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멀리 숨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로웰 후작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영지여야만 해!’
다행스럽게도 잭이 몸담고 있는 상단의 다음 목적지 중 한 곳이 카일라니 공작가의 레드포드 영지였다.
그곳의 영주인 카일라니 공작의 권력은 황족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코델리아 일행과 관련해 로웰 후작과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면 공작이 좌시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선대부터 이어져 온 카일라니 공작가의 엄정한 통치가 그 근거였다.
잭은 원래 레드포드 영지로 물품을 운송하기로 되어 있던 직원과 임무를 바꿨다. 그러고는 겸사겸사 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하며, 눈이 올 것 같으니 먼저 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밤이었기에 동료들이 말렸지만, 눈이 오면 일정을 맞추기 어렵다는 그의 주장에 더는 붙잡지 않았다.
또한 레드포드 령에 전해야 하는 것은 서신 하나가 전부였고, 거기에서 마물 가죽을 싣고 본점이 있는 게일 백작령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 업무는 혼자서 해야 했기에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었다.
잭은 그렇게 빈 마차 하나를 끌고 가 일행의 눈에 띄지 않는 숲의 다른 곳에 숨겼다.
그리고 토굴로 가 코델리아 일행을 몰래 태워서 레드포드에 그들을 숨겼다.
잭과 코델리아의 긴 이야기를 들은 록사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로웰 후작가의 세력으로 보이는 자들이 레드포드 영지에서 은밀히 세 사람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걸 알게 된 계기가 육망성 문양을 가진 사람을 키얀이 봤다는 거군요?”
“맞아요. 저희는 그곳의 실험체였으니까요.”
코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
코델리아 일행은 인적이 드문 산골 마을에서 잭과 필립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처음 1년은 외부와의 접촉을 삼가며 산속에서만 생활했다.
숨어 지내는 삶이었지만 코델리아가 함께 데리고 탈출한 키얀과 키아가 잘 자라고 있었고, 두 아이는 산에서만큼은 마음껏 뛰어놀았다.
시간이 흐르며 코델리아 일행은 인간들을 속여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집 밖을 나설 때는 눈에 띄는 외모를 매번 감춰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외출 또한 차츰 익숙해졌다.
그사이 잭과 코델리아는 사랑에 빠졌다. 부부의 연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아이들인 마리솔과 마빈이 태어났다.
추격에 대한 공포가 느슨해지고, 이대로만 살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였다.
잭을 따라 올랜도 상단 일을 거들고 돌아온 키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잭의 표정 또한 심각했다.
레드포드 중심가에서 한쪽 눈에 육망성 문양을 가진 자를 우연히 보았다는 얘기에 코델리아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코델리아에게 모든 과거 얘기를 들었었던 잭과 필립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역을 레드포드 영지 내로 한정했다. 로웰 후작에게 맞설 수 있으며 가장 안전한 곳이 카일라니 공작 령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잭은 상단의 일을 그만두었고, 필립은 대여 마차 일을 계속하며 조심스럽게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필립은 록사나와 아이린을 캠든 영지로 데려다주는 일도 맡게 되었다.
되돌아가는 그에게 거액의 여비와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푸는 록사나를 보며 필립의 마음 한구석에 후보지 한 곳이 추가되었다.
캠든은 레드포드 영지와는 무척 가까웠고, 로웰 후작 령과도 한참 떨어진 외지였다. 무엇보다 영주가 록사나 아벨리오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시 스치는 인연이라고 할지라도 잘 알게 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잠시 스친 인연이었지만 필립에게는 록사나 아벨리오가 그런 사람이었다.
필립이 자리를 비운 2주 사이, 육망성 문양을 가진 자는 레드포드에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수하들이 그들의 옆 마을까지 접근했다. 당장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레드포드에 복귀한 필립이 자신의 생각을 코델리아와 잭에게 말했다. 이에 두 사람뿐만 아니라, 키얀과 키아도 동의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네 명의 아이를 데리고 야반도주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닌 산을 넘으며 이동했다.
키얀은 열세 살 아이였지만, 수인족에 몸이 이미 어른이었기에 그들 일행이 도보로 이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 *
‘그렇다고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프레드릭과 기드온 경, 아이린까지 코델리아 일행을 짠하게 바라보았다.
캠든에 당도하기까지 엄청 고생했다는 걸 그들의 행색이 말해 주고 있었다.
“키얀이 봤다는 육망성을 가진 자가 아무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와 동일 인물인 거 같아요.”
“네?!”
코델리아 일행이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잭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안심해도 돼요. 그자는 죽었어요.”
얼마 전, 어촌 마을 시로난에서 록사나가 겪었던 일들을 코델리아 일행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육망성을 가졌던 자와 그 일당이 모두 카일라니 공작님 손에 죽었다는 말씀이군요.”
잭이 차분해진 눈빛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 옆에서 필립과 키얀 또한 다행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맞습니다. 정보를 캐기 위해 한 명만 남겨 놓고 모두 처리했으니 그들의 추격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드온 경의 말에 록사나가 살을 덧붙였다.
“물론 숨겨진 그들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제국에서 이곳이 가장 안전할 거예요.”
록사나가 정령사라는 것과 아기 늑대 정령 벨루카까지 알게 된 코델리아 일행에게 희망이 생겼다.
“그럼, 저희가 머무는 걸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코델리아의 물빛 눈동자가 간절하게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에요. 캠든에 온 걸 환영해요, 코델리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록사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한 명씩 호명해 주었다.
그제야 코델리아와 잭, 필립의 얼굴에서 긴장과 두려움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잔뜩 경계하던 키얀의 표정은 한결 풀어졌고, 키아, 마리솔과 마빈은 어느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영주님…….”
말을 잇지 못하는 필립을 향해 록사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필립,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그리고 우선은 쉬는 게 좋겠어요.”
잠시 후, 코델리아 일행은 프레드릭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을 떠났다. 기드온 경은 캠든 성의 경비를 강화하겠다며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록사나는 아이린과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에게 빨리 전할 필요가 있었다.
예정에 없었던 손님들을 갑작스럽게 맞이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해 질 녘이었다.
오후에 예정되었던 아이들의 수업 참관은 자연스럽게 다음 날로 미루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캠든 성의 기사단 연무장에 많은 사람들이 자리했다.
자리 이탈이 불가피한 자들을 제외하고 정규 고용인, 기사와 병사, 수습 기간 중인 지원자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영주님께서 무슨 일이시지?”
“그러니까요.”
“짐작 가는 거 없어요?”
“글쎄요……. 그나저나 성에 사람이 많이 늘었네요!”
“맞아요. 좋긴 한데 사람이 늘면 문제도 느는 법이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초조하게 영주의 등장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아이린을 대동한 록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 바닥처럼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뚝 멎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보이는 단상 위로 록사나가 올라섰다. 시선이 단숨에 그녀에게 쏠렸다.
‘사람들이 제법 많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에 상주 인원이 5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거의 세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캠든의 영주인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그녀와 가깝게 동고동락한 정규 고용인들과 기사단 인원 몇 명이 화답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건 당부할 말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보면 규율이자 규칙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잠시 말을 멈춘 록사나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첫째, 폭력과 텃세를 금합니다. 둘째, 영지민과 영지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마세요. 앞의 두 가지 사항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거예요.”
사람들이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지막 세 번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금합니다. 주방에서 남자가 요리를 할 수 있듯 재능이 있고 실력이 있다면 여자도 기사단에서 검을 들 자격이 있습니다.”
록사나의 말에 기사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주로 수군대는 모습들이 포착되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록사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캠든 영지가 부유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길 바라나요?”
“네!”
“잘사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록사나의 질문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캠든이 부유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재능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요.”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행동을 취했다.
“잘사는 영지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은 각 분야에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발굴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영주님 생각과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영주님.”
쭈뼛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기사단의 헨리와 마르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힘을 실어 주고자 하는 그 모습에 록사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다음은 각자에게 맞는 일을 맡기고, 그들의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지요. 그 기회를 주는 게 영주인 나의 역할이고, 여러분은 노력해서 그 기회를 잡으세요.”
잠시 말을 멈춘 록사나가 좌중을 아울렀다.
“이 시간부로 캠든에서는 성별과 인맥, 부유함이 아닌 오직 인성과 실력만으로 업무를 평가합니다.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을 나누는 게 아니라요.”
진중한 록사나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널리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