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록사나는 지원자들의 면접을 직접 진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상치 않게 영지 시찰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예정된 날짜에 지원자들의 면접을 진행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록사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한 달 동안 유급으로 수습 기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고용인 숙소의 빈방을 함께 내주었다. 그러고도 빈방이 여전히 많았다.
캠든 성은 낡은 곳이 많았지만 백작가를 넘어설 만큼 규모가 굉장히 컸다.
“다들 건강 상태는 어때요?”
“대체로 양호한 편이지만, 고령자와 어린아이들은 아무래도 체력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아, 젊은 사람 중에도 좀 지병이 있는 사람들도 몇 있습니다.”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의 치료는 잘하고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영주님. 사람들이 많다 보니 캠든 시내 의원 한 명을 성내에 상주시킨 상태입니다.”
“잘하셨어요.”
연륜이 깊은 프레드릭은 영주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일 처리를 잘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여섯 살짜리도 있네요!”
아이들의 나이를 확인하던 록사나가 깜짝 놀랐다.
“네. 진짜 지원했더군요.”
“이 라일라라는 아이, 캠든까지 어떻게 왔대요?”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노스에서 캠든까지 오기에는 멀고 위험한 거리였다.
“같은 마을에서 지원한 앤과 함께 왔습니다.”
프레드릭의 말에 록사나가 앤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았다. 앤은 열여섯 소녀였다.
“앤 말로는 라일라 어머니가 재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아버지 쪽은 초혼이라 그쪽 집안에서 라일라를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프레드릭이 사정 이야기를 꺼내자 록사나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앤이 그런 라일라의 사정을 딱하게 여겼는지 같이 지원해 보지 않겠냐고 해서 오게 되었답니다.”
“그렇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요?”
“지원자 중에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을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패트릭이고, 그가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프레드릭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록사나가 눈짓으로 재촉했다.
“요 녀석들이 처음에는 글공부가 아니라 일을 달라고 떼를 자꾸 쓰지 뭡니까. 글을 못 떼면 일자리를 줄 수 없다고 하니 다들 열심이지 뭡니까, 허허허.”
프레드릭이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의 눈빛은 록사나를 마치 대견한 손녀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노집사의 칭찬 어린 시선이 기분 좋으면서도 쑥스러워진 록사나가 시선을 슬쩍 돌렸다.
아이들이 지원하면 일 말고 무조건 글공부를 시키라는 록사나의 지시가 사전에 있었다.
그래서 수습 기간 동안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글을 배우며 먹고 노는 게 전부였다.
함께 지원했던 어른들 중 일부가 이를 안 좋게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주님의 지시라고 하니 다들 입을 다물었다.
록사나가 서류상에 기재된 지원자들의 특기를 쭈욱 훑어보았다. 남자들은 대부분이 농부 출신이었고, 목수나 약초꾼 등도 있었다.
전에 하던 일에 맞춰 업무가 배정되기도 했지만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게 자리가 주어졌다.
특히 봉급이 높은 기사단 쪽 일을 보조하는 일에 다수가 지원했다.
“목수 출신이 두 명이나 있네요. 이 사람들은 성의 손볼 곳들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나요?”
“예, 맞습니다. 솜씨가 나쁘지 않더군요.”
목수를 보자, 웨스트 빈민촌 복구와 영지 재정비 계획이 록사나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문라이트 상단에서의 연락은요?”
“도착했습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프레드릭이 서신을 내밀었다. 2주일 전에 도착한 서신이었다.
캠든 성에 복귀한 록사나는 부상을 당해 휴식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프레드릭은 일부러 전달을 미루고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록사나가 편히 서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프레드릭이 자리를 피했다.
그가 집무실을 나서자, 록사나가 바로 서신을 펼쳐 읽었다.
문라이트 상단주의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그녀가 부탁했던 일들에 대한 상황과 결과들이 담겨 있었다.
끝까지 다 읽은 록사나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문라이트 상단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답변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우리 영지 사정을 잘 아는 건축과 토목 기술자들을 영지 내에서 먼저 뽑고, 더 필요한 기술자는 문라이트 상단을 통해 확보하면 되겠어.’
록사나가 종이와 깃펜을 꺼내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문라이트 상단에 보내는 것이었다.
한참을 적어 내려가고 나니 무려 다섯 장이나 되었다.
봉투에 동봉하고 나서 프레드릭을 다시 호출했다.
“이 편지는 다시 문라이트 상단에 보내 주시고, 우리 영지 내에 있는 목수와 토목 기술자들을 모아 주세요.”
프레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공사를 시작하려면 겨울이 지나야 할 테니 봄이 오기 전까지 처리하면 될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나가시면 나디아를 제 집무실로 보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프레드릭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나디아가 록사나의 집무실을 찾았다.
“나디아, 어서 와요.”
“영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록사나가 반갑게 맞아 주자, 못 본 사이 혈색이 좋아진 나디아가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성에서 지내기 어때요?”
“너무 좋아요. 니아 님께 다양한 요리법을 전수받고 있어요. 리나도 캠든 성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해요.”
“그거 다행이네요. 참, 리나도 글공부를 하고 있다면서요?.”
병상에 있을 때 아이린에게 전해 들었던 소식이었다.
“네, 제법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또래 친구도 생겨서 제가 일할 때는 그 친구들하고 놀아요.”
나디아의 얼굴에는 한결 생기가 넘쳤다.
“나디아도 리나도 잘 적응하며 생활하고 있는 거 같아 내 마음이 다 놓이네요.”
“이게 다 영주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런 말은 앞으로 넣어 둬요. 내가 그만큼 나디아를 엄청 부려 먹을 거예요.”
제법 사악한 고용주의 표정을 지어 보인 록사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얼마든지요.”
나디아는 그런 록사나를 보며 영주님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니아에게 들었어요. 두부 만드는 시험을 하고 있다고요.”
“네! 캠든 영지에서 난 콩들로 시도해 보고 있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영주님이 만드셨다는 두부를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요.”
록사나가 영지 시찰을 떠난 사이, 주방장 니아는 캠든 영지에서 수확한 콩들을 사들였다.
그 콩들로 순두부 만들기를 시도할 때쯤, 록사나가 보낸 나디아 모녀가 도착했다.
니아는 주방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나디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요리들을 가르치며 순두부 만들기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순두부는 잘 만들어져요?”
진행 상황을 니아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처음에는 잘 안 만들어지더라고요. 영주님께서 사용하셨다는 콩과 비교해 봤는데, 콩이 달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눈빛을 반짝이며 나디아가 말을 계속했다.
“많이 실패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니아 님과 이런저런 방법으로 시도해 봤어요. 그래서 며칠 전에는 조금 다르지만 순두부를 만들 수 있었어요.”
“와, 정말요? 대단해요, 나디아. 다른 콩으로 만든 순두부 맛이 어떨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걸로 두부도 만들어 맛봤는데 제법 고소하고 맛있었어요. 그때 만든 건 양도 적고 시범으로 만든 거라 영주님께 올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나디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나디아. 나디아랑 주방장 니아가 괜찮겠다 싶을 때 맛보여 줘도 돼요. 그때를 기대할게요.”
“네, 영주님. 조만간 꼭 맛보여 드릴게요.”
록사나에게 새로운 두부 소식을 전한 나디아가 떠나고 아이린이 차를 내왔다.
“있지, 아이린. 나디아랑 니아가 다른 콩으로 순두부랑 두부 만드는 걸 성공했대!”
“네. 저도 그때 두부 몇 점 먹어 봤는데 제법 맛이 좋더라고요. 질감은 록시 님이 만들었던 것보다 조금 거칠었지만, 고소했어요.”
“뭐? 너는 먹어 보기까지 했었단 말이야? 며칠 전에 성공했다고 하던데 왜 그때 나한테 말 안 했어?”
록사나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린이 슬그머니 록사나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아니요. 제가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요. 니아 님이 좀 더 완벽한 요리로 영주님께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사실이기도 했지만 핑계이기도 했기에 아이린이 록사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이린은 록사나가 이 소식을 며칠 전에 들었다면 당장 주방으로 뛰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록사나에게는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새 두부 소식을 전했다면 두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밀린 업무에까지 손을 뻗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업무에 복귀한 록사나를 보며 아이린은 그때 얘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업무에 복귀한 첫날부터 록사나는 집무실에서 식사를 해결하며 늦은 저녁까지 서류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자. 너는 언제나 내 편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아이린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록사나의 원망을 단숨에 무너뜨릴 얘기였다.
“록시 님, 집무실에 오기 전에 아까 영주님 침실에 잠깐 들러 벨루카 님을 뵙고 왔는데요…….”
축 처져 있던 록사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녀의 눈이 한층 반짝거렸다.
바쁜 록사나를 대신해 아이린이 벨루카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아이린이 정령을 화제에 올렸다는 건 뭔가 새로운 일이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뭔데? 빨리 말해 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록사나가 아이린을 재촉했다.
“그게, 제가 착각하거나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면요……. 잠깐 동안이었지만 벨루카 님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났었어요. 아주 진하게요.”
“뭐?! 그 얘길 왜 이제 해!”
록사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린이 속으로 억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바로 와서 얘기한 건데요. 록시 님이 두부 얘기를 먼저 꺼내시는 바람에 전달이 좀 늦어졌지만요…….’
내내 잠만 자던 벨루카에게 변화가 생겼다니 어쩜 곧 깨어나려는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아기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정령을 만나게 된 것은 12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