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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71)화 (71/214)

71화 

‘오늘 많이 피곤했을 테니 이제 쉴 수 있게 보내 줘야 하는데…….’

생각과 다르게 쉽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은 가장 미뤄 두고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냈다.

“당신에게 중요하게 말할 게 한 가지 더 있어.”

“뭔데요?”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기감을 펼쳐 잠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들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육망성과 관련해서 로웰 후작 령의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조만간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곳은 코델리아 일행이 도망쳐 나온 곳이었다.

“몰래 침투해서 살펴보겠다는 얘기인가요?”

아스테리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측 정보원 두 명이 그곳에 갔다가 소식이 끊긴 상태야. 아무래도 붙잡혔거나…….”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모두 소드 익스퍼트급에 다다른 이들이었다. 혹여 발각되어 붙잡혔더라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실력이었다.

록사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코델리아에게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젠가 꼭 가 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코델리아가 그곳에 여전히 붙잡혀 있는 이들을 걱정해서이기도 했고, 그녀에게 들은 빛이 나는 돌이 혹시 정령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직접 가는 거예요?”

“응.”

“언제 갈 건데요?”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대해 그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나는 바로 로웰 후작 령으로 넘어가려고.”

그건 며칠 내로 떠난다는 얘기였다.

“나도 같이 가요.”

“뭐라고?”

깜짝 놀란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 답이 없어요?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나도 갈 거예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위험해.”

한숨을 간신히 삼킨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요. 당신에게 짐이 될 생각은 없어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제예요?”

“당신은 약…….”

아스테리온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약하다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러나 록사나는 약하지 않았다. 이스트의 화재를 단숨에 진압한 게 그녀였다.

“난 전혀 약하지 않아요. 당신도 알잖아요.”

역시나 예상하긴 했지만 그가 입을 다문 보람이 없었다.

“나는 단지 서로 같은 적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함께 움직이자는 거예요.”

록사나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스테리온의 마음은 답답해져만 갔다.

위험한 곳에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록사나도 입을 닫고 고집스럽게 그를 마주 보았다.

‘아, 미치겠다.’

삐죽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이 그의 심장을 쥐고 흔들었다.

잠시나마 그녀의 마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선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반짝, 반짝, 반짝.

어둠 속에서 작은 무언가 눈을 반짝이며 그들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검을 뽑아 들기 위해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아차!

오늘 유치원 개원과 학교 행사에 귀빈으로 참여하면서 검을 빼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무기가 없어도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가 낯선 존재를 경계하듯 상대방도 그를 잔뜩 경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날카롭게 변한 아스테리온을 보며 록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우울~”

“벨루카?”

울음소리에 그녀가 반응하자, 상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우다다다닷!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은빛 털 뭉치가 록사나의 발치에서 끽 멈추었다.

그러고는 쉼 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록사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반가움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벨루카.”

록사나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허리를 굽혀 벨루카를 품에 안아 올렸다.

벨루카는 그녀의 팔뚝보다 조금 작았다.

덥석 안겨 든 벨루카가 록사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벼 대며 애정 공세를 펼쳤다.

“하하하. 그래그래, 나도 반가워.”

은빛 털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두 팔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까지도 상대를 잔뜩 경계하고 있던 아스테리온이 힘을 거두어들였다. 왠지 허무했다.

벨루카의 청회색 눈동자가 록사나 몰래 아스테리온을 불손하게 노려보았다.

나름 맹수라고 덩치가 작고 어려도 눈빛에는 날카로운 예기가 담겨 있었다.

“허.”

참 어이가 없어진 아스테리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정령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열심히 달려올 때부터 못마땅함을 팍팍 드러내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작은 방해꾼의 심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교묘하게 그의 시선을 차단하며 록사나의 눈길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었다.

“내가 안 오니까, 혼자 심심해서 마중 나온 거구나?”

그 말이 맞다는 듯 벨루카의 꼬리가 풍차처럼 붕붕 돌아갔다.

“그래, 같이 들어가자.”

벨루카를 품에 안은 채 록사나가 몸을 일으켰다.

아스테리온도 덩달아 벤치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기 전 록사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각하께서 같이 가길 원치 않으시니 그럼 저는 따로 갈게요.”

“그…….”

그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록사나가 휙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를 향해 내밀어졌던 아스테리온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기 늑대가 록사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혀를 쑥 내밀었다.

영락없이 아스테리온을 약 올리는 모양새였다.

선을 긋듯 딱딱하게 자신을 각하라고 호칭하며 혼자라도 가겠다는 그녀의 고집과 정령의 놀림까지, 그의 가슴에 묵직한 돌이 내려앉았다.

* * *

다음 날도 여전히 캠든 성은 바쁘게 돌아갔다. 성의 분위기는 무척 활기찼다.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마도 공학자 빈센트가 도착했다.

빈센트와 기쁨의 재회를 짤막하게 나눈 록사나가 회의실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 사이에는 아스테리온과 트레버도 껴 있었다.

보일러 개발자의 도착 소식에 관계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회의실로 달려왔다.

이미 록사나에게 캠든 영지 재정비 계획과 온돌 난방 시스템 설치 계획에 대해 편지로 전달 받았었던 빈센트는 어렵지 않게 관련 기술자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를 이어 나갔다.

빈센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보일러 설치 방법에 대해 설명하며 기술자들의 질문 공세를 즐겼다.

그가 미리 만들어 온 축소 모형들을 가지고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도 직접 보여 주었다.

실제와 다름없이 설치를 마치고, 바닥 면적이 가로세로 1m씩인 축소 모형에 보일러가 켜졌다.

몇 분 후, 사람들이 모형의 바닥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다. 기적을 마주한 것처럼 그들의 눈빛에 살짝 광기가 깃들었다.

특히 평소에 차분하기 그지없는 캠든 상단주 잭의 눈빛이 매섭게 이글거렸다.

그는 보일러 관련 제품 생산을 언제부터 할 수 있고, 하루에 몇 대나 만들 수 있는지 등을 물으며 빈센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개발한 것들을 신나게 자랑하느라 잠시 사라졌던 빈센트의 낯가림이 슬슬 발동되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슬슬 몸을 뒤로 물렸다.

중요한 사항들만 되짚어 준 록사나는 빈센트를 잭과 기술자들에게 떠넘기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아이린을 그곳에 남겨 둔 채였다.

“보좌관이랑 관리자들을 빨리 뽑아서 키워야겠어.”

“내가 도와줄까?”

“네?”

록사나가 화들짝 놀랐다. 언제 따라 나온 것인지 아스테리온이 그녀 곁에 가까이 서 있었다.

【 본 실력을 드러내선 안 됩니다 】

“어차피 우리 영지에도 온돌 난방을 설치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하니까, 안드레아스랑 기술자들 몇 명을 캠든으로 불렀어.”

안드레아스는 카일라니 공작의 제2 보좌관이었다.

“공작가 일은 어쩌고요?”

아스테리온과 트레버 둘 다 캠든에 있으니 공작가의 업무는 거의 집사 칼리드와 안드레아스가 처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안드레아스까지 캠든에 온다면 어마무시한 공작가의 업무를 칼리드 혼자 감당해야 하니 무리가 클 것이다.

“오늘 트레버는 레드포드로 복귀할 거야.”

“그렇군요.”

그의 말을 이해한 록사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트레버가 공작가로 복귀해서 일을 맡게 되면 안드레아스가 캠든에 머물러도 문제없으리라.

“바쁜 당신이 보좌관과 관리들 교육까지 하게 되면 잠잘 시간도 없을 거야.”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주는 말에 록사나가 에메랄드빛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안드레아스가 캠든에서 할 일은 많지 않으니까 그에게 보좌관과 관리 교육을 맡기는 게 당신에게 여러모로 이득이 될 거야.”

“대가는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록사나의 질문에 아스테리온이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그가 필요 없다고 말해도 그녀의 성정상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후작 령에 가는 걸 포기하라는 그런 조건은 사절이에요.”

록사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 눈치가 너무 빨라.’

자신의 속셈을 알아챈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한탄했다. 방금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만 같았다.

그의 고민이 조금 더 길어졌다.

“그럼 말이야, 다음에 새로운 것들이 나오면 카일라니 공작가에 가장 먼저 제안하거나 공개해 준다는 조건은 어때? 물론 강제는 아니야.”

아스테리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좋아요.”

록사나가 선뜩 수락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점점 부족해지는 그녀의 취침 시간 확보는 물론 인력난도 해결하고, 든든한 조력자도 얻고.

모든 면에서 카일라니 공작가만큼 신뢰할 수 있는 상대는 이 리온 제국에서 아직까지 없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정보들을 활용해 기술이나 물건 등을 앞으로 꾸준히 팔며 영지와 상단을 키워 나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정보와 기술을 적절한 선에서 공유하거나 공개해야 하는데 사업 파트너로서는 카일라니 공작가가 제격이었다.

록사나의 긍정적인 답변에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말 나온 김에 계약서를 작성해요.”

“그러지.”

두 사람의 발길이 록사나의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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