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 *
리온 제국의 황궁, 7황자 테오도르가 눈밭 위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테오 님, 자세가 좋습니다. 그 상태에서 오늘은 종 베기 1,000회입니다.”
리키의 말에 잠시 테오도르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가 눈빛에 굳은 의지가 깃들었다.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으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팔은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덜덜 떨려 왔다.
이십 대 청년 리키는 말없이 테오도르의 자세를 주시했다.
‘확실히 자세가 무척 좋아. 체력만 제대로 키우신다면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로 성장하실 거야.’
리키는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테오도르에게 처음 검을 들게 한 날부터 그는 황자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7황자는 잘 먹지 못해 또래보다 발육이 부진했고, 체력도 바닥이었다.
하지만 검에 대한 집착과 그가 한번 시범으로 보여 준 검술을 황자가 흉내 냈을 때는 경악했었다.
테오도르 황자는 검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막 종 베기 900번을 넘어서며 당장에라도 검을 놓칠 것처럼 팔이 부들거렸지만, 목검을 휘두르는 자세는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역시 괴물 같은 재능이야.’
테오도르가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포기하면 절대 안 돼!’
사시나무처럼 팔다리는 후들거렸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목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한없이 느려졌고, 자세는 자꾸만 흐트러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숨을 가다듬으며 나약해지려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당장 검을 손에서 놓는 건 쉽지만, 그러면 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거야. 이겨 내야만 해!’
테오도르는 반드시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 황궁을 나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던 록사나의 기사가 되고 싶었다.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꺼져 가던 의지의 불길이 다시 솟아올랐다.
드디어 마지막 종 베기에 다다랐다.
‘천!’
검을 쥔 채로 소년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리키가 재빨리 테오도르의 몸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근처의 나무 아래 소년을 뉘어 주었다. 미리 깔아 두었던 그의 망토가 눈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 주었다.
마물인 블랙베어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토는 보온성과 방수력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리키가 망토로 테오도르의 몸을 마저 꽁꽁 감싸고는 입가에 수통을 대어 주었다.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져 있던 테오도르가 겨우 물을 받아 마셨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물이 자꾸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쉬었다 돌아가세요.”
리키가 테오도르를 다시 뉘어 주며 말하자, 소년이 눈꺼풀을 껌벅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테오도르가 쉬는 사이 리키는 검을 들고 일어섰다. 잠시라도 검술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무 사이로 흐린 하늘이 테오도르의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몇 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캄캄한 밤, 테오도르가 머무르고 있는 구석진 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데 리온 제국에서 최고의 권력가 중 한 명인 카일라니 공작이 남몰래 찾아오다니.
그의 방문에 어린 테오도르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의문 어린 테오도르의 시선에 공작은 소년에게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자신은 전 황태자 네이든의 친우였고, 자신의 친우가 아꼈던 동생인 테오도르를 아무도 모르게 후원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카일라니 공작의 말에 테오도르는 얼떨떨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테오도르는 카일라니 공작에게 직접적으로 대놓고 물었다.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냐고.
잠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던 카일라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진짜 이유를 듣고 싶다면 강해지라고.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테오도르가 건강하게 자라나고, 앞으로 강해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 얘길 들었을 때 테오도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더랬다.
공작은 리키를 테오도르의 검술 선생으로 붙여 주었다. 당연히 아무도 몰랐고, 누군가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었다.
두 사람이 연무장 대용으로 사용하는 숲의 공터는 테오도르의 궁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 같은 숲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어두침침한 느낌을 주었다.
리키를 따라 처음 이 공터에 왔을 때는 깜짝 놀랐었다. 빽빽한 나무숲을 한참 헤치고 들어갔더니 넓은 공터가 떡 나타났다.
몰래 검술을 연마하기에 제격인 장소였다.
한겨울에도 잎이 빽빽한 침엽수는 공터를 가려 주었고, 근처 바위에서 바라보면 테오도르가 머무는 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숲 안에 이런 공간이 존재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이 장소를 어떻게 알았냐고 리키에게 물었더니 카일라니 공작이 알려 줬다고 말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언덕 숲에 엄폐된 주거 공간도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리키는 그곳에서 머물렀다.
‘어떻게 황궁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황궁을 더 잘 아는 거 같아. 돌아가신 네이든 형님이 알려 주신 건가?’
나중에 만나면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주로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검술을 훈련했다.
혹시라도 소리가 퍼져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훈련 때마다 소리 차단 마도구를 사용했다. 그것도 공작이 준 것이었다.
검술 훈련이 추가된 것 말고는 테오도르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 한 가지 더 있네.’
제국 돌아가는 소식을 리키에게 전해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늘 답답하고 지루하던 일상이 그 두 가지로 인해 요즘은 활기가 넘쳤다.
‘어서 빨리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르고 싶다.’
테오도르는 황궁 밖 세상이 무척 궁금했고,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르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겠다고 리키가 약속했기 때문이다.
“황자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몸을 조금 푼 리키가 다가오며 테오도르의 상념을 일깨웠다.
“응. 몸의 떨림도 멈췄어.”
테오도르는 여전히 누워 있는 채로 고개만 돌려 리키를 올려다보았다.
리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는 하실 만합니까?”
“뭐, 그럭저럭.”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황제가 일주일 전 테오도르에게 선생 하나를 보냈다.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두 시간씩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과목은 세 과목으로 제국사와 문학, 기본 산술이었다.
“어떤 게 가장 재미있으세요?”
“대부분 다 아는 내용이라 다 지루해.”
소년의 표정에는 따분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여섯 살 때 어머니인 3황비가 돌아가셨다.
방치된 어린 황자가 맘껏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궁의 서재에 있는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서재에 있는 책을 모두 다 읽어 더 이상 읽을 만한 것이 없게 되자, 몰래 황궁 도서관에 숨어들어 책을 훔쳐 읽었었다.
그 사실은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들키지 않았다.
“절대로 황자님의 본 실력을 드러내선 안 됩니다.”
조바심에 리키가 충고했다. 똑똑한 머리든 검술 훈련이든 앞으로 뭐든 겉으로 절대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었다.
“당연하지.”
테오도르는 맑은 웃음을 지었다. 제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미소였다.
‘요새는 많이 웃으시는군.’
리키는 사실 테오도르가 태어났을 때부터 주군의 명에 따라 그의 옆에 그림자처럼 몰래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테오도르의 삶이 어떠했었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 사실을 테오도르는 모르고 있었다.
겨울 해가 서서히 동쪽에서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응.”
몸을 일으킨 테오도르가 덮고 있던 블랙베어 망토를 리키에게 건네주고는 나무에 걸어 두었던 자신의 외투를 걸쳐 입었다.
한 시간 뒤쯤이면 하녀가 궁에 올 시간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궁이라지만 항상 조심해야 했다.
“내일은 제가 좀 일이 있어 다음 훈련은 모레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키와 작별 인사를 나눈 테오도르는 서둘러 궁으로 귀가했다.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와 겉옷을 벗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앗, 추워! 으으.”
이가 절로 딱딱 부딪쳤다.
온기가 전혀 없는 욕실은 무척 추웠다. 매번 얼음장같이 차가운 공기에 이골이 나기는 했어도 추운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황족들이 머무는 궁에는 화로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데, 7황자인 테오도르가 머무는 궁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욕실 한쪽에 큰 항아리로 향한 테오도르가 뚜껑을 젖혔다. 안에 담긴 물을 대야로 옮겨 욕조에 퍼 담았다.
욕조에 물이 반쯤 차자,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를 한 손에 쥐고 욕조 물 안에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손이 무척 시렸지만, 따뜻한 물을 상상하자, 한순간에 욕조 물이 덥혀졌다.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쓰윽 올라갔다. 옷을 벗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 뜨끈한 물이 소년의 몸을 감쌌다.
* * *
유치원과 학교가 정식으로 문을 연 지 며칠이 지났다. 오후 성인반 수업이 끝나자, 사람들이 교실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저기, 키얀!”
아래층으로 향하던 키얀의 팔을 누군가 붙들었다.
키얀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빼내며 몸을 재빨리 뒤로 물렸다. 그리고 상대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를 땋아 내린 한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키얀을 올려다보았다.
여자를 바라보는 키얀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잔뜩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 같았다.
“아, 미… 미안. 그게…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자신 때문에 키얀이 놀랐다고 생각한 소피아가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키얀이 내뿜어 내는 기세에 눌려 얼굴이 밀가루처럼 점차 하얗게 질려 갔다.
‘아차!’
소피아는 키얀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오후반 학생이었다.
이를 떠올린 키얀이 기세를 갈무리했다.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며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누군가 갑작스럽게 접촉해 오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하곤 했다.
“휴우~”
소피아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짓누르던 공기가 사라지자 그녀의 얼굴에도 혈색이 차츰 돌아왔다.
반면에 키얀의 표정은 살짝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