱 붙는 목걸이는 눈에 띄기 때문에 옷 속에 감출 수 있는 조금 긴 형태의 목걸이에 푸른색 초커가 달려 있었다.
목걸이를 받아 든 키얀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껏 드러내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 반짝임이 초커와 똑 닮아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응! 이거 내 눈동자 색이야?!”
키얀이 오늘 학교에서 주워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는 그 사람 눈동자 색과 똑같은 색의 물건을 선물한다고 했다.
“맞아.”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담을 보석으로 푸른 사파이어를 고른 건 키얀의 눈동자와 닮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키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순간 록사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뭐지?’
록사나는 어쩐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털고는 말했다.
“많은 정령의 힘을 쏟아부어서 만든 거라 그럴 리는 거의 없겠지만 혹시라도 색이 투명하게 변하면 사용이 안 될 수도 있어. 그때는 다시 얘기해. 또 만들어 줄게.”
“응.”
어느새 자신의 목에 목걸이를 건 키얀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 * *
캠든 연무장에서 키얀을 마주한 아스테리온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린 수인에게서 록사나의 정령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은 그녀가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기분이 몹시 나빴다.
‘저 녀석이 대체 왜?’
그의 푸른 두 눈과 가슴속에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가 훅 하고 치솟았다. 속이 들끓었다.
반면에 소드 마스터의 날카로운 눈빛을 그대로 받게 되었으면서도 키얀은 뭐가 그리 좋은지 헤죽헤죽 웃기만 했다.
‘저 목을 당장 꺾어 버리고 싶군.’
키얀의 목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아스테리온의 눈에 언뜻 목걸이가 살짝 비쳤다.
‘사파이어?!’
다른 사람이라면 전혀 알아챌 수 없었겠지만 푸른 사파이어 안에 정령이 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대 유물이 아닌 이상 저만한 정령의 힘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은 록사나 말고는 없었다.
검 자루를 쥔 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으득. 파사삭.
연습용 검 자루의 잔해가 후드득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카일라니 공작 주변으로 거대한 무형의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주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작 각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훈련 교관인 로사 경이 모두를 대신해 맨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눈앞에 선 로사 경을 발견한 아스테리온이 재빨리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숨을 급하게 들이켜거나 누군가 털썩 주저앉는 소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가 잠시 실수를 했군.”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로사 경이 책망하듯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녀의 시선이 힐끗 옆으로 향했다가 공작에게로 돌아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키얀이 카일라니 공작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하지만 나머지 훈련은 경에게 맡기지.”
로사 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마친 아스테리온이 몸을 돌려 연무장을 떠났다.
“흐음.”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인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로사 경이 뭔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건가……? 질투?!’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이혼한 인물이라는 사실과는 다르게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그녀의 주군 곁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로사 경의 주군 록사나는 요즘 키얀의 훈련 상황이나 성내 생활에 대해서 가끔씩 관심을 보였다.
‘공작님도 키얀이 열세 살인 것을 아시는데 설마 소년을 상대로 질투라니, 그게 말이 돼?!’
스스로가 추측한 내용이었지만 어이가 없어진 로사 경이 자신의 머리를 털었다. 그에 따라 높게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기사단과 새벽 훈련을 마칠 때까지 카일라니 공작의 행동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키얀과 만나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굳이 꼽자면 영지 재건축 현장 견학하시느라 며칠 훈련에 빠지신 것 말고는 없었는데…….’
평소 때와 다름없이 기사단의 훈련 이후, 어린 훈련생들이 연무장을 찾았다. 키얀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오늘 키얀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카일라니 공작의 태도가 뭔가 달랐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거슬리는 뭔가를 발견한 느낌이었던 것도 같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로사 경이 한쪽에서 검술 자세를 반복하고 있는 키얀에게로 다가갔다.
“키얀.”
“네, 로사 경.”
처음에는 응이라고 대답하더니 요 며칠 존댓말이 입에 착 붙은 키얀이었다.
모두 록사나와 로사 경의 가르침 덕이었다.
‘키얀은 평소랑 똑같아. 아니지, 이 녀석도 며칠 전부터 태도가 묘하게 변하긴 했지. 혼자 잘 웃고, 평소보다 힘이 넘쳐 보이는 거라든가.’
로사 경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키얀이 검을 내리고 파란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로사 경이 물었다.
“요새 무슨 좋은 일 있니?”
“네! 나 공부해요.”
키얀이 해맑게 웃었다.
“그래, 열심히 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다고 생각하며 로사 경이 키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로사 경이 다른 어린 훈련생들의 자세를 봐주기 위해 곁을 떠나가자, 키얀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록사나가 뭘 가르쳐 주지?’
사실 학교 공부 외에도 키얀은 며칠 전부터 영주인 록사나에게 별도의 수업을 받고 있었다.
록사나의 말에 따르면 일종의 개인 과외였는데, 키얀은 그 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한 시간뿐이라 너무 짧아 늘 아쉬웠지만 맛있는 간식을 함께 먹으며 보내는 시간은 무척 달콤했다.
* * *
연무장을 벗어난 아스테리온이 캠든 성에 마련된 자신의 임시 집무실로 들어섰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가 되자, 머리를 감싸 쥐고 등받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자괴감과 함께 마음 한구석이 과자처럼 바스러졌다.
어린 수인에게 록사나가 정령의 힘이 담긴 목걸이를 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이성보다 감정이 휘몰아쳤다.
록사나와 관련되면 심장이 덜컹거리고 애가 닳기는 했어도 오늘같이 저열한 감정까지 품지는 않았었다.
“하, 미치겠군.”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아스테리온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록사나의 애정 어린 시선을 독점하던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뭐든지 다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오늘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너무 거대해서 밑바닥 어두운 곳에 꼭꼭 숨겨 놓았던 내면의 짐승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날것의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 그는 모르지 않았다.
질투. 맞다, 질투였다.
아스테리온이 끝까지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던 질투라는 감정이 오늘 틈을 비집고 순식간에 풀려나 버렸다.
록사나의 정령 기운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그녀의 기운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뜻하지 않게 다른 생명체에게서 록사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니 순식간에 그의 눈이 뒤집혔었다.
연무장에서 있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다시 가슴속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답답해졌다.
아스테리온은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내리쳐도 답답함은 해소가 되지 않았다.
* * *
저녁을 먹고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쯤, 록사나의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 록사나와 키얀, 벨루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린이 준비해 주고 간 간식을 키얀과 벨루카가 열심히 집어 먹었다.
볼이 미어터지게 간식을 밀어 넣던 벨루카가 귀를 순간 쫑긋 세우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먹는 것에 집중했다.
가끔 보이는 행동이라 록사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창 클 시기라서 그런가, 잘 먹긴 잘 먹네.’
둘을 바라보며 록사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몸을 봤을 때 이미 성체인 키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정신 연령이 다 자라지 않았기에 록사나는 편하게 생각했다.
“키얀, 이 시간에 오는 거 피곤하지 않아?”
“안, 피곤해.”
입에 쿠키를 한가득 머금은 키얀이 부스러기를 흘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