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무래도 이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필립이 저를 찾아온 것 같군요.”
“맞습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이 뒤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잭이 자신들의 진짜 사정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귀 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듣는 록사나 일행의 얼굴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끝에 다다를 때쯤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잭이 말하는 내용들은 그들이 파헤치고자 하는 일들과 깊은 관련성이 있었다.
새로운 실마리를 얻게 된 록사나는 이들과의 만남이 예정된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잭이 코델리아를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그는 게일 백작령의 작은 상단인 올랜도에서 중간 관리직 일을 하고 있었다.
게일 백작령은 수도 케일라와 카일라니 공작가 영지인 레드포드의 중간쯤 위치해 있었고, 올랜도 상단은 주변 영지와 수도, 북부를 오가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주변 영지 중에는 동쪽의 로웰 후작령도 포함되었다. 잭은 그곳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게일 백작가로 넘어가는 경계 지역 쪽에 평소보다 세 배는 됨직한 로웰 후작가의 사병들이 쫙 깔려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니 도망친 죄인들을 잡기 위해서라고 했다.
강화된 검문에 후작령을 빠져나가는 마차와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고, 올랜도 상단 일행이 성문을 통과했을 때는 해가 지는 저녁 시간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게일 백작령을 향해 두어 시간쯤 나아가다가 야외에서 하룻밤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추운 2월이었다. 일행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요리 준비를 하고, 밤이슬을 피할 천막을 치고, 말들을 돌보고, 짐을 지켰다.
잭은 땔감을 줍기 위해 근처 숲을 몇 번씩 오갔다. 음식을 만들고, 밤새 일행의 추위를 녹여 줄 땔감은 생각보다 많이 필요했다.
나무는 각 영지의 자산이었기에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벨 수가 없었다. 몰래 베어 낸다고 해도 마른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불이 잘 붙지를 않는다.
땔감으로 쓰기에는 잔가지나 죽은 나무가 제격이었다. 하지만 로웰 후작령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숲의 초입에서는 땔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잭은 더 많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점점 깊은 숲으로 향했다.
이십 대 청년인 잭에게도 어두운 숲은 으스스하게 느껴졌지만 달빛이 밝은 밤이라 한결 수월하게 나뭇가지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가 막 발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의 눈에 땅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잭의 몸이 순간 바짝 굳어졌다.
채 굳지 않은 혈의 향이 공기 중에 비릿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피의 주인을 확인할 생각을 버린 채 빨리 숲을 벗어나야겠다고 여겼다. 피 냄새를 맡은 산짐승들이 몰려오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바스락, 바스락!
급하게 움직이는 잭의 발밑에서 밟히는 낙엽 소리가 숲을 울렸다.
그때였다.
“흑. 흐윽.”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숲속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라니!
잭은 홀린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환청이었나. 다 큰 성인이 아이나 가질 법한 무서움을 느끼다니.’
그는 자조하며 발길을 다시 옮겼다.
“흐윽, 흑흑.”
“으앙, 앙.”
우뚝.
잭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그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기 울음?!’
당장 숲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환청이 아니라는 듯 어린아이와 아기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잭이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울음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해서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쪽인가?’
억지로 무거운 발을 떼며 나아가던 그의 눈에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흑. 리아, 여기서… 잠들면 안 돼. 흐흑.”
“으아앙.”
잭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달빛 아래, 자그마한 인영이 주저앉아 누군가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바위에 기대앉은 그 누군가의 품에서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스락!
“헉!”
놀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순간 잭의 발아래 나뭇가지가 부러졌고, 작은 인영의 몸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인영은 갑자기 나타난 잭을 잔뜩 경계했다.
“꼬마야, 놀라지 마. 해치려는 게 아니야.”
잭이 몸을 낮추며 안고 있던 땔감을 땅에 내려놓았다. 진한 혈 향이 그에게 확 끼쳐 왔다.
“너 어딜 다친 거니? 아니면…….”
그가 다가가려 하자, 작은 아이가 주변의 나뭇가지를 후다닥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일행을 보호하려는 듯 작은 몸으로 앞을 막아섰다.
“난 너희를 해치려는 게 절대 아냐. 일행이 다친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게.”
잭이 한결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필요 없어!”
예닐곱으로 보이는 아이가 앙칼지게 응수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절실히 요청하기 마련인데 이상했다.
하지만 잭은 그걸 따지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쳐올 문제들을 꺼냈다.
“저 사람이 다친 거지?”
바위에 기댄 사람을 가리켰다. 아기를 안고 있고, 몸집이 작은 것이 여자 같았다.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은데. 지금 치료를 하지 않으면 죽을 거야.”
“…아냐, 안 죽어!”
나뭇가지를 몽둥이처럼 쥔 아이의 팔이 바들거렸다.
“죽지 않는다고 해도 피 냄새를 맡은 산짐승들이 몰려오면 정말 위험해!”
잭의 말에 아이의 몸이 바짝 굳었다.
“내가 우선 이 근처에 흘린 피 냄새를 지우고 올 테니까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렴. 저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는 네 손에 달렸어.”
잭은 아이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가 돌아서자마자 아이가 나뭇가지를 치켜들며 덮치려고 할 때였다.
차가운 손이 말없이 아이를 붙들었다. 아이가 상대를 돌아보았다.
“안 돼, 리아. 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가는 건지도 몰라.”
아이의 말에 여인이 감기려는 눈을 겨우 뜨고 멀어지는 잭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달빛에 의지해 땅에 떨어진 핏자국을 확인하며 흙을 덮어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피 냄새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인지 주변의 낙엽을 끌어다가 그 위를 또 한 번 덮었다.
여인의 시선이 다시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눈꺼풀을 내렸다가 힘겹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여인이 눈을 재차 깜박이자 아이의 팔에서 힘이 빠지며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렸다.
그사이 잭은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얼추 이 주변에 핏자국을 지우긴 했는데 결정은 했니, 꼬마야?”
“허,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아이가 다시 어른 손가락보다 얇은 나뭇가지를 치켜들었다.
“으아앙!”
여인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울음을 크게 터뜨렸다.
이에 아이가 무척 당황했다. 그리고 여인은 다독여 줄 힘조차 없는지 그저 아이를 겨우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래. 내가 허튼짓을 하거든 그걸로 날 얼마든지 때리렴.”
점점 의식을 잃어 가는 것 같은 여인의 기색에 오히려 잭이 더 초조해졌다.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주춤거리던 아이가 결국에는 길을 터 주었다.
“잠시 상처를 살필 테니 놀라지 마세요.”
잭의 말에 천으로 얼굴을 칭칭 감고 있는 여인이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여인의 상처를 살핀 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천으로 어설프게 동여맨 허벅지에서 피가 계속 배어 나왔고, 다른 한쪽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달빛 아래 겉으로 드러난 손과 팔목은 무척 창백해 보였다.
그는 여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아기를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잘 안고 있을 수 있지?”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기를 받아 안았다.
잭이 자신의 털 망토를 벗어 여인에게 둘러 주었다.
그러곤 품 안을 뒤적여 작은 통을 꺼냈다. 잦은 상행위에 발생하는 경미한 부상들을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평상시에 그가 들고 다니는 비상약들이었다.
“상처 연고약인데 효과가 좋습니다.”
허벅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잭은 자신의 겉옷 상의를 들춰 셔츠 자락을 길게 찢어 냈다.
그 천 조각을 이어 여인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동여매었다. 다음에는 주변의 반듯한 나무를 덧대어 발목을 고정했다.
무척 아플 텐데도 여인은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이어서 아기와 작은 아이의 상처를 살폈다. 아기는 지친 듯해 보이는 것 말고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아이는 긁힌 잔상처가 많았다.
아이에게도 연고를 발라 주고 싶었지만 이미 여인의 상처 치료에 모두 다 사용한 상태였다.
“큰 상처들을 우선 조치하기는 했는데, 의원에게 빨리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날도 너무 추우니 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모실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수통을 꺼내 든 잭이 여인에게 물을 먹여 주며 말했다.
물을 다 넘긴 여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럴 수가 없어요.”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잭은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이들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왠지 모르게 본인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잠시 기운을 차린 여인이 머리에 두른 천을 풀기 시작했다.
여인의 얼굴이 점점 드러나자, 잭의 두 볼이 붉게 물들어 가며 표정이 멍해졌다.
달빛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마치 달의 여신 같았다.
그러다가 여인의 귀를 보게 된 그가 숨을 훅 들이켰다. 너무 놀라 입이 얼어붙었다. 하얗게 내뿜는 입김만이 그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저는, 인어족이에요…….”
여인이 모든 걸 포기한 건지 아니면 그를 믿는 건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웰 후작가의 사병들이 찾는 이들이 자신들이지만 결코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시작으로 세상이 깜짝 놀랄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름은 코델리아, 작은 아이는 수인족 소년 키얀, 아기는 조인족 키아였다.
그들이 로웰 후작가에 쫓기는 이유는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있는 비밀 장소에서 탈출했기 때문이다.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로웰 후작령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숲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다고 했다.
코델리아의 얘기가 모두 끝나자, 잭은 숲 근처에서 발견한 작은 토굴에 그들을 숨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우선 돌아갔다.
상단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잭의 입장에서는 코델리아 일행을 먼 곳까지 데려다주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잭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