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캠든이 잘사는 영지가 되는 건 여러분과 영지민들의 손 하나하나에 달렸다는 걸 결코 잊지 마세요.”
긴말을 끝마친 록사나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그녀의 각오와 다짐을 되새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짝. 짝. 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멀리서나마 영주의 에메랄드빛 눈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표정에 묘한 설렘과 기쁨이 감돌았다.
록사나의 얼굴에도 작은 흥분이 피어올랐다. 그러다 이내 쑥스러워진 그녀가 냉큼 자리를 피하며 본관으로 향했다.
흐뭇한 표정을 지은 프레드릭과 아이린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로 돌아온 록사나는 아이린이 내민 물잔을 받아 든 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아. 살 것 같다.”
“전혀 긴장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요.”
빈 물잔을 건네받으며 아이린이 말했다.
“그랬던 거 같아. 내가 한 말 중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었잖아.”
앞으로 캠든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할 일로 업무를 나누지 않겠다는 걸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용인들 대부분은 거의 영주님이 말씀하신 것에 찬성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옆에서 프레드릭이 록사나를 안심시켰다.
“그랬다면 다행이에요. 기사단 쪽은 몇 명 빼고는 좀 회의적인 것 같지만요.”
“차차 그들도 변할 겁니다.”
“그래야죠. 그래서 말인데요.”
록사나가 프레드릭과 아이린을 향해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세 사람은 문서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캠든만의 규율과 규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를 어길 시 그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었다.
특히 캠든 성내에서의 규율은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죠.”
아이린이 다 정리된 내용을 훑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록사나와 프레드릭 또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희망찬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이걸 성내에 공표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변화의 바람을 성내에서부터 차츰 영지 전체로 퍼뜨리는 게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똑똑.
“들어와요.”
고용인 샐리가 들고 온 것을 록사나에게 내밀었다.
“영주님께 온 서신입니다.”
이를 받아든 록사나가 바로 뜯어보았다. 로사 시오마라가 내일 오후에 캠든 성을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 *
록사나가 별채 바깥의 벽에 착 달라붙었다. 그녀의 뒤로는 그림자처럼 아이린이 함께 하고 있었다.
“록시 님, 보여요?”
아이린이 소곤거렸다. 아직은 록사나보다 키가 작은지라 까치발을 들어야 높은 창틀 너머가 겨우 보였다.
창문 안쪽의 상황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피던 록사나가 후다닥 몸을 낮췄다.
덩달아 아이린도 창문 아래에 주저앉았다.
“왜요?”
혹시라도 안쪽에 소리가 들릴세라 아이린은 목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휴. 선생님이랑 눈이 마주칠 뻔했어.”
록사나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달깍.
창문 걸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고, 록사나와 아이린은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졌다.
누군가 그들의 머리 위의 창문을 밀며 열어젖혔다.
“졸리지? 점심을 먹은 직후라 더 그럴 거야. 잠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 잠이 확 깰 테니 조금만 창문을 열어 놓을게.”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록사나와 아이린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각자의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입까지 막으며 숨을 참았다.
수습이자 임시 교사인 패트릭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록사나와 아이린은 오리걸음으로 그곳을 재빠르게 벗어났다.
“그냥 들어가서 보셔도 될 텐데…….”
구부렸던 무릎을 펴며 아이린이 작게 투덜거렸다. 쭈그려 앉아 있었던 다리가 저려 왔다.
“평소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어서 그랬어.”
록사나도 잠시 자신의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방금 전에 보았던 공부방 풍경들을 떠올렸다. 나이가 제각각인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모든 의자와 책상이 성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한참 어린 아이들은 어깨까지만 간신히 보였다.
필기하는 것이 불편했는지 어떤 아이는 의자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책상 위로 상체를 한껏 내밀고 있었다.
‘수습 고용인 중에 목수가 있었지. 아이들 몸에 맞는 책상과 의자부터 먼저 만들어야겠어.’
임시 교사 패트릭은 비쩍 마른 체격에 약간 날카로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얼핏 본 교사로서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연령층이 제각각인 아이들을 비슷한 나이대로 묶어 자리에 앉혀 놓고, 한 교실에서 돌아가며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다 글을 몰라서 처음 배우는 단계라 괜찮지만… 앞으로는 교사도 더 필요해.’
록사나가 자신의 옆에서 걷는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왜 그러냐는 듯 아이린이 물었다.
“응. 아이린, 지금 가서 목수들을 내 집무실로 데리고 와 줘. 그리고 아이들 수업이 다 끝나면 패트릭 씨한테 가서 내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해 주고.”
“네.”
아이린이 목수들을 찾아 자리를 뜨고, 록사나는 그길로 바로 집무실로 복귀했다.
얼마 안 있어 아이린과 두 명의 목수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반가워요. 우선 앉아요.”
록사나가 자리를 권하자, 두 사람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 명은 오십 대에 가까워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이십 대 후반이었다.
아침에 기사단 연무장에서 영주를 처음 보았던 그들은 록사나를 직접 만나게 되자 안절부절못했다.
아이린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그들의 근황을 물었다.
“단테하고 숀 맞죠?”
“저희 이름을 알고 계시군요.”
깜짝 놀란 두 사람 중 연륜이 있는 단테의 주름진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성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록사나의 말에 단테와 숀은 속으로 감탄했다.
“성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도 꾸준히 할 수 있어서 좋고요.”
쑥스러운 듯 노총각인 숀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해요?”
단테와 숀은 캠든 성의 낡은 곳을 보수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무척 만족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영주님.”
단테와 숀은 정말 만족하는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두 사람도 성에서 지내기 시작하며 이것저것 봐서 알겠지만 캠든 성은 규모도 크고 고칠 곳도 많아요. 성실하게 임한다면 일감은 끊이지 않을 거예요.”
단테와 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앞에 차가 놓이고, 차를 두어 모금 마신 후 록사나가 본론을 꺼냈다.
“성을 보수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두 사람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불렀어요.”
부드러운 분위기에 긴장감을 내려놓은 두 목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공부하는 걸 잠깐 보게 되었는데, 책상과 의자가 어른용이라 불편해 보였어요. 그래서 두 사람에게 아이들 각자에게 맞는 개인 책상과 의자 제작을 맡길까 해요.”
“맡겨 주십시오, 영주님.”
“당장 오늘부터 시작해도 됩니까?”
열의에 불탄 두 사람이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급한 게 아니면 오늘부터 시작해도 돼요.”
“네, 영주님.”
영주에게 직접 일을 의뢰받은 두 사람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앞으로 학생들의 수가 더 늘어날 거니까 연령대에 맞는 책상 규격도 마련해 주세요.”
“네?”
잠시 의문을 품었던 두 사람은 추후 영지 아이들에게 교육이 확대될 거라는 록사나의 설명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지금 아이들이 서른네 명인데 언제까지 만들 수 있어요?”
“저희 둘이서 2~3일이면 충분합니다!”
단테가 자신 있게 말했다.
고용인에 지원한 아이들 서른 명과 기존에 고용된 미성년자 네 명까지 포함한 인원수였다.
그 네 명은 케빈과 마리사, 텃밭을 담당하게 된 제프리, 마지막으로 나디아의 딸 리나였다. 그들 역시 다른 아이들과 수업을 함께 듣고 있었다.
두 목수가 자리를 뜨고, 수습 교사 패트릭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패트릭 역시 본인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수업이 끝나고, 글을 모르는 성내 사람들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는 록사나의 말을 패트릭 또한 흔쾌히 받아들였다.
록사나는 프레드릭을 따로 불러 성인반 수업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 한 시간씩 돌아가면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하는 걸로 의견을 나누었다.
물론 정규 고용인과 수습 고용인의 구별을 따로 두지 않았다. 기사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록사나의 영지 발전 프로젝트 중 하나인 문맹률 낮추기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날 오후, 마차 한 대가 캠든 성에 도착했다. 카일라니 공작 이후 공식적인 첫 방문자라고 할 수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아름다운 여인이 프레드릭의 안내를 받아 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록사나가 보던 서류를 바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홍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프레드릭은 조용히 문을 닫고 자리를 떴다.
여인의 민트색 눈이 아름답게 반짝거리며 록사나를 마주했다.
“어서 오세요, 시오마라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로사 시오마라입니다.”
로사가 우아하게 살짝 무릎을 굽혔다 폈다.
“록사나 아벨리오에요. 정말 반가워요. 우선 앉아서 얘기 나눌까요?”
“좋아요.”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자, 아이린이 준비된 차를 따랐다.
“아, 이쪽은 제 보좌관이자 시녀인 아이린이에요.”
앞으로 서로 얼굴을 자주 볼 수도 있었기에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안녕하세요, 시오마라 부인.”
“반가워요, 아이린.”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아이린이 한쪽으로 물러났다.
“차 먼저 드세요. 민트 차인데 부인의 눈이 너무 아름다워 차의 수색이 오늘은 별로네요.”
“어머! 호호호.”
로사가 뜻밖의 기분 좋은 말을 들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아부처럼 들리겠지만 진심이에요. 부인처럼 매혹적인 눈동자는 처음이에요.”
“감사합니다. 제 눈동자 색에 대한 칭찬은 제 남편 이후 영주님의 말이 가장 최고네요.”
“영광이에요.”
두 사람은 기꺼운 마음으로 잠시 차를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