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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54)화 (54/214)

54화 

정령의 힘을 사용할 때 느끼는 얕은 정령의 기운과 직접 옆에서 느끼는 정령의 기운은 확연히 달랐다. 정령의 기운이 샘물이라면 정령이 품고 있는 기운은 바다였다.

그리고 정령은 정령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존재이다.

‘아직 아기 정령이라 할지라도 정령계를 드나들 수 있으니 샤일리에 대한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벨루카를 만난 것처럼 샤일리도 곧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록사나가 헐레벌떡 뛰어 자신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당장에라도 문을 거칠게 열어젖힐 것 같았던 그녀는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섰다. 응접실을 지나 당도한 침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바구니를 향해 록사나가 다가갔다.

그녀가 캠든 성에 복귀한 후 깨어난 첫날, 벨루카의 침대를 작은 상자에서 조금 더 큰 바구니로 바꾸어 놓았었다.

바구니에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쿠션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아기 늑대 벨루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확연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어, 벨루카?”

록사나가 두 눈을 비비고는 다시 눈을 떴다. 잠든 벨루카를 다시 바라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벨루카의 몸은 아침에 본 것보다 쑥 자라 있었다.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녀의 손수건을 치우고 보니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전에는 그녀의 손바닥 반만 한 크기였는데 지금은 한 손에 거의 들어찰 만큼 아기 늑대의 몸이 자라 있었다.

‘두 배 좀 못 되게 자랐네!’

벨루카의 성장을 직접 보지 못한 건 무척 아쉬웠지만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록사나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그녀가 아기 정령의 은빛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반복되는 손길에도 아기 정령은 몸 한 번 움찔거리지 않았다.

“잘했어, 벨루카.”

어떤 이유로 갑작스럽게 성장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성장한다는 것은 좋은 신호였다.

젖혀 두었던 수건을 끌어다가 은빛 몸 위에 다시 덮어 주었다.

‘이 손수건을 이불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될 날이 곧 다가오길 기다릴게……. 어서 빨리 깨어나렴.’

* * *

다음 날 오전, 록사나는 프레드릭과 아이린을 대동하고 성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수습 고용인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록사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며 발길을 멈추고 지금 배정받은 업무나 그들의 특기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이 금방 다가왔다.

그녀는 기사단까지 얼추 둘러본 후 식당에서 프레드릭, 기드온 경, 아이린과 함께 늦은 점심 식사를 들었다.

신메뉴라며 콩 수프가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콩 수프를 맛본 록사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소하고 맛있었다.

다들 입맛에 맞는지 모두 한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 냈다.

“기드온 경, 기사단에 지원한 사람들 병사나 기사 후보로 채용하기에 어때요?”

“나가떨어진 몇 명을 제외하고 남은 인원들은 잘만 훈련시키면 병사로서 자리 잡기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용인 모집에 지원했던 사람들 중 40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기사단에서 일하길 원했었다.

그들을 기드온 경이 5일 전부터 직접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사이 몇 명이 나가떨어졌다. 훈련 강도가 워낙 높았던 것이다.

기사단을 포기한 그 사람들은 성내의 다른 업무로 재배정되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런데 기사단에 남은 사람들 중 아직 성인이 안 된 아이들도 있던데 그들의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성년이 안 된 아이들은 무조건 글공부에 의무적으로 참여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 중 몇 명이 기사단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기드온 경의 허락하에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물론 수업 외적인 시간에 한해서였다.

“낮에는 공부해야 하니까, 아침에 한 시간, 저녁 식사 전에 두 시간 정도씩 체력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나이나 체력에 따라서 차등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기드온 경의 대답에 록사나가 생각에 잠겼다.

“기사가 되고 싶다는데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공부하는 데도 체력이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심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기드온 경은 혹시나 록사나가 안 된다고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맞아요. 잘하셨어요.”

긍정적인 답변에 기드온 경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영주님.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가브리엘라와 지노 남매는 재능이 있습니다.”

“남매요?”

가브리엘라는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다.

록사나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프레드릭과 아이린도 관심을 가지고 기드온 경을 쳐다보았다.

“네. 가브리엘라는 열여섯 살이고, 지노는 열 살입니다. 아직 목검을 들기 시작한 건 아니지만 둘 다 몸놀림이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록사나는 지원자의 서류에서 보았던 내용들을 떠올렸다.

남매에게는 둘 말고도 밑으로 형제가 네 명이나 더 있었다. 사냥꾼이자 약초꾼이었던 아버지가 몸을 다치신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돈을 벌기 위해 지원했다고 적혀 있었다.

“여자아이라고 기사단 내에서 차별은 없나요?”

아무래도 여자에게 상당히 보수적인 사회이다 보니 걱정이 앞섰다. 특히 기사단은 더했다.

“물론 불만 있는 놈들도 있습니다. 우선은 체력 훈련뿐이고 아이이니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입니다만…….”

기드온 경이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도 이 점이 불만이었다. 속 좁은 사내들은 여자가 남자의 권위에 덤벼든다고 생각했다.

재능이 있고 실력이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그게 뭐 대수인가 싶은데 말이다.

실제로 그는 용병 일을 하며 아내를 만났었다. 전직 용병 출신인 그의 아내 로사는 힘으로는 그에게 한참 밀리지만 검 다루는 솜씨는 지금도 그보다 더 뛰어났다.

어쨌든 기사단장이라는 그의 권위로 찍어 눌러 불만을 잠재우긴 했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기드온 경이 생략한 뒷말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모를 수가 없었다.

“여자가 검을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여자들이 해 주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어요.”

“동감이네, 아이린.”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아이린이 말하자, 프레드릭이 맞장구를 쳤다.

록사나도 여러 가지 생각과 계획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영지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드온 경, 프레드릭. 내일 아침에 성내 사람들을 모두 기사단 연무장으로 불러 모아 주세요.”

앞으로 해 나갈 일들에 대해 각오를 다지며 마음을 굳힌 록사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드온 경과 프레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내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걸 짐작했다.

왜 하필 기사단 연무장으로 모이라고 하는 건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이린이 물었다.

“그런데, 영주님. 기사단 연무장보다는 본성이 낫지 않을까요?”

아이린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록사나를 영주님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영지를 지키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단다. 병사나 기사들이 그들의 임무에 온전히 충실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식사를 준비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야. 그리고 그들의 월급은 영지에 세를 내는 영지민들에게서 나오지.”

록사나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빛과 표정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겉으로는 기사단이 영지를 지키는 것이지만 결국엔 모든 영지민들이 영지를 지키는 것과 다름없어. 그런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들은 캠든 영지에 머무를 자격이 없어.”

록사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혔다.

기사단 연무장에 사람들을 모이게 한 건 가장 편견이 심하게 드러나는 장소에서 상징적인 일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

영주인 록사나의 뜻을 잘 이해하게 된 세 사람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기드온 경의 눈은 물기에 살짝 젖어 들며 더욱 반짝거렸다. 그의 다섯 살 난 딸 로즈마리 때문이었다.

로즈마리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줄 아는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 딸아이의 꿈은 아빠처럼 기사가 되는 것이다.

리온 제국에는 귀족가의 부인이나 영애들을 호위하는 여기사들이 아주 극소수 존재하긴 했지만 기사단의 정식 기사로 서임받은 여기사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기드온 경은 캠든 영지에 자리 잡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의 딸 로즈마리가 기사가 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원한다면 정식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무척 기쁘고 행복하게 했다.

기드온 경의 하얀 건치가 다 드러나며 입이 귀에 걸렸다.

록사나가 기드온 경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의 말이 파격적인 건 알겠지만 그를 울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그의 눈에 맺힌 눈물 비슷한 것을 모른 척해 주었다.

대신 살짝 화제를 돌렸다.

“저런, 맛있는 스테이크가 다 식겠어요. 어서들 들어요.”

“네, 영주님!”

우렁찬 기드온 경의 목소리가 식당에 울렸다.

메인 식사가 끝나고 후식이 나올 때쯤 록사나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기드온 경, 경의 부인을 한번 만나고 싶은데 얘길 대신 전해 주시겠어요? 시간은 아무 때나 괜찮으니 시마리오 부인이 편하실 때 방문해 주면 좋을 거 같아요.”

“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경의 부인을 한 번쯤 만나 보고 싶기도 하고,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부탁이요?”

기드온 경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부인 로사에게 영주님이 부탁할 일이라는 게 뭘까?

“그 밖의 자세한 얘기는 시마리오 부인과 만난 후에 하도록 할게요.”

기드온 경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영주님, 오후에는 아이들 공부방에 가 보실 예정이십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프레드릭이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네, 그냥 몰래 가서 잠시 보고 오려고요. 그러니까 일부러 알리지는 마세요.”

“알겠습니다.”

록사나의 의중을 파악한 프레드릭의 얼굴에 인자한 할아버지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나저나 추가적으로 성내 업무를 담당할 인력들 채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앞으로 영지 재정비 사업을 벌이게 되면 성내 업무가 폭주할 것이다. 록사나 자신과 아이린, 프레드릭만으로는 진행이 어려웠다.

그에 대비해 관리 인력을 추가적으로 선발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업무는 전적으로 프레드릭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다섯 명 정도 추린 상태입니다.”

프레드릭은 그들이 장부나 서류 보는 일을 거의 해 보지 못해서 이런 부분에 대해 교육 중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때였다. 다급한 노크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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