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코델리아한테 또 혼나겠네.’
몸만 어른이지 아직 열세 살인 키얀에게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세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게 참 쉽지가 않았다.
키얀이 학교를 다니기 전부터 코델리아가 이에 대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린 키얀의 어깨가 덩달아 축 처졌다.
“이제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기죽은 키얀의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미안해한다고 오해한 소피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얀이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는 거야?’
키얀은 그런 소피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을 왜 불러 세웠나 하고 뚫어지게 소피아를 바라보자 그녀의 두 뺨에 다시 홍조가 어렸다.
소피아가 두 손을 꼭 쥐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다음 시간에 네 옆에 앉아도 돼?”
“…….”
키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이걸 나한테 물어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을 멈추고 두 사람을 대놓고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오오~ 거절당하는 건가?”
“소피아 정도면 예쁘지!”
“키얀 얼굴을 봐라. 얼마나 눈이 높겠어.”
“그건 그래.”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에 소피아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무르익었다.
당장에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아무 말도 없는 키얀의 모습에 자꾸만 그녀의 고개가 숙여졌다.
“키얀, 아무 말이라도 해!”
보다 못한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어.”
잠시 후, 키얀이 입을 열자 소피아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라 창피함이 들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허락한 거지? 나 내일부터 네 옆에 앉아도 되는 거지?!”
쉼 없이 몰아치는 소피아의 질문에 키얀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꺄아! 고마워, 키얀!”
소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피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주변에 있던 또래의 여자들이 질투 반 부러움 반 담긴 눈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첫날 교실에서 만난 키얀을 본 미혼의 여자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사람에게서 빛이 난다는 말은 키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하늘보다 더 파란 눈동자와 오뚝하고 반듯한 코, 시선을 잡아끄는 붉은 입술, 찰랑거리는 밤하늘을 닮은 까만 머리카락과 날렵하게 쭉 뻗은 몸매까지.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
차가운 표정과 말 없는 모습은 아무 흠도 되지 못했다.
키얀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한 여자들은 그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둘째 날부터 정말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승자는 늘 누가 제일 먼저 교실에 일찍 도착하느냐에 따라 갈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은 과열되었다.
그랬는데… 오늘로써 최종 승자는 소피아가 되었다.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얻는다더니.
늘 창가에 앉는 키얀이었기에 그의 옆자리는 오직 단 한 자리뿐이었다.
저렇게 쉽게 키얀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자신들이 먼저 말 걸어 볼걸, 하고 여자들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주변의 반응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키얀은 몸을 휙 돌려 제 갈 길을 갔다.
도대체가 여자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 여자들은 너무 시끄러워.’
키얀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키얀, 정말 고마워. 내일 봐.”
점점 멀어져 가는 키얀의 뒷모습을 향해 소피아가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키얀은 어떤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일을 하기 위해 본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흐응~ 흐으응.”
소피아에게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스무 살인 소피아는 지난달 정식 고용인이 되어 본관 1층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글을 열심히 배워 나중에 관리직 일을 하는 게 목표였다.
* * *
“코델리아.”
유치원 교실 문을 열고 키얀이 들어섰다.
“어서 와, 키얀.”
“와! 키얀 형이다!”
“키이~”
“키아아~”
“키얀이다!”
코델리아와 키아, 마빈, 마리솔뿐만 아니라,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도 차례대로 키얀을 열렬히 반겼다.
성인반 수업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다들 일하러 간다. 그런데 성인의 외모인 키얀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록사나는 키얀이 수업이 끝나면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키얀에게는 노는 거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록사나는 이 점을 노렸고,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활동량이 높은 어린아이들을 감당하기에 키얀은 쉽게 지치지 않았다.
키얀이 오면 유치원 교사들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틈도 생기기에 다들 그를 반겼다.
“키얀, 오늘도 잘 부탁해요.”
한 교사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키얀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이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형아, 빠리~ 빠알리~”
“오빠, 나두!”
아이들이 키얀의 손과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유치원에는 다른 고용인들의 자녀들까지 있어 제법 북적거렸다.
“그래.”
키얀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평소보다 무거워진 발을 움직였다.
“형아, 최고!”
“우와!”
“꺄하~”
“까르르르~”
두 팔과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들이 잔뜩 신이 나서 각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키얀은 무겁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실내에 마련된 놀이터 방을 향해 걸어갔다.
매달리지 못한 몇몇 아이들이 그런 키얀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놀이터 방에는 제가 따라갈게요. 그동안 좀 쉬세요.”
코델리아의 말에 다른 교사들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드러냈다.
“매번 코델리아 선생님이 나서 주시니……. 내일부터는 우리끼리 순번을 정해서 할게요.”
“맞아요. 우리 그렇게 해요.”
“좋은 생각이에요.”
세 교사에게 코델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까지는 제가 갈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호호호~”
네 사람 사이에 웃음꽃이 피었다.
“다녀올게요.”
코델리아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서둘러 놀이터 방으로 향했다.
많은 아이들을 통솔하려면 아무리 체력이 좋은 키얀이라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특별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재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 매번 자원하기도 했었다.
‘다음부터는 굳이 내가 자원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오늘로써 5일째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키얀과 키아, 마리솔과 마빈 모두 별 탈 없이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내고 있었다.
‘날도 춥고 하니까 지금이야 실내 놀이터에 푹 빠져 있지만… 그리고 키얀이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실내에서만 계속 놀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도 질려 하고 답답하게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외부 놀이터가 빨리 완성되면 좋겠어.’
별채 뒤에 유치원 전용 외부 놀이터가 완성되려면 한 주 정도가 더 남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놀이터 방에 다다른 코델리아가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놀이터 방은 문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는 장소였다.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벽에 부딪쳤을 때 다치지 않도록 바닥과 벽에는 쿠션감이 있는 매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실내에는 영유아 아이들이 놀기 좋게 다양한 놀이 시설들이 자리했다.
미끄럼틀, 징검다리, 줄을 잡고 오를 수 있는 사선 벽 등은 물론 재미난 장난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미니 마차라는 것은 정말 신기했다. 말이 끄는 부분이 없고, 마차 안에 아이가 쏙 들어가 앉아 운전하는 것이었는데 인기가 최고였다.
다행스럽게도 미니 마차는 유치원 아이들의 수에 맞게 구비되어 있어서 싸우게 되는 일이 없어 참 좋았다.
‘영주님은 참 대단하셔. 어떻게 저런 걸 다 생각해 내셨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소리에 코델리아의 이런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졌다.
* * *
어두운 밤, 까만 짐승 한 마리가 산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주변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매끈하게 뻗은 강인한 팔다리가 땅을 힘차게 박차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군데군데 다 녹지 못한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어 발이 푹푹 빠졌지만 날렵한 퓨마의 움직임을 온전히 붙들지는 못했다.
한참을 질주한 퓨마가 산 정상에 다다랐다.
캠든 영지에서 중간 정도 크기에 속하는 산 정상 뒤로는 더 거대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퓨마가 뒤돌아 알렉산드리아 산맥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은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저 멀리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빽빽한 나무들은 웅장하게 펼쳐져 산맥의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몸은 성체이지만 아직 어린 검은 퓨마는 문득 저곳에 발을 들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의 습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이 어린 짐승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었다. 거리가 꽤 멀어 돌아오는 데만 수일이 걸릴지 모른다.
눈을 빛내며 한참 동안 알렉산드리아 산맥을 바라보던 퓨마가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 잠긴 캠든 영지의 모습이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비쳤다. 퓨마는 그중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캠든 성을 바라보았다.
심장 한쪽에 포근함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어린 퓨마가 그동안 머물렀었던 어떤 곳보다도 안전하고 따스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한참 동안 캠든 영지를 바라보던 퓨마가 고개를 들어 달의 위치를 살폈다.
‘이제 돌아가야겠어.’
퓨마가 땅을 박차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캠든 성 근처에 다다르자 속도를 늦추며 기척을 죽였다. 아직은 퓨마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높다란 성벽을 흘깃 한 번 보더니 가볍게 훌쩍 뛰어넘은 거대한 퓨마의 몸은 소리도 없이 땅에 착지했다.
그곳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으로 본관과 후원의 중간 지점쯤 되는 곳이었다.
퓨마의 머리 부분을 시작으로 내딛는 앞발이 사람의 손으로 변해 갔다. 뒷발까지 사람의 다리로 온전히 변화됨과 동시에 거대한 몸이 땅을 딛고 반듯하게 몸을 세웠다.
장신의 사내가 정원수를 헤치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뚝.
“키얀?!”
갑작스럽게 나타난 키얀의 등장에 상대방이 무척 당황해했다.
키얀도 살짝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겠지만, 그나마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