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다면 아이들의 건강도 그렇고, 생활의 질이 무척 높아질 겁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몇몇 아이들을 가르쳤었던 패트릭이 전보다 드높아진 교육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소감을 표출했다. 겨울철이면 늘 춥게 생활하던 옛 제자들이 떠올랐다.
“맞아요.”
“동감이에요. 유치원에도 설치해 주신다고 하니 벌써부터 설레네요.”
패트릭의 생각에 동의하는 프레드릭과 코델리아의 얼굴에도 따뜻한 미소가 피어났다.
“바닥에 호스를 깔고 그 위를 덮는 작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집주인이 그 작업을 직접 한다면 비용도 크게 안 들겠군. 정말 대단해.”
평소에 큰 표정 변화가 없는 아스테리온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처음 들어 보는 칭찬에 록사나는 몸이 배배 꼬일 것만 같아 슬쩍 시선을 비꼈다.
아스테리온은 이 이야기를 그들 앞에서 꺼낸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아벨리오 남작께서는 온돌 난방 시스템을 레드포드 공작 령에 얼마에 팔 생각이신지 듣고 싶군.”
“돈보다는 다른 걸로 받고 싶어요.”
록사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거?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좋겠군.”
“물론이에요.”
어느새 사람들이 6:2 양측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록사나 측이 6, 아스테리온 측이 2였다.
“앞으로 캠든 영지를 재정비할 예정이라 석재와 철 같은 건축 자재들이 많이 필요해요.”
북부에서 나는 레드포드산 석재와 철은 온 대륙이 알아줄 만큼 유명했다.
“배 건조 기술과 항해 기술도 전수받고 싶어요. 물론 이걸 당장 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영지 정비가 어느 정도 끝나면 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충분히 심사숙고해 보시길 바라요.”
카일라니 공작 측이 거절한다면 록사나는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만약 설득마저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아스테리온과 트레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레드포드 공작 령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독보적인 기술을 자랑했다.
제국 북부 구석에 위치해 있다 보니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라고는 북동부 방향의 먼 블랑카 왕국이 유일했다.
카일라니 선대 공작들은 불리한 지리적 요건을 극복하고자 대대로 해양 무역에 지대한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오랜 세월 이에 대한 노하우와 기술이 쌓여 대륙에서 최고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자랑했다.
남부 국가들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이룬 것은 물론 황실과 다른 귀족가에서 카일라니 공작가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이 레드포드 영지에서 나지 않는 식량과 자원으로 압박을 가하는 게 전혀 아무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조선술과 항해술에 대한 정보 유출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고,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아스테리온과 트레버가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슬쩍 록사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그의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모든 기술에 대한 정보는 카일라니 공작이 쥐고 있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를 공개하거나 다른 곳에 넘길 때는 반드시 원로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아스테리온이 임의대로 록사나에게 기술을 건넸다가는 공작 위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반신불수가 된다.
아무도 몰래 건네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카일라니 선조들은 후대를 위해 이에 대한 방비를 아주 지독하게 해 놓았다. 오랜 옛날 마법적인 장치를 해 놓은 것이다.
‘카일라니 공작님, 이제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아이린이 차를 다시 우려 채워 주자, 록사나가 평온한 얼굴로 얄밉게 차를 홀짝거렸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에게 단둘만의 산책을 청했다.
조선술과 항해술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해 보겠다고 오후 회의에서 말했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그 대답이 성의 없고 부족하게 느껴졌다.
겸사겸사 수도에서의 파파베르 범죄자들의 처리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물론 그동안 서신으로 처리 결과를 짧게 전달하기는 했었지만 어떻게든 록사나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그 방법들이 모조리 다 일과 관련된 것들이라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접점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것마저 없었다면, 자신은 레드포드 령에 처박혀 메말라 죽어 가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록사나를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겨우 그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는 그녀의 키가 오늘은 더 작아 보였다.
까맣게 윤기 흐르는 머리는 한번 쓸어 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손이 근질거린 아스테리온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에서 잠시 쉬도록 하죠.”
벤치를 가리키며 록사나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이 성큼성큼 걸어가 먼저 벤치에 다다랐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 위에 반듯하게 폈다.
“고마워요.”
예전이었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록사나는 감정에 무뎌졌다. 아니, 변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아스테리온의 행동은 신사가 숙녀에게 으레 하는 행동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그녀가 앉자, 아스테리온도 옆에 자리했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예요? 굳이 산책까지 할 필요 없이 집무실에서 해도 되는데요.”
그녀가 몸을 살짝 틀어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아스테리온이 답지 않게 잠시 우물쭈물했다.
“…오전에는 행사에, 오후엔 집무실에 계속 묶여 있었잖아.”
록사나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저 말은…….’
그녀가 그의 의도를 다 파악하기 전에 아스테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바빠서 여유가 없었잖아. 머리를 식히기에는 산책이 제격이니까.”
‘흠, 별일이네. 나랑 맞는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있었나 보네.’
록사나 역시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는 산책을 즐겼었다.
문득 한때 그녀의 비밀 장소였던 레드포드 령 카일라니 공작가의 후원이 떠올랐다.
‘겨울이니 눈이 많이 쌓였겠네.’
카일라니 공작가는 북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3월까지는 눈이 쌓여 있곤 했었다. 그 풍경이 조금은 그리웠다.
아무 말이 없는 록사나를 아스테리온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버리다시피 이혼한 전 남편이 뭐가 좋다고…….’
아스테리온은 그녀와 함께 있어 좋으면서도 기분이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시선과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싶었다.
“조선술과 항해술에 대한 기술은 내가 넘기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록사나가 바로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옹달샘에 맑은 물이 차오르듯 그의 마음속에 만족감이 퐁퐁 차올랐다.
“카일라니 공작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있었다니 그게 더 놀랍네요.”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록사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깜짝 놀란 그녀의 표정이 말해 주었다.
“카일라니 공작가는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면 의식을 하나 치르지.”
“의식이요?”
“거창한 건 아니고, 맹세의 말을 읊고 나서 고대 마도구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돼.”
“그 의식이 조선술과 항해술 기술과 관련 있나 보군요.”
“맞아.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건 공작과 후계자뿐이야. 맹세의 의식을 끝내고 나면 위원회의 허가 없이는 조선술과 항해술을 유출할 수 없어.”
카일라니 공작가의 위원회는 실권 자체는 없는 조직이다. 하지만 조선술과 항해술에 대한 것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그리고 허가도 의식처럼 마도구를 이용해 진행된다.
“고대 마도구를 깨뜨려도요?”
“그걸 시도해 본 선조들이 꽤 있었지. 절대 안 깨져서 내 대에까지 내려왔고.”
록사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위원회의 허락 없이 하면 어떻게 돼요?”
“공작 위나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몸 어딘가 한 곳은 불구가 돼.”
“어, 음. 굉장히 확실하고 과격한 처벌 방식이네요.”
록사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어마어마한 마도구인가 봐!’
아주 오랜 옛날에는 마법이 매우 발달했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 마도구들은 하나같이 성능이 뛰어나 웬만한 성 한 채는 찜 쪄 먹는 수준의 가격을 자랑했다.
“초·중급 기술은 위원회의 동의 없이도 전수가 가능하지만 그 정도는 다른 곳과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준이지.”
“맞아요. 내가 원하는 건 고급, 못해도 중·고급 기술이에요. 위원회가 그렇게 깐깐한가요?”
록사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스테리온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급 기술에 한해서는 단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어. 돈으로도 설득할 수 없는 자들이야.”
이해했다는 듯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자세한 내막을 밝힌 건 위원회의 동의만 얻으면 배의 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넘기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럼 나중에 말이에요. 위원회 승인받을 때 내가 그들을 만나 보고 싶은데요.”
록사나가 자신보다 시선이 높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원에 어둠이 내려앉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반짝거렸다.
“그렇게 하지.”
아스테리온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록사나가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쿵.
아스테리온의 심장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더없이 화사한 그녀의 미소가 그의 가슴속 깊이 박혀 들었다.
동시에 그의 귀 끝이 불그스름해졌다. 어둠이 그의 부끄러움을 감춰 주었다.
아스테리온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전서구를 통해 이미 전달했지만, 파파베르와 관련한 자들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어.”
아스테리온은 수도에서 처리된 일의 경과와 황태자 도노반이 미꾸라지처럼 발을 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록사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가장 이익을 본 건 황제 폐하시네요.”
아스테리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황제를 더 몰아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과 달리 아직 큰 힘이 없는 록사나와 캠든 영지에 불통이 튈까 봐 하지 않았다.
슬슬 록사나와의 대화거리가 떨어져 갔다. 아스테리온은 초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