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와, 역시! 아벨리오 남작님 서신은 늘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요.”
헥터 역시 트레버의 말에 동의했다.
서신에는 코델리아 일행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젠 숨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각하.”
헥터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로웰 후작령과 맞닿은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거의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조사를 벌이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그들이 알아내었던 사실들을 이제는 전 공작 부인 또한 알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록사나가 그곳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까 봐 아스테리온은 지난번 육망성에 대해 논의를 할 때 그 정보는 쏙 빼놓고 얘기했었다.
헥터는 이에 대해 지적한 것이었다.
“아벨리오 남작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이미 남작님은 많은 걸 알고 계시고 저희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이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작년 말부터 조사에 대한 진척이 거의 없이 난관에 부딪힌 상태였다.
육망성의 힘은 정령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그 힘을 제대로 억누르거나 제어하기 위해서는 정령사인 록사나의 협력이 절실했다.
두 사람의 재촉에도 아스테리온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트레버와 헥터는 자신들의 주군이 전 공작 부인의 노출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군다는 걸 오래전부터 깨달았다.
지금도 그들의 주군은 이성적인 판단과 본인의 감정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이리라.
긴 시간 침묵하던 아스테리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대한 늦춰서 진행한다.”
록사나의 협력 시기를 최대한 늦추겠다는 뜻임을 두 사람은 알아챘다.
아스테리온의 결정에 트레버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하긴, 요즘 시기도 안 좋고, 이제 막 영지를 운영하기 시작했으니 눈에 띄어 좋을 것이 없지요. 새싹이 돋아나기도 전에 밟힐 테니까요.”
지금은 몸을 사릴 때였다.
“그나저나 저는 남작님 머릿속이 참 궁금합니다.”
트레버가 화제를 살짝 돌리자, 헥터가 뭔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아, 헥터 경은 모르겠군요. 글쎄 말입니다. 캠든 성의 고용인을 뽑는데 여섯 살짜리 지원자도 받아 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맹인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요. 기사단에는 여교관을 고용해서…….”
정보원을 통해 알게 된 캠든 영지의 소식들을 트레버가 신나게 떠들어 댔다.
그 이야기를 듣는 헥터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흥미가 감돌았다.
* * *
따뜻하고 축축한 뭔가가 얼굴에서 느껴졌다.
‘뭐가 이리 간지러워.’
잠결에 록사나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을 귀찮게 하는 존재를 내쫓기 위해 손을 뻗어 잡아챘다. 그러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고,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는 새벽이 되었다.
할짝.
무언가 그녀의 손을 핥았다.
‘응?’
할짝할짝.
‘응?’
평상시와 너무도 다른 생경함에 록사나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났다.
채 졸음을 쫓아내지 못한 눈이 겨우 뜨였다.
자신의 품 안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생생한 느낌에 록사나가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눈이 단숨에 확 커졌다.
“벨루카?!”
“아울~”
할짝할짝.
믿을 수가 없었다. 품에 안겨 있는 은빛 털 뭉치가 그녀의 손을 할짝거렸다.
록사나가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꿈인가 싶은 장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조심스레 아기 늑대 정령을 들어 올려 자신의 볼을 마구 비비었다.
“벨루카, 깨어났구나!”
실크처럼 부드러운 벨루카의 은빛 털의 감촉과 실제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기뻐하는 록사나를 보며 벨루카도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을 마구 핥았다.
“하하하, 간지러워.”
록사나가 침대 위를 떼구루루 구르며 벨루카를 끌어안았다.
언제 깨어날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살폈었는데 드디어 벨루카가 눈을 떠 그녀를 깨웠다.
겨우 그녀의 손바닥만 한 벨루카의 몸을 붙들고 록사나는 마음껏 기쁨을 만끽했다.
얼마 만에 제대로 느껴 보는 정령의 기운인지 모른다. 청량하고 몽글몽글 따스한 기운이 그녀의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한참 동안 벨루카의 털을 마구 쓰다듬고, 끌어안고, 뽀뽀하던 록사나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벨루카의 황금빛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벨루카, 긴 잠은 다 잔 거지?”
“아울.”
아기 늑대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꼭 맞다고 대답하는 모양새였다.
“음, 그런데 계속 울음소리를 내네. 혹시 정령어를 못 하는 거야?”
정령어를 사용하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아우울…….”
벨루카의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그렇구나. 아직 아기 정령이라서 그런 건지도 몰라. 차차 할 수 있을 거야.”
록사나의 위로에 벨루카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다시 살랑거렸다.
한겨울의 이른 아침에 잠을 깨게 되었지만 록사나는 벨루카와 함께 아이린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록사나의 방에 들어온 아이린이 잠에서 깬 벨루카를 보고는 너무 귀엽다며 방방 뛰었다.
성 사람들에게도 벨루카의 존재가 알려졌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벨루카를 진짜 아기 늑대로 알았다.
* * *
아이들의 공부방이 있는 별채의 빈방에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치원이었다.
생소한 용어에 처음엔 다들 그게 뭔가 했지만 0~6세 영유아들의 놀이방이라는 록사나의 설명에 쉽게 납득했다.
성내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과 기사단의 자녀들을 주 대상으로 하며 별도의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말에 다들 환호했다.
아이들을 위한 물품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했기에 정식 개원은 2월의 첫날로 정해졌다.
코델리아와 잭, 필립은 유치원 개원 업무를 돕기로 했다. 개원 이후에도 코델리아는 영유아 교사로 근무하는 걸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눈에 띄는 그녀의 뾰족한 물갈퀴 귀는 인간의 귀처럼 보이도록 벨루카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코델리아는 마리솔, 마빈, 키아까지 유치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흡족해했다.
필립은 유치원과 아이들 공부방 시설 관리를 담당하기로 했다. 일종의 수위 아저씨와 비슷한 업무였다.
잭은 유치원 개원을 돕는 거 말고는 정해진 업무가 없었다. 아직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록사나는 따로 생각해 두고 있는 일이 있었다.
물론 잭이 수락해야 하지만 말이다.
록사나와 아이린, 코델리아와 잭, 필립이 한자리에 모였다.
개원에 필요한 시설과 물품 등을 파악하고 정리하며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록사나는 다른 세계의 지식을 활용하여 유치원의 운영 방침과 체계를 정리하여 제시했다.
“영주님, 유치원이라는 건 정말 획기적인 직원 복지 혜택인 거 같아요.”
“맞습니다. 귀족가보다 더 뛰어난 교육을 평민 아이들이 받을 수 있게 되는 거 아닙니까?”
“허허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도 이런 건 처음 들어 봐요.”
단순한 놀이방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걸 알게 된 아이린과 잭이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필립과 코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필립조차 난생처음 들어 보는 시설이었다.
어릴 적부터 또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 수 있고, 웬만큼 잘사는 집 아이가 아니라면 자주 접하기 힘든 동화책까지 갖춘 교육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는 안전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어 안심하고 본인들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순차적으로 전 영지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시라니!
흥분과 놀라움으로 물든 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록사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지 발전에는 영지가 가지고 있는 철이나 보석 같은 자원이 많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가장 큰 자원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이에요.”
“아!”
네 사람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흠흠.”
그들의 열렬한 반응에 민망해진 록사나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화제를 돌렸다.
“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얼추 정리가 된 거 같아요. 코델리아와 함께할 유치원 교사들도 추가로 뽑기로 했고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 그거 가져와 줄래?”
“네.”
잠시 후 아이린이 제법 큰 상자 하나를 네 사람의 앞에 내려놓았다.
상자를 열자, 익숙하지만 어딘가 새로운 물품이 코델리아와 잭, 필립의 눈에 들어왔다.
“영주님, 이건 날개 아니에요?”
“맞아요.”
어리둥절한 그들의 반응을 즐기며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저번에 얘기했었잖아요. 키아도 보통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요.”
“네.”
키아가 다른 아이들과 평범하게 어울리려면 날개를 감추어야 했다.
그 방법은 록사나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기에 코델리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영주님께서 벨루카 님의 힘으로 날개를 감추어 주셨잖아요.”
덕분에 키아는 어제부터 성내의 아이들이 있는 곳에 놀러 가기 시작했다.
오늘로 겨우 이틀째라 키얀에게 딱 붙어 다른 아이들을 여전히 낯설어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벨루카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이 방법을 먼저 사용하려고 했어요.”
록사나가 날개 한 쌍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것은 진짜 날개가 아니라, 천 등을 이용해 만든 일종의 날개옷이었다.
진짜 날개를 감추고, 혹시라도 실수로 진짜 날개를 펼쳤을 때 다른 사람들이 가짜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키아에게 입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록사나가 그 사실을 세 사람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거 그냥 놔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허허.”
필립이 멋들어진 날개옷에 감탄했다. 어린 손주들을 둔 할아버지의 안목은 뛰어났다.
날개옷은 짧은 조끼 형태로 되어 있어 아이들이 입었을 때 진짜 날개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게 틀림없었다.
“왠지 아이들이 엄청 좋아할 거 같아요!”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코델리아가 날개옷이 마음에 드는지 이리저리 만져 보며 살펴보았다.
아이린은 어제 록사나와 미리 날개옷들을 봤었다. 다시 보니 아이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치원 개원하면 아이들에게 선물로 하나씩 주려고요.”
“진짜요?”
다른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특히 코델리아와 잭 부부의 눈빛은 무척 강렬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날개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만으로도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