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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60)화 (60/214)

60화 

“저희도 할 얘기가 있어요.”

“두 사람 얘기 먼저 들어 볼까요?”

록사나의 양보에 잭이 입을 열었다.

“캠든 성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어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겠지만요.”

“저에게도 일을 주십시오.”

“나도…….”

옆에 있던 필립과 키얀도 거들었다. 그들은 캠든에서도 숨어 지내고 싶지 않았다.

“어머, 잘됐네요. 저도 여러분과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왔거든요.”

록사나가 두 손뼉을 짝 마주쳤다.

“그런데 키얀은 제외예요. 신체적 조건이 부합한다고 해도 아직 미성년자이니까요.”

“아, 왜?”

록사나의 말에 키얀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키얀, 영주님께는 존댓말을 써야지.”

필립이 키얀에게 주의를 주었다.

“괜찮아요.”

대수롭지 않게 록사나가 손을 내저었다.

평상시 코델리아 일행과 편하게 말을 나누는 키얀은 존댓말을 낯설어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록사나에게도 말을 놓게 되었다.

기겁을 한 필립과 잭이 앞으로는 존댓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단 며칠간의 교육으로는 효과가 전혀 없었다.

록사나 또한 키얀의 말투에 대해 개의치 않아 했다.

“대신 네가 할 건 따로 있어.”

“뭔데?”

언제 입이 튀어나왔냐는 듯 키얀의 두 눈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처럼 반짝거렸다.

“우선 어른들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알려 줄게.”

“알았어.”

바로 알려 주지 않는 록사나에게 살짝 불퉁한 얼굴을 내비친 키얀이 한 발 물러섰다.

록사나의 시선이 코델리아와 잭, 필립에게로 향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그녀는 캠든 성내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먼저 얘기했다.

영지 재정비 계획, 고용인들의 확충과 아이들 교육, 기사단의 변화 등 대부분이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록사나의 앞으로의 계획까지 들은 세 사람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다들 흥미롭다는 표정은 똑같았다.

특히 0~6세까지 영유아를 위한 유치원이라는 걸 개설할 거라는 이야기를 무척 반겼다.

아이들은 또래와 어울려 놀 수 있고, 어른들은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더욱 그러했다.

“마리솔하고 마빈은 외적으로 다른 아이들과 차이가 없으니까 염려가 안 되지만, 키아는…….”

혼자 외톨이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코델리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이 키아의 아름다운 황금빛 날개로 향했다.

그러자 록사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다 방법이 있어요.”

* * *

리온 제국 황궁의 대회의장.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황태자도 후궁을 들일 수 있다는 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키기 위한 회의가 막바지에 다다랐었다.

그런데 뒤늦게 등장한 카일라니 공작으로 인해 그 건은 완전히 뒤로 밀려 버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금 들은 것에 대한 진위 여부를 따지느라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과연 그 일의 배후는 누구인가.

카일라니 공작은 도노반 황태자를 지목했다. 그가 직접 말한 게 아니었다. 모든 증거와 증인의 자백이 황태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장 높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한 단 아래 위치한 곳에 앉은 도노반 황태자는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카일라니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주먹은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부들거렸다.

“허허. 파파베르를 유통시킨 사람이 황태자라니요.”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설마 그럴 리가요.”

“맞습니다. 우리 리온 제국의 황태자이신데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을 벌이셨겠습니까?”

“동의합니다. 감히 황태자 전하를 모함하다니!”

“모든 것이 전하를 가리키…….”

“그 입 다무시오!”

회의장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오직 카일라니 공작만이 한 마리의 고고한 학처럼 고요했다.

탕!

황제가 짚고 있던 왕홀로 바닥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귀족들의 입이 다물렸다. 불편한 침묵이 공간을 메웠다.

황제 알프레드가 매서운 눈으로 카일라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노회한 정치가인 황제는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도노반은 그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황손 막시밀리언의 정당성을 내세워 제국 법을 개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는 사랑하는 아들과 다음 황권을 위해 힘을 실어 주고 싶으면서도 혹시나 자신을 넘어설까 요즘 고민이 많았었다.

제국 법이 개정되는 걸 카일라니 공작이 반드시 막아 내 줄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막아설 줄은 몰랐다.

이에 알프레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골치가 아팠다. 정말로 도노반이 파파베르 유통 사건의 배후라면 황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알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카일라니 공작, 공작이 조사한 바를 황궁에서도 조사를 하는 게 좋겠네. 그대를 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야. 사안이 중대한 만큼 공정한 조사를 통해 확실하게 밝혀내야 하지 않겠는가.”

“네.”

알프레드의 야비한 속내를 눈치챈 아스테리온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 사건은 황실 1기사단이 도맡아 일주일간 재조사하도록 한다. 철저히 조사하게.”

“네, 폐하.”

알프레드의 오른팔이자 황실 1기사단장인 조반니 백작이 명을 받들었다.

자신의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 알프레드가 자리를 떴다. 뒤를 이어 도노반도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꼬리만 쳐 내고 이익을 취하겠다는 거군.’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스테리온은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쨍그랑!

알프레드가 내던진 도자기가 벽에 부딪치며 산산조각 났다.

“그동안 오냐오냐해 줬더니… 네놈이 제정신인 게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알프레드가 노성을 터뜨렸다.

“억울합니다, 아버지!”

도자기 파편에 맞아 얼굴 위로 붉은 실선이 생겼지만 도노반은 상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자신에게 크게 화를 내는 아버지를 보며 내심 당황했다.

‘젠장! 꼬리가 밟혀서는!’

“아버지라 부르지도 말거라. 네가 정녕 내 아들이 맞는지 심히 의심스럽구나.”

도노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프레드가 언급한 말은 다른 형제와 황족들에게 조롱당하며 그가 자주 들어야만 했었던 말이었다.

아비인 황제까지 저렇게 말하니 그는 속이 뒤집혔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황태자인 네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을 벌인 게야?”

알프레드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장남을 노려보았다.

“저는 파파베르가 그런 약초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터너 자작이 소개시켜 준 외국 상인이 통증을 완화시키는 데 탁월하다고 해서 백성들을 위해…….”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황가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아이고, 머리야.”

알프레드가 머리를 짚었다. 계속 핏대를 높이며 소리를 질렀더니 두통이 몰려왔다.

‘네이든이 황태자일 때가 그리울 줄이야.’

첫아들을 황실 밖에서 자라게 했다는 그의 알량한 양심과 자존심이 다른 자식들보다 도노반을 애틋하게 대하게 했었다.

그게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점점 나이 들어 가며 알프레드는 힘을 잃어 가고 있었고, 정치판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도노반이 무릎까지 꿇고 거듭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의 노여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 제발 도와주십시오.”

【 이젠 숨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

서른 중반의 다 큰 아들이 무릎으로 기어 와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알프레드는 얻고자 하는 결과를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썩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뭘 말이냐? 제국 법을 개정하는 거? 아니면 파파베르 사건을 말하는 거냐? 너도 알겠지만 두 가지 모두 해결하기에는 어렵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었다. 또한 황태자의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도노반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악문 그가 결정을 내렸다. 황태자의 자리에서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서기가 불가능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한 소자의 잘못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파파베르가 퍼진 것은 제가 결코 의도했던 일이 아니옵니다.”

미련한 아들의 결정에 알프레드가 노기를 조금 가라앉혔다.

“정말이냐?”

눈 가리고 아웅하는 뻔한 질문이었지만 황제는 재차 아들의 뜻을 확인했다.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아버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했지만, 도노반은 다른 하나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파파베르 먼저 해결하고 다시 하면 돼.’

황제가 시종을 호출해 1기사단장 조반니 백작을 불러오라고 명하자, 도노반이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일주일이 되는 날, 파파베르 사건에 대해 황실 1기사단장이 조사 결과를 공표했다.

파파베르를 처음 소개했던 외국 상인은 이미 제국을 벗어나 달아난 상태라 잡지 못했다.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며 리온 제국민을 위험에 빠뜨린 터너 자작과 캠든 영지에서 붙잡힌 상인들은 수도 한복판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도노반은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죄로 근신에 처해졌다. 그가 추진하려 했던 제국 법 개정은 당연히 흐지부지되었다.

“역시 황제답네요.”

제국 신문을 내려놓으며 트레버가 말했다.

황제는 권력을 황태자와 결코 나누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고, 본인의 아들 또한 매정하게 버리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이 반쯤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흐트러짐 없는 동작이 무척 우아했다.

“늙은 여우가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아스테리온의 입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죠.”

트레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달한 쿠키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오도독오도독.

밤낮없이 일에 매여 있다 보니 요즘 단것이 자꾸 당겼다.

똑똑똑.

“헥터입니다.”

“들어와.”

정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헥터가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벨리오 남작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서신을 받아 든 아스테리온이 겉봉투를 바로 뜯었다.

“이번엔 무슨 일인가요?”

트레버가 아스테리온의 맞은편에서 기웃거렸다.

이번이 두 번째로 받는 서신이었지만 전 공작 부인에게서 오는 서신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평가하는 트레버였다.

서신을 다 읽은 아스테리온이 트레버에게 넘겨주었다. 트레버의 어깨 너머로 헥터 또한 내용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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