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남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역시 직접 뵈니 영주님이 더 마음에 들어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사가 말했다. 화끈한 성격답게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거 다행이네요. 제가 부인에게 잘 보여야 하거든요.”
“네?”
보통은 로사의 직설적인 말에 상대방은 대부분 당황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역으로 그녀가 당황했다.
록사나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도 로사처럼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전에 용병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모르고 만났으면 정말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전직에 있을 때보다 근육이 많이 빠져서 그래요.”
용병 일을 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속뜻을 알아챈 로사가 마치 그때가 그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용병 일을 할 때의 시오마라 부인도 무척 궁금하네요. 기드온 경이 한눈에 반했다고 들었거든요.”
“호호호, 맞아요. 용병일 때의 저는 한층 더 매력적인 사람이었답니다.”
로사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이에 록사나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로사는 용병계에서 실력과 미모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지금도 아이 둘의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검 실력이 녹스는 걸 싫어해 자신과 꾸준히 대련을 하고 있다며 기드온 경이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차로 목을 축인 로사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영주님께서 제가 잘 보이고 싶으신 이유가 뭔가요?”
“시오마라 부인.”
록사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로사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요, 로사. 나도 록시라고 불러 줘요.”
단번에 변한 호칭과 영주를 애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 듯 로사의 입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물론이죠.”
“로사, 다시 검을 정식으로 들 생각 없어요?”
“정식으로요?”
“지금 기사단에서 체력 훈련을 받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중에 여자아이들도 있어요.”
로사의 눈빛이 대번에 진중해지며 무척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에 여자아이라니!
다른 영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 말씀은…….”
“몇 년 내에 캠든 기사단에 많은 수의 여기사들이 생길 거예요.”
“기사단 내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다른 영지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고요.”
“기사단 반발은 차츰 누그러질 거예요. 그리고 타 영지에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면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면 되죠. 내 영지에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지들이 뭔 상관이에요.”
“푸하하하하!”
록사나의 패기에 귀부인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로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날씬한 허리까지 접어 가면서 웃는 모습을 보니 절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로사가 아이들의 스승이자 길잡이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로사의 웃음이 잦아들자, 록사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요, 지금 대답할게요.”
로사는 영주의 말을 자르며 거침없이 답했다.
반응을 보니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록사나는 잔뜩 긴장이 되었다.
꼴깍.
록사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로사의 입이 다시 열리길 정적 속에서 기다렸다.
“영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정말이죠, 로사?!”
록사나가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로사의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록사나의 얼굴은 간절히 원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같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잡힌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로사는 생각했다.
‘나보다 작은 이 두 손으로 다른 영지들의 견제를 어떻게 이겨 낼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가 옆에서 언니처럼 잘 도와줘야지.’
“정말이에요.”
“와! 들었어, 아이린? 로사가 승낙했어.”
로사의 손을 잡은 채로 록사나가 자신의 팔을 붕붕 흔들었다.
“똑똑히 들었어요.”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관망하던 아이린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흥분해서…….”
슬그머니 손을 풀며 록사나가 사과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초면이라는 것도 잊었었다.
“괜찮아요. 이제 출근 시기와 제 역할에 대해서 논의해 볼까요?”
“출근은 빠를수록 좋아요. 그리고 로사가 맨 처음 해 줄 일은요…….”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 동안 쑥덕거렸다.
* * *
캠든 영주를 만나고 집으로 귀가한 로사는 옷장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용병 시절의 옷을 꺼내 들었다.
흑색의 긴 바지와 재킷, 흰 셔츠, 브라운 컬러의 가죽조끼, 검은 망토까지. 낡은 감이 있었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로사가 한 손으로 옷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심장이 무척 두근거렸다.
“여보!”
쾅!
그때 침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기드온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곧장 로사 앞으로 다가온 기드온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까악! 내려놔, 기드온.”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제자리에서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았다.
“나랑 내일부터 같이 출근하는 거지? 진짜지?!”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나 어지러워!”
로사가 꽥 소리 질렀다.
“넵.”
기드온이 냉큼 로사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을 튼튼한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빨리 말해 봐. 진짜야?”
“응.”
애써 웃음을 감추며 로사가 시크하게 반응했다.
“너무 좋다.”
로사의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붓는 기드온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뭐, 내가 한 능력 하잖아.”
“맞아. 우리 여보 너무 멋져!”
기드온이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당신이랑 내일부터 매일 출퇴근을 함께 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아. 그리고 우리가 성내 커플 1호야!”
그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현역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로사였다.
뛰어난 검술 실력과 용병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아내였기에 기드온은 그게 늘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가끔씩 그와의 대련을 통해 아쉬움을 풀기는 했지만, 그녀의 열망을 해소하기에는 한참 부족했었다.
그래서 그가 캠든 기사단장으로 자리하게 되었을 때 로사도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두 아이가 너무 어려서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기에 포기를 했었다.
작년에 아이들이 열 살과 다섯 살이 되면서 이제 슬슬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새 영주가 오게 되었다.
그래서 또 마음을 접었었는데…….
퇴근 전, 영주인 록사나에게 로사의 기사단 채용과 교관 서임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거의 울 뻔했었다.
용병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로사가 마음껏 본인의 재능을 펼칠 수 있다.
그 사실에 기드온은 지금도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보다 당신이 더 좋아해?”
“여보, 로사! 긴 시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
검을 좋아하는 자신을 신경 쓰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던 남편이었다. 그녀 또한 남편의 변함없는 지지와 응원이 항상 고마웠다.
“나도.”
로사는 쑥스러워 자신의 얼굴을 남편의 넓은 품 안에 감추었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기드온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얼른 자자.”
“응?”
“그래야 내일이 빨리 오지. 어서 같이 출근하고 싶단 말이야.”
남편의 엉뚱함에 로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영주님!”
연무장에 갔던 아이린이 다급하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이린, 숨 먼저 가다듬고 얘기해도 늦지 않아.”
헐떡거리는 아이린을 보며 록사나가 느긋하게 말했다.
“헉, 허억. 아니,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네가 이러는 걸 보니 계획대로 잘된 거 같은데 뭘.”
“귀신이시네요. 맞아요! 로사 경이 아주 깔끔하게 기사들을 초전박살 냈어요.”
눈을 열심히 반짝이며 아이린이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록사나와 로사의 계획은 간단했다.
출근 첫날, 로사가 대련을 빙자해 기사들을 깨부수는 거였다.
오로지 실력으로 그들을 제압한다면 여자가 검을 든다는 말도, 그녀가 기사단의 교관직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도 쏙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록사나가 로사 경을 영입한 건 아이들을 담당할 교관이 필요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여기사로 성장할 아이들을 위한 밑거름이기도 했다.
명확한 대상이 눈앞에 있고, 그들을 이끌어 줄 알맞은 스승이 있다면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지 내 여기사 또는 여병사들의 수가 증가하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록사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사단에 가 보시게요?”
“아니, 후원 별채로 가자.”
외떨어진 후원 별채는 코델리아 일행이 편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독채로 내준 곳이었다.
별채 뒤쪽으로는 넓은 공터와 낮은 산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기에 제격이었다.
두 사람이 별채에 들어서자, 1층 공간에서 놀고 있던 키아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왔다.
“록시.”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키아가 두 손을 활짝 뻗었다. 요 며칠 틈날 때마다 별채에 들렀더니 그녀의 이름을 외워 버렸다.
“안녕, 키아.”
록사나가 미소 지으며 허공에서 달려드는 키아를 받아 안았다.
‘윽. 하루가 다르게 충격이 커지네.’
아직은 힘 조절이 부족한 다섯 살 키아가 그녀의 몸에 부딪치듯 안길 때면 충격이 제법 강했다.
록사나가 비교적 자유로운 한 손으로 키아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놀고 있었어?”
“웅!”
“코델리아는 어디에 있어?”
“쪼기.”
대답과 동시에 키아가 날개를 척 펼쳤다. 그러고는 홀을 가로질러 빠르게 날아갔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요.”
“나도 그래.”
록사나와 아이린은 키아가 날아간 방향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열려 있는 별채 뒷문을 빠져나가니 겨울 햇살이 잘 내리쬐는 장소에 코델리아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꺄하.”
마리솔과 마빈이 뒤뚱거리며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안녕, 마리솔, 마빈.”
록사나가 마리솔과 마빈을 살짝 포옹했다. 이어서 쌍둥이의 손이 아이린에게로 향했다.
“마리솔, 마빈, 보고 싶었어!”
아이린이 쌍둥이들을 꼬옥 끌어안았다. 어린 동생들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팔불출 언니이자 누나 같은 모습이었다.
셋을 뒤로하고 록사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바닥에 넓은 천을 깔고 앉아 있었다.
“오늘은 중요하게 나눌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그들의 옆에 앉으며 록사나가 운을 떼었다.
코델리아와 잭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록사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