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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74)화 (74/214)

74화 

“아우울~”

그와 거의 동시에 록사나의 곁에 있던 아기 늑대 정령 벨루카가 키얀에게 다가갔다.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키얀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벼 댔다.

이에 록사나의 시선이 절로 아래로 향하려고 했다.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두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록사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나 서둘러 자신이 걸친 숄을 풀어 헤치며 키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시선을 키얀의 상체에 고정한 채, 그의 허리에 숄을 둘러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숄이 무척 커서 하체를 다 감쌀 수 있었다.

“아.”

키얀이 뭔가 알아챈 듯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었다.

자신의 상태를 상기한 키얀은 당황해하던 록사나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막 인간으로 변한지라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인간들 앞에서는 옷을 갖춰 입는 게 예의라고 했지.’

코델리아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키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느새, 매듭까지 지은 록사나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키얀은 그런 록사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옷 저기에 있어.”

한 손을 뻗어 가리킨 방향으로 록사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키얀의 말대로 옷이 높은 나뭇가지에 떡 하니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나름 옷을 숨겨 둔 것이다.

“그… 그럼 빨리 옷 먼저 입어. 날도 추운데.”

“응.”

키얀이 록사나를 지나쳐 옷이 걸려 있는 나무로 향했다.

옷을 챙겨 들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입으려는 것을 본 록사나가 냉큼 등을 돌렸다.

‘아니, 안 보이는 데로 들고 가서 입으면 되잖아!’

그녀는 속으로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잠시 바람 쐬러 나왔다가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웬 시커먼 남자가 나체로 나타났을 때는 왁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었는데, 키얀의 얼굴이 바로 보여서 입이 딱 다물렸었다.

사실은 너무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어버린 것이었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밤이고 수풀에 가려서… 잘 안 보였어……. 음, 우람한 가슴은 어쩔 수 없이 봤지만.’

키얀이 부스럭거리며 옷을 입는 소리가 고요한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 소리를 배경음 삼아 록사나가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러면서 키얀의 나이를 떠올렸다.

‘몸만 컸지 이제 열세 살 아이야. 내가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봤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키얀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고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옷을 다 입은 듯 키얀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록사나가 몸을 돌렸다.

“키얀.”

록사나가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응.”

키얀은 순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이었다.

순진무구하고 맑은 눈빛에 록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많이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응.”

키얀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냉큼 대답했다.

벨루카를 품에 안아 든 록사나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에 든 그녀의 숄을 내려다보던 키얀이 그대로 록사나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뒤, 두 사람은 1층의 주방에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키얀과 벨루카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가 한 잔씩 놓였다.

“벨루카, 혹시 사람들이 근처에 오는 건 아닌지 확인해 주고, 소리도 차단해 줘.”

록사나가 자신의 찻잔을 감싸 쥐며 말했다.

“아울~”

벨루카가 알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고는 코코아를 살짝 혀끝으로 핥았다.

머그잔을 감싸 쥔 키얀이 코코아를 후후 불며 입가로 잔을 가져갔다.

한 모금 맛본 코코아의 달콤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꼬리마저 위로 슬쩍 올라가더니 몇 번이고 더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록사나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입에 맞나 보네. 하긴, 단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코코아를 싫어할 사람은 없지.’

탁자 위에 한 자리 차지한 벨루카도 연신 꼬리를 살랑거리며 코코아를 핥아 먹었다.

어느새 코코아를 다 마신 키얀이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머그잔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시무룩함이 담겨 있었다.

“더 줄까?”

“응!”

귀를 쫑긋 세우는 강아지처럼 키얀이 즉각 반응했다. 두 눈은 사파이어보다 더 반짝였다.

“아울, 아울.”

벨루카가 자신의 머그잔을 앞발로 툭툭 차 록사나 쪽으로 밀어냈다.

“알았어. 벨루카 너도 타 줄게.”

록사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벨루카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빛내며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새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록사나가 둘 앞에 놔주자 그들은 냉큼 각자의 잔을 껴안았다.

그들이 양껏 코코아를 마실 동안 록사나도 자신의 애플 티를 즐겼다.

향긋한 사과 향과 달달함이 추운 날 산책 후에 몸을 녹이기에 제격이었다.

“키얀, 밤중에 어디 다녀온 거야?”

키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코코아 잔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두 손은 여전히 잔을 꼬옥 쥐고 있었다.

“혹시 얘기하기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돼.”

“산에.”

키얀의 대답은 무척 간결했다.

“음…….”

록사나는 키얀의 짧은 대답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유추하려고 애썼다.

“산에서 밤 산책을 하고 왔다는 말이지? 퓨마의 모습으로.”

고개를 까닥거리며 대답하던 키얀이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슬그머니 한마디 덧붙였다.

“낮엔 안 돼. 밤엔 괜찮아.”

“…아!”

순간 깨달음을 얻은 록사나가 낮게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코델리아가 주의를 주었나 보네. 그런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록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밤에만 변신할 수 있으니까 많이 답답하지?”

“괜찮아. 밤에는 마음대로 변신할 수 있어.”

“아, 그, 그렇구나.”

순간 당황한 록사나가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밤에라도 퓨마로 변신해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키얀은 어느 정도 답답함이 해소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미안하네. 아직 어린데. 사람들 눈도 매번 피해야 하고.’

하루라도 빨리 코델리아 일행이 캠든 영지에서 마음껏 살 수 있는 날을 만들자고 록사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키얀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록사나가 키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얀.”

단호한 록사나의 부름에 키얀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코델리아가 자신을 혼내기 전에 부르는 목소리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으, 응.”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밤에 산책하는 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위험한 곳에 가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괜찮아. 하지만……!”

꿀꺽.

다시 한번 키얀이 마른침을 삼켰다. 건장한 몸도 저절로 긴장되어 바짝 굳었다.

작은 인간 여자 앞에서 어째서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앵두같이 오동통한 록사나의 입술에 키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문제야.”

“왜?”

키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네가 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벌거벗은 상황이잖아.”

“응.”

“하아.”

키얀의 당당한 대답에 록사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만 컸지 정신 연령은 아직 어렸다. 말을 돌려 할수록 점점 꼬일 것만 같았다.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수밖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그런 네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할 거니?”

“안 들켰는데.”

“나한테 오늘 들켰잖아.”

“아!”

키얀이 순진하게 수긍했다.

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을 훈육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록사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큰일 났을 거야.”

“왜?”

순간 록사나는 혈압이 팍 오르는 것 같았다.

“너는 다른 사람이 네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게 좋아?”

“아니.”

단호하고 기분 나쁜 표정으로 키얀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기분이 무척 나빴다. 그래서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록사나는 괜찮아.”

“뭐, 뭣?”

록사나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록사나가 봤을 때 기분이 안 나빴어.”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이는 키얀이었다.

“아아, 하아…….”

한 손으로 머리를 집으며 록사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랫동안 갇혀 지냈었고, 인간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으니까.’

키얀의 상황을 떠올리며 록사나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키얀, 내 말 잘 들어.”

“응.”

키얀이 순순히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옆에 있던 벨루카도 덩달아 록사나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남한테 벗은 몸을 함부로 보여 주면 절대 안 돼.”

“록사나도?”

“응! 아무한테도!”

록사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키얀은 가족인 코델리아 일행 다음으로 록사나를 제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성체가 되기 전에 코델리아에게 몇 번 알몸을 보인 적은 있었지만, 그 이후로 누군가에게 알몸을 보인 건 록사나가 처음이었다.

알 듯 모를 듯 록사나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된 키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록사나가 아차 싶어 설명을 곁들였다.

“내 말은 그러니까 말이야…….”

한 번도 부딪혀 보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록사나가 속으로 절규했다.

‘아, 너무 어렵다!’

키얀은 누군가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 같았다.

‘나도 홀릴 뻔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백이면 백 키얀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어린 수인 키얀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복장 터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심기일전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록사나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키얀은 성체잖아. 어릴 때도 그렇고 성체일 때도 남에게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 건 서로에게 예의가 아니야.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고, 안 좋게 볼 수도 있어.”

“록사나도 나쁜 마음이야?”

순간적으로 록사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야!”

그녀의 반박에 키얀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한 록사나가 말을 계속 이었다.

“아무튼 키얀이 나중에 짝을 맺은 상대가 아니라면 벗은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게 좋아.”

“알았어.”

키얀은 언뜻 이와 비슷한 말을 코델리아에게서 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대책이 좀 필요할 거 같아. 언제까지 옷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다닐 수는 없잖아.”

“어떻게?”

키얀이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사실 매번 옷이 찢어지지 않게 벗어서 나무에 먼저 걸어 두고 변신하는 게 늘 번거로웠다. 인간으로 변신해서 찾아 입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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