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열세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록사나는 카일라니 공작가에 거두어졌다.
그때는 부모님을 잃은 충격으로 문라이트 상단에 의탁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록사나가 엘리노어 카일라니 선대 공작 부인을 따라갔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건 그녀가 보여 준 편지 때문이었다.
어머니 스카일라가 엘리노어에게 쓴 편지였는데, 거기에는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록사나를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카일라의 글씨체인 것은 물론 정령의 기운 또한 품고 있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록사나가 휴고 일행과 재회를 하게 된 건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였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의 심부름차 한 상단에 방문했었고, 그곳은 문라이트 상단이었다. 거의 3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을 뿐 문라이트 상단은 그녀의 주변에 존재했었다.
카일라니 공작가에 머물게 된 날부터였다. 가끔씩 그녀의 침대 머리맡이나 창가에는 노란 애기달맞이꽃이 놓여 있었다.
마음을 닫고 있는 와중에도 록사나는 문라이트 상단의 휴고가 보낸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무언의 사랑, 보이지 않는 사랑, 기다림’이었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이 문라이트 상단과 가장 잘 어울리기는 꽃이기는 하지.’
록사나가 혼자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 당시의 휴고는 록사나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애기달맞이꽃을 보내 그녀의 곁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나 보다.
잠시 추억을 회상하던 록사나가 응접실 문을 열고 나섰다.
* * *
키얀의 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자신을 쫓아오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술래잡기를 하던 키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키얀, 나 안 자바?”
키아의 말을 듣지 못한 채, 키얀의 귀가 더 바짝 세워졌다.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의 동물적인 감각은 예민했다.
그가 아무 반응이 없자, 키아가 도도도 걸어가 키얀의 다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키얀!”
“아? 어.”
키얀이 그제야 키아의 말에 반응했다.
“왜 구래?”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이 느낀 게 나쁜 감각은 아니었기에 키얀은 금방 생각을 떨쳐 냈다.
팔을 뻗어 키아의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록사나가 날개를 정령의 힘으로 감춰 준 후, 키얀은 조인족 키아가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수시로 훈련시키고 있었다.
사실 훈련이라기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술래잡기처럼 놀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동할 때 키아는 날아다니는 걸 더 자연스러워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려 생활해야 했다. 그러려면 조인족임을 감추고, 땅 위에서 걸어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키아, 이제는 걸어 다니는 것도 무척 자연스러워.”
“웅, 키아 잘 거러.”
“맞아.”
피식 웃으며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키아의 금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키얀은 록사나가 그들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질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캠든 영지에서만큼이라도 그들이 정체를 감추지 않고 마음껏 본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다.
키얀은 록사나의 그 약속을 믿었다. 믿어도 되는 인간이라고 그의 감이 말했다.
“키아가 날고 싶으면 언제든지 날아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조금만 참고 걸어 다니는 거에 익숙해지자.”
“웅!”
키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벌써 점심이네. 배고프니까, 밥 먹으러 가자.”
“야호!”
키아가 좋다고 만세를 불렀다.
* * *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커다란 형체가 조심스럽게 어둠을 헤쳤다.
경비병들이 있는 곳을 피해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능숙했다.
아모르 궁 뒤쪽에 도착한 남자는 담을 가뿐하게 넘어갔다. 후원을 지나 구석진 곳에 도착한 남자가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소리조차 없는 움직임에 주변의 고요함은 변함없었다. 테라스에 당도한 남자가 넓은 창문을 톡 하고 두드렸다.
잠시 뒤, 넓은 창문 한쪽이 스르르 열렸다.
남자가 창문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자 실내를 향해 비집고 들어가려던 겨울의 찬 공기가 뚝 끊겼다.
백금발의 여인이 벨벳 소파에 앉아 보라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복면을 하고 눈만 드러낸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너무 오랜만에 오는군요. 목 빠지는 줄 알았어요.”
“송구합니다. 워낙 황궁 경비가 삼엄한지라 자주 드나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자 49호의 변명에 빅토리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정기적인 소식의 전달이 늦어질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때요?”
빅토리아의 물음에 49호가 한 사내를 떠올렸다. 그가 아모르 궁에 몰래 잠입한 이유이자, 여자가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이었다.
“여전히 깨어 있는 시간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몸에 큰 이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49호의 말에 빅토리아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오늘 듣는 소식이 늘 마지막일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 무사하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다.
빅토리아가 어른 손보다 조금 큰 뭉치 하나를 49호에게 내밀었다.
“이걸 달여 먹여 보세요. 기운을 보하는 데 탁월하다고 하더군요. 방법은 그 안에 들어 있으니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49호가 조심스럽게 뭉치를 받아 들어 품 안에 갈무리했다.
빅토리아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더 내밀었다.
제법 묵직한 그것을 받아 든 49호가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가 빅토리아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은신하고 있는 그들에게 자금줄은 오직 빅토리아뿐이었다.
“다음에는 언제쯤 다시 올 수 있나요?”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한 달 뒤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빅토리아에게는 한참이나 멀게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그렇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접촉을 최소화하는 게 좋겠지.’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잠시 망설이던 49호가 편지처럼 얇은 봉투 하나를 꺼내 빅토리아에게 건넸다.
빅토리아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49호가 만나자마자 바로 전해 주지 않은 건 과연 이걸 전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위치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 이 순간도 변함없었다.
모든 금전적 지원을 빅토리아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걸 그도 알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속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망 없는 일에 그녀가 이제는 포기하기를 바랐다. 은인을 염려하는 한 조각의 마음이었다.
얇은 봉투를 잠시 쓰다듬던 빅토리아가 고개를 들어 49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를 잘 부탁해요.”
49호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가 빅토리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복면에 가려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건강하십시오.”
사내는 바로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방 안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누군가 황태자의 후궁인 빅토리아와 함께 있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이 차가운 공기 한 줄기만이 짧은 찰나에 맴돌다가 흩어졌다.
빅토리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영롱한 갈색 눈에는 슬픔과 공허가 담겨 있었다.
잠시 후, 빅토리아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 내용물이 나오도록 비스듬하게 기울이자 작은 물체 하나가 그녀의 손 위에 놓였다.
하얀색 깃털이었다.
순식간에 빅토리아의 갈색 눈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소리 내지 않으려는 듯 꼭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웠다.
바스러질까 차마 꽉 쥐지도 못하고 손끝으로 부드러운 깃털을 하염없이 쓸어내렸다.
창밖에는 하얀 깃털을 닮은 눈송이가 하나둘 휘날리기 시작했다.
* * *
황궁을 무사히 빠져나온 49호가 뒤를 돌아 거대한 성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덧, 땅 위는 하얀 눈밭이 되어 있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쿡 찍힌 발자국 위로 함박눈이 나풀나풀 내려왔다.
마치 그의 흔적을 지워 가는 듯한 그 광경은 그들의 신세와도 무척 닮아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되 드러낼 수 없는 존재가 그들이었다.
삼십 대에 접어든 49호는 오늘이 17년 전의 그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은 달랐지만 세 사람이 만난 첫날도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었다.
블랙라몬트 산맥에서 갇혀 지내던 자신과 아르얀은 로웰 후작가로 옮겨졌다. 처음에는 새로 옮겨 온 곳이 로웰 후작가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둘 말고도 원래 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떨어져 단둘만이 후작가에 오게 된 걸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로웰 후작이 자신들을 직접 보고 싶어 해서 따로 데려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49호와 아르얀은 그들이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갇혀 사육되었다.
그렇기에 보통의 인간들과 같은 공간인 성에 머물게 된 것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로웰 후작가에서도 지하 공간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기에 활동의 자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식사를 가져다주는 하인과 두 사람을 감시하는 기사의 존재는 그들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다른 인간들이 나누는 말들을 주워듣고, 그들이 하는 행동들을 관찰하며, 자신들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며칠 지나지 않아 인지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49호가 열세 살, 아르얀이 열한 살이었다.
49호와 아르얀은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갇혀 자랐지만, 자신들의 끝이 죽음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무리에서 생활하던 아이들 중 성년에 가까워진 아이들이 하나둘 무리를 떠났었고,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로웰 후작가에 오기 전 어느 날, 딱 한 번, 딱 한 명을 보긴 했었다.
광기 들린 시뻘건 눈빛과 온몸에 새겨진 이상한 별 문양,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살들, 말 그대로 미쳐 버린 모습이었다.
마치 실험을 당한 듯했고, 탈출을 시도했던 것 같았다. 자신들을 통제하는 자들에게 잡혀가 온전히 그 끝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이였음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블랙라몬트 산맥에서보다 후작가의 생활이 훨씬 편했기에 한때는 이대로 갇혀 지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번 심어진 작은 씨앗은 조금씩 자라나며 그 크기를 키웠다.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열 살의 빅토리아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그 희망은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