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린 둘만으로는 삼엄한 후작가를 탈출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픈 아르얀을 데리고 도망치기란 쉽지 않았다.
49호 혼자만이라도 탈출을 시도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 형제와 같은 아르얀을 버리고 떠난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그렇게 어린 소년 둘은 로웰 후작가의 지하에서 8년을 갇혀 지냈고, 성년이 되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몇 년은 더 썩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숨어 지내야 했고 스스로의 존재를 숨겨야만 했지만, 햇빛을 보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 * *
“아르얀.”
빅토리아가 그리운 이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창밖에 쌓여 가는 눈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하얀 눈밭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아르얀도 저 하얀 눈처럼 무척 눈부셨지.’
빅토리아는 잠시 회상에 빠져들었다.
열 살 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희미했지만, 아르얀을 처음 만났었던 날은 지금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기억은 그녀가 원치 않았던 삶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열 살의 소녀였던 빅토리아는 그 나이대의 또래들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잠에서 깬 빅토리아는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온 세상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백금발보다 더 하얗고 반짝이는 눈을 좋아했다.
해가 뜨고 눈이 녹으면 땅이 질척해져 지저분해지는 건 무척 싫어했지만,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은 소녀를 매료시켰다.
한껏 들뜬 빅토리아는 망토 하나를 두르고, 자신이 아끼는 인형 하나를 챙겨 방 밖으로 나섰다.
소녀의 방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밤 외출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소녀는 복도의 구석진 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 방에는 밖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몰래 나갔다가 돌아오기에 딱 좋았다.
이 통로는 빅토리아가 며칠 전에 우연히 발견한 것이기도 했다.
빅토리아가 벽난로 안쪽으로 손을 넣어 살짝 튀어나와 있는 벽돌 하나를 눌렀다.
스르릉.
잠시 뒤, 벽난로 옆으로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드러났다.
빅토리아는 겁도 없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희미한 불빛이 비쳤다.
몇 번 이 통로를 이용해 보았기에 그 불빛이 마석이 꽂혀 있는 마법 등에서 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통로를 따라 걷던 빅토리아가 갈림길 앞에서 고민했다. 길은 총 세 개였다.
가장 오른쪽 통로는 후원으로 이어졌고, 중간 통로는 기사단 쪽으로 이어졌다.
‘저번에 두 개는 가 보았으니까 안 가 본 저곳으로 나가 볼까?’
빅토리아의 발걸음이 맨 왼쪽 끝 통로로 향했다.
타닥타닥.
작은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낮에 할 걸 그랬나?’
물론 앞의 두 통로를 봤을 때 이상한 곳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뒤 빼고는 사방이 막혀 있다 보니 처음 가 보는 통로가 살짝 겁이 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쪽에 막힌 벽이 나타났다.
빅토리아는 경험으로 그곳이 나가는 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 앞에서 돌의 이곳저곳을 눌러 댔다.
딸깍.
빅토리아가 뒤로 물러났다.
스르릉.
작은 소음과 함께 막혀 있던 벽이 빅토리아가 있는 안쪽으로 문처럼 젖혀졌다.
“어?”
빅토리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소녀가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에 눈밭이 펼쳐져 있긴 했지만 작은 공간이었고, 달빛이 비치긴 했지만 눈이 내리는 하늘과 눈밭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어두웠다.
빅토리아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둥그렇게 뚫린 공간을 통해 눈과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소녀가 고개를 내려 주변을 살폈다.
빅토리아가 서 있는 주변의 앞과 양옆은 원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형태는 거대한 성벽처럼 매우 높아 하늘을 제외한 밖의 풍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후작 성에서 처음 보는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소녀는 결심을 굳힌 듯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다음 발걸음은 더 쉬었다.
도도도 눈밭으로 달려간 빅토리아가 까르르 웃었다. 몰래 나왔다는 조심성은 쉽게 사라졌다.
푹, 뽀드득. 푹, 뽀드득.
쌓인 눈은 소녀의 발목을 훌쩍 넘었다. 그래서 걷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발에 밟히는 눈의 감촉이 소녀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히히히.”
순백의 눈밭에 자신의 발자국을 모두 찍겠다는 듯 빅토리아가 이리저리 한참을 거닐었다.
어느새 숨이 턱 밑까지 찬 빅토리아가 뒤로 몸을 젖혔다.
푸욱.
작은 소녀의 몸 형태대로 눈이 푹 꺼졌다.
데려온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몸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밭을 뒹굴었다.
그러다가 하늘을 마주 보고 누웠다. 강한 눈발이 빅토리아의 얼굴 위로 펑펑 쏟아져 내렸다.
“아, 추워!”
차가운 눈의 감촉이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몸의 열이 식었다.
어쩔 수 없이 빅토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낯설어서 처음에는 좀 무서웠는데 이제는 이곳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빅토리아가 주변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쇠창살이 박혀 있는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옥 같아.’
빅토리아가 토끼 인형을 꼭 껴안았다.
소녀가 서 있는 공터를 중심으로 빙 둘러 동그랗게 쇠창살 감옥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콜로세움의 중앙에 소녀가 서 있는 형상이었다.
“가, 가자. 하양아.”
자신이 나왔던 비밀 통로의 문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문과 점점 가까워지던 빅토리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소녀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문의 왼쪽을 쳐다보았다.
감옥 안에 분명 무언가 있었다.
빅토리아는 뭔가에 홀린 듯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 발, 두 발, 소녀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딱 세 걸음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빅토리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하얀 날개에 감싸인 아이가 빅토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다!”
속마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달빛에 비친 하얀 머리카락에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그리고 아름다운 하얀 날개. 하얀 날개는 아이 몸의 일부였다.
그 순수하고 찬란한 모습에 빅토리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소녀의 눈빛에 기쁨이 차올랐다.
“안녕, 천사님?”
환하게 웃음 짓는 빅토리아가 쇠창살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천사가 움찔거리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빅토리아는 천사의 눈 색이 무척 궁금해졌다.
달빛이 만들어 낸 그늘에 가려 천사의 안광만 가끔씩 반짝일 뿐 색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빅토리아가 쇠창살에 바짝 붙어 쪼그려 앉았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눈이 언뜻 붉은빛으로 보였다.
“나는 빅토리아야. 천사님은 이름이 뭐야?”
천사는 경계하는 것 같으면서도 빅토리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하양이.”
앳되고 가는 목소리였다.
인형이나 애완동물에게나 붙일 법한 이름이었다.
빅토리아가 자신이 들고 있는 토끼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하양이는 얜데…….”
자신을 속이는 건가 싶어 빅토리아가 살짝 불만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진짜 이름 맞아?”
그러자 천사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49호는 언제나 그를 하양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게 이름이 아닌가?
천사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49호는 날 하양이라고 불러.”
“49호?”
그건 또 뭔가 하는 빅토리아의 표정에 천사가 살짝 고민하더니 날개 한쪽을 슬그머니 젖혔다.
까만 점박이 무늬에 갈색 털을 가진 짐승 한 마리가 드러났다.
천사는 소녀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개잖아!”
“개 아니야. 재규어야.”
빅토리아의 말에 난감한 듯 천사가 정정했다.
자신의 친구 49호는 낯선 자의 등장에도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눈이 오는 날은 평소보다 따뜻한 편이어서 푹 자기 좋았다.
“재규어?”
빅토리아는 재규어가 뭔지 아직 몰랐다.
“응. 49호는 수인족이야.”
친구가 추울까 봐 다시 자신의 날개로 몸을 가려 주었다.
“와! 진짜?!”
동화책 속에서나 보던 수인족이라니! 빅토리아는 이종족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어 무척 놀랍고 신기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천사가 대답을 대신했다.
“천사님. 근데 하양이는 얘야. 다른 이름은 없어?”
빅토리아가 토끼 인형을 들어 보였다.
천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에게 다른 이름은 없었다.
“난 천사가 아니야. 조인족이야.”
자신이 날개를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그렇구나. 그럼 내가 이름 지어 줄게.”
빅토리아는 자신의 마음을 차지한 천사가 조인족이라는 사실보다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다는 것에 더 관심이 쏠렸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에 천사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는 소녀의 모습을 천사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자신과 닮은 듯 다른 하얀 머리카락은 금빛이 살짝 감돌았고, 추위에 발갛게 물든 뺨이 자꾸 시선을 끌었다.
고대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빅토리아가 천사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아! 아르얀!”
빅토리아가 손뼉을 짝 치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님 이름은 이제부터 아르얀이야. 어때?”
“아르얀…….”
빅토리아의 천사가 낮게 읊조렸다.
“하얗고 고귀하다는 뜻의 고대어야. 마음에 들어?”
“응.”
아르얀의 뺨에 홍조가 살짝 피어올랐다.
그날부터였다. 빅토리아는 비밀 통로를 통해 아르얀이 있는 곳에 밤마다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르얀과 49호의 숨겨진 사연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그들과 만난다는 걸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꼭꼭 숨겼다.
자라면서 아르얀은 자주 아팠고,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르얀의 심장 위에 새겨진 문양 때문인 것 같다고 49호가 말했다.
그 문양은 아르얀이 일곱 살 때 강제로 새겨진 것이라고 했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 문양과 깊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로웰가의 수장인 아버지의 허락 없이 알려지지 않은 감옥에 누군가를 가두어 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