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낯선 자 몇 명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왔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빅토리아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손목 안쪽에 육망성이 새겨져 있었다.
49호가 말해 줬었던 육망성을 가진 자의 최후가 아르얀에게도 일어날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아르얀과 49호를 몰래 도망치게 하고 싶었지만 어린 빅토리아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두 사람을 탈출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다.
그녀가 도노반의 후궁이 되어 황궁에 들어오던 날, 아르얀과 49호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아르얀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벽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덧그리며 빅토리아가 하얀 깃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르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아르얀은 그녀의 유일한 빛이자 천사였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 * *
캠든 성은 나날이 북적거렸다.
낡은 성 곳곳을 보수하고, 유치원과 첫 번째 학교 설립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또한 웨스트의 빈민촌을 시작으로 전 영지의 주택과 도로를 재정비하기 위한 계획이 밤낮없이 논의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상단 설립과 운영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맞물려 록사나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늘도 새벽녘이 되어서야 침실에 들어선 록사나가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록시 님, 씻고 주무셔야죠.”
아이린의 목소리에도 피곤이 잔뜩 묻어났다.
록사나가 힘없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늘은 패스야. 그냥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바로 잘래. 아이린 너도 어서 네 방으로 가서 잠이나 자.”
록사나가 옷이라도 갈아입기 위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녀의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아이린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빨리 가서 자래도.”
아이린이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문밖으로 재빨리 내쫓아 버렸다.
“그럼 내일, 아니, 아침에 봬요.”
문 너머에서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까지 확인한 록사나가 비척이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 어찌 이런 생각을 하셨단 말입니까! 】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자, 정령 벨루카가 발목 부근에서 몸을 비벼 왔다.
“나 때문에 깼구나. 같이 자자.”
제법 묵직해진 벨루카를 안아 든 록사나가 침대로 향했다. 벨루카는 막 젖을 뗀 아기 강아지만큼이나 몸이 컸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록사나는 곯아떨어졌다.
록사나가 잠든 걸 확인한 벨루카가 창가 쪽을 힐끗 한 번 보고는 별일 아니다 싶은지 그녀의 품에서 같이 잠들었다.
록사나와 벨루카의 몸이 잠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록사나가 자신의 품에 안긴 벨루카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 새벽에 봤을 때보다 벨루카의 몸이 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봤었나…….’
고개를 저은 록사나가 창밖을 보니 겨울의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몇 시간 못 잔 것 같은데 몸이 몹시 개운했다.
‘정령의 힘도 평소보다 많이 찼어.’
영지 시찰 후 캠든 성에 복귀하고 나서 찔끔찔끔 차오르던 정령력이 요 근래 들어 조금 더 늘었다.
* * *
“위치가 애매하니 이 화분은 저쪽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군.”
“네, 집사님.”
“집사님, 책상과 의자를 학생들 수에 맞게 교실에 다 배치했습니다.”
“수고했네.”
별채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내일은 공식적으로 유치원을 개원하고, 학교를 개교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들떠 있었다. 자신들의 자녀, 손주, 또는 형제자매가 다닐 곳이었고, 자신들은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의 기회가 아이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별채의 업무에 배치되지 않은 사람들도 본인의 쉬는 시간에 찾아와 준비를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빠른 정오에 일이 마무리되었다.
한 번 더 주변을 점검하던 프레드릭이 별채로 들어서는 록사나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수고가 많아요, 프레드릭. 마무리는 잘되고 있어요?”
“네, 막 마친 참입니다.”
“그럼 제가 한번 둘러봐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록사나가 프레드릭, 아이린과 함께 별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1층에는 교무실과 행정실, 급식실이 자리했고, 2층은 유치원, 3층에는 도서관과 초등부 교실, 4층 역시 초등부 교실이 있었다.
시설을 다 둘러본 록사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주님, 유치원도 그렇고 교실도 잘 꾸며졌어요!”
그녀의 옆에서 아이린이 감탄했다.
“그래. 모두가 열심히 해 줬어.”
유치원은 영유아들의 활동에 맞게 동선이 짜여졌고, 책과 장난감 등 어린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교실에는 연령대에 맞춰 앉을 책상과 의자, 개인별 사물함, 교탁, 칠판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임시 교육 시설이라고는 하지만 무척 훌륭하지요.”
프레드릭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중에 이곳은 상징적인 곳으로 남겠죠.”
록사나의 목소리에 살짝 아쉬움이 담겼다. 처음 유치원과 학교가 생기는 장소라 그랬다.
앞으로 학생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조만간 캠든 시가지 내에 학교와 유치원을 짓기 위한 부지 선정을 완료했다.
이 별채는 추후 고용인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만 남고, 빈 교실들은 성내 도서관으로 탈바꿈시킬 예정이었다.
* * *
록사나는 회의실에서 영지 재정비를 담당할 열다섯 명의 기술자들과 마주했다.
문라이트 상단의 소개로 온 각 분야별 기술자 다섯 명과 캠든 영지에서 선발한 기술자 열 명이었다.
추후 이들을 주축으로 영지의 개발 및 건설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영지부를 출범시킬 마음을 그녀는 품고 있었다.
“영지 도로 및 주택가 구성 계획안을 잘 살펴봤어요. 역시 전문가들이라 다르네요.”
“감사합니다, 영주님.”
록사나의 칭찬에 기술자들이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난 2주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캠든 영지의 주요 지역을 둘러보고 서로 머리를 맞대어 계획안을 완성했다.
물론 시가지의 구성, 구역별 분류 등 모든 것은 영주인 록사나가 짠 큰 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여러분의 준주택 건설 및 내부 구조 계획안에 한 가지를 추가하려고 해요.”
록사나가 종이 한 장을 그들 앞으로 내밀었다.
기술자들을 이끄는 로한이 그것을 건네받아 살폈다. 종이에는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호오!”
그것을 보는 로한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몸을 기울였다.
“세상에, 이런 방법으로 난방을 할 수 있다니 정말 혁신적입니다!”
내용을 이해한 로한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록사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로한의 옆에서 같이 보던 기술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계도를 넘겼다.
“어서들 보시게!”
“이럴 수가!”
사람들이 다 돌려 봤을 때쯤엔 웅성거리는 소리가 심해졌다.
탕탕!
“자, 다들 조용하십시오.”
로한이 탁자를 두드려 사람들의 말을 멈췄다.
이에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아이린 보좌관, 설계도를 가져와 이쪽 벽에 걸어 주세요.”
“네, 영주님.”
아이린이 설계도를 록사나의 오른편 벽에 고정시켰다.
“영주님, 보여 주신 저것은 난방 시설 설계도가 맞지요?”
로한과 기술자들이 일제히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맞아요.”
“어찌 이런 생각을 하셨단 말입니까!”
“저대로만 된다면 추위 걱정을 덜 수 있습니다.”
“화재가 날 염려도요.”
노스 출신인 한 기술자가 질 수 없다는 듯 덧붙였다.
록사나가 기술자들에게 보여 준 건 온돌식 난방 시스템이었다.
다른 세계와 같은 과학 기술이 이 세계에는 없었지만 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마도 공학과 마법, 마석이 존재했다.
록사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다시 문라이트 상단과 교류를 시작하며 우연히 한 마도 공학자가 만든 호스를 보게 되었다.
투자를 원했던 마도 공학자가 가져온 것이었는데 아무 쓸모가 없어 문라이트 상단 측에서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록사나는 난방 시스템이 열악한 대륙의 주거 환경을 떠올렸다. 난방용 호스를 개량해서 온돌식 난방 시스템을 개발해 보급하면 좋을 것 같았다.
문라이트 상단에서 부모님의 유산을 처음부터 맡아 관리하고 있었기에 돈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마도 공학자와 종신 계약을 맺고 연구비를 지원했다.
온돌식 난방 시스템 개발에 성공할 경우, 록사나가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수익이 발생할 경우, 마도 공학자 빈센트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공정한 계약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1년 전, 개발에 성공했다는 빈센트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시기의 그녀는 의욕 없는 공작 부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빈센트에게 수고했다는 편지와 함께 보너스로 거액의 추가 연구비만 지원하고는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돌 난방 시스템을 떠올리고 이를 적용하기로 마음먹은 건 캠든 영지에 오고 나서다.
“이 온돌식 난방 시스템을 개발한 마도 공학자 빈센트가 지금 캠든으로 오고 있어요. 도착하면 여러분에게 소개해 줄게요.”
“기대됩니다. 영주님.”
“마석으로 난방을 돌릴 보일러라는 기계는 정말 중요한 기술이라 공개할 수 없지만, 다들 이 난방 시스템 설계도는 어느 정도 이해되죠?”
“물론입니다. 저 호스를 바닥에 깔아 묻고, 호스 안에 물이 지나게 해서 마석과 보일러로 난방을 한다는 것 아닙니까?”
자신이 이해한 것을 술술 얘기한 로한이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록사나가 외부인인 그를 기술자들의 우두머리로 뽑은 것은 경험과 지식, 통솔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리고 보일러를 이용하면 물을 따로 끓이지 않고도 따뜻한 물을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요. 더운물로 마음껏 씻을 수 있다는 얘기지요.”
흐뭇한 미소로 로한을 바라보며 록사나가 말했다.
“아, 온수의 의미가 한 가지가 더 있었군요!”
십 대 시절부터 외길 인생으로 건축 일을 해 왔던 로한은 심장이 몹시 두근거렸다.
리온 제국의 건축술은 몹시 뛰어났지만, 주거 난방 기술에 있어서는 벽난로가 전부였다.
돈깨나 있는 부자나 귀족들도 씻을 물은 데워서 통으로 날라야 했다.
방에 벽난로를 켜도 불이 꺼지지 않게 매번 세심하게 살펴야 겨울철 따뜻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