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원하는 식재료들을 모두 찾은 록사나는 적당한 크기의 냄비에 물을 붓고, 화로 위에 올려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물이 끓는 동안 재빠르게 야채와 고기를 손질했다.
록사나가 직접 요리를 시작하자, 아스테리온의 눈은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도대체 아까부터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다.
대충 주방에 있는 빵이나 남은 음식을 챙겨 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직접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스테리온의 입장에서는 직접 요리한 음식이 아니어도 감지덕지였다. 사실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지 상관없었다.
꼬르륵.
갑작스럽게 허기가 몰려온 아스테리온의 배에서 울린 소리였다.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록사나는 다행히 듣지 못했다.
‘냄새가 죽이는군.’
그는 미식을 즐겼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탐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주방을 가득 채운 맛있는 냄새는 아스테리온의 식욕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잠시 후 완성된 요리들이 아스테리온의 앞에 하나둘 놓였다.
꼴깍.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야채가 들어간 크림수프와 상큼한 향이 느껴지는 신선한 샐러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촙스테이크까지 모든 것이 제대로 된 요리였다.
‘순식간에 이런 요리를 뚝딱 만들어 내다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록사나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식겠어요. 빨리 먹어요.”
그가 스푼을 든 채 넋 놓고, 요리를 바라보고 있자, 록사나가 옆에서 재촉했다. 그러고는 붉은 와인을 한 잔 따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스테리온이 크림수프를 떠 한 입 맛보았다. 고소한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다!”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행이네요.”
쌩하니 뒤돌아서는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 입장에서 맛있다는 말은 최고의 찬사였다.
록사나가 화로에 물 주전자를 올렸다. 그가 식사하는 동안 그녀는 차를 한 잔 마실 생각이었다.
샐러드에 이어 촙스테이크까지 맛본 아스테리온의 포크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모든 음식이 그의 입에 착 붙는 게 너무 맛있었다.
찻잔을 들고 아스테리온과 대각선 방향에 자리한 록사나가 차를 홀짝거리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왜 와인은 손도 안 대지? 맛있는 와인인데.’
평소에 와인을 함께 즐기는 그의 식사 습관은 이 자리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손짓이나 자세는 여전히 우아했고, 더없이 귀족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먹는 것에 열중하던 아스테리온이 마지막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모든 식사를 마무리했다.
‘추운 날 따뜻한 식사가 이런 건가.’
아스테리온은 배 속이 무척 따뜻하고, 든든했다. 나른한 포만감마저 느낀 그는 기사들이 입버릇처럼 집 식사가 최고라고 말하던 것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집은 레드포드 영지의 카일라니 공작저였지만 말이다.
‘식사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난 그동안 참 헛살았군.’
지금 이 순간, 따뜻한 이 캠든 영지가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도 무척이나 아쉬웠다.
물론 그 따뜻함은 오롯이 록사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깨닫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큰 걸 놓아 버렸는지……. 가슴이 시큰거렸다.
* * *
주방을 정리하고 아스테리온을 손님방까지 데려다준 록사나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스테리온은 지난날 록사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매번 심장이 아리고 가슴 한구석이 푹 꺼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겠지…….’
자신에 비하면 록사나가 그에게 보여 주는 행동들은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아스테리온의 시야에서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벽난로에 다가가 옆에 준비되어 있는 장작을 안에 집어넣었다.
록사나가 난방을 위해 벽난로 불까지 붙여 주고 가겠다고 했었지만 그가 거절했다.
그 핑계를 대고 단순히 록사나와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만은 한가득이었으나 어떻게 이런 일까지 그녀를 시킨단 말인가.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어 손풀무질을 해 주자 마른 장작에 금방 불이 옮겨붙었다.
점점 몸집을 키워 가는 불꽃을 보며 떠나기 전 록사나가 한 말을 떠올렸다.
‘유치원과 학교라.’
록사나는 내일 개원식과 개교식에 아스테리온을 귀빈으로 초대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니 유치원은 낯설었지만 학교는 아카데미와 비슷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와 아카데미의 차이점이라면 학교에서는 유치원과 연계되는 교육이 시행되고 훨씬 더 어린 나이인 일곱 살부터 입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성내 직원들을 위한 좋은 복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편견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녀의 계획처럼 유치원과 학교를 영지 전체로 확대한다면 몇 년만 지나도 캠든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겠군.’
전에 그의 보좌관인 트레버가 캠든 영지의 새로운 소식들을 떠들어 댔을 때 그도 무척 놀랐었다.
그런데 록사나의 설명을 직접 듣고 보니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교육 방식과 가치관을 뒤집는 혁명적인 발상들이었다.
이번에 개교하는 학교를 초등학교라고 했는데, 그 위로도 상위 학교를 네 개 더 개설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 영지에도 유치원과 학교를 세워야겠군.’
트레버가 도착하면 바로 진행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부피가 엄청 큰 일감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고용주인 아스테리온의 입장에서는 전혀 알 바 아니었다.
레드포드 공작 령에 이 교육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록사나의 옆에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이 무척 들떴다.
아스테리온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는 록사나와의 이혼 후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그는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웬만해서는 쉽게 지치는 않는 강철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그라고 해도 피로가 두 달 넘게 지속적으로 누적되다 보면 컨디션이 나빠지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그의 신경은 예민했고, 항상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 그의 신경이 무뎌졌다.
아스테리온은 평소 때보다 자신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잠시 후, 몸이 축 처지며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오전 11시, 하루 동안 개방된 캠든 성의 별채 건물 앞 공터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그들의 가족들, 고용인들과 기사단, 초대된 보육원 아이들,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이었다.
그들은 유치원과 학교에 대해 처음 소식을 접하게 들었을 때부터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평민 아이들에게 무료로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는 것은 온 제국을 뒤져 봐도 유례없는 혜택이었다.
별채 현관 앞에는 빨간색 리본으로 된 커팅 테이프가 길게 쳐졌다.
그 앞에는 가위를 든 열일곱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록사나는 그 한가운데에 자리했다.
초대된 귀빈인 카일라니 공작, 문라이트 상단주 휴고.
얼떨결에 교장직까지 맡아 겸직하게 된 집사 프레드릭, 유치원 교사 코델리아, 초등 교사 패트릭.
이스트·웨스트·서던·노스 중심 마을의 촌장들, 웨스트의 고아원 원장 도로시 부인.
이렇게 열 명은 영주인 록사나에 의해 지정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제비기를 통해 선발된 사람들은 총 여덟 명이었다.
기사단 대표 로사 경, 학부모 대표 앤. 앤은 한 달간의 수습 기간을 마치고 정식 고용인이 되었다.
유치원생 대표 키아는 코델리아의 품에 안겨 가위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턱 얹고 있었다.
초등학생 대표는 주방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나디아의 딸로 올해 일곱 살인 리나였다.
마지막으로 정말 운 좋게 영지민 대표로 뽑힌 젊은 부부 니콜과 카를로스까지.
니콜은 재봉사였는데, 록사나의 의뢰로 날개옷과 동물 귀 머리띠를 만들었고, 그녀의 남편 카를로스는 대장장이였다.
땡땡땡.
트레버가 별채 현관에 설치된 학교 종을 흔들었다.
“다들 주목하십시오.”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며 사회자를 바라보았다.
오늘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트레버는 덜컥 아침 식사를 하며 사회자를 맡게 되었다.
원래는 프레드릭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역사적인 순간의 커팅 테이프를 자르고 싶다고 해서 트레버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피곤한 몸 상태에 입이 댓 발 나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주군의 행복과 뜻깊은 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넓은 마음으로 수락했다.
“지금부터 역사적인 캠든 유치원의 개원과 캠든 초등학교의 개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문라이트 상단 직원이 준 마석이 박힌 마법 확성기를 들고 말하자, 그 소리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잘 전달되었다.
“먼저 테이프 커팅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대표로 선 열일곱 명의 사람들과 커팅 테이프로 향했다. 사회자 트레버의 신호에 맞춰 빨간 리본이 싹둑 잘렸다.
짝짝짝짝짝.
“와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커다란 함성이 캠든 성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이 끝도 없이 박수를 치자, 트레버가 그들을 진정시키며 다음 식순을 이어 갔다.
영주 록사나의 개원 및 개교 선포 축사에 이어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도 귀빈 대표로서 축사를 건넸다.
교장 프레드릭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운영 방침과 앞으로 영지의 다른 곳에 세워지게 될 두 교육 시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유치원생 키아와 초등학생 리나의 인사에 이어 대표로 나온 다른 사람들도 각자 짤막하게 소감을 얘기했다.
사람들이 열 손가락을 넘어가다 보니 그 시간이 30분을 훌쩍 넘어갔다.
한참 뒤 록사나가 개원 및 개교 행사 폐회식을 선언했고, 트레버가 다시 마법 확성기를 넘겨받았다.
“여러분, 이후에는 자유롭게 인원수를 나누어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니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 질서를 꼭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보시는 바와 같이 간단한 간식거리가 준비되어 있사오니 마음껏 즐기시면 됩니다. 그럼 이것으로 유치원 개원과 초등학교 개교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공식적인 식순 행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짝짝짝짝짝.
사람들의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별채의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록사나가 귀빈들과 각 마을의 촌장, 그리고 보육원 원장 도로시 부인을 안내하며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소개했다.
그들이 나오자 정해진 인원수에 맞춰 사람들이 유치원과 학교 구경에 나섰다.
고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은 줄을 서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준비된 다과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