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두 번째로 아스테리온이 마주한 육망성은 두 사람이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전 황태자 네이든이 사망한 지 5년이 흘렀을 때이기도 했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애초에 자신과 카일라니 공작가에 타격을 줄 계획이었다면 길게 시간을 끌 필요 없이 네이든이 죽은 후에 바로 공격하는 게 그들에겐 더 유리했을 것이다.
“록사나, 당신이 정령의 힘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터야?”
아스테리온이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살 생일이 지나면서부터요.”
잠시 고민하던 록사나가 사실대로 말했다.
현 황태자 도노반과 그의 세력들을 견제하고, 육망성의 비밀을 파헤치려면 카일라니 공작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가 정령사라는 걸 밝혀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한참 어린 나이부터 정령의 힘을 각성했다니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고서나 전설 어디에서도 십 대 이전에 정령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열세 살 때 사고를 당한 후 힘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어요.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고요.”
“사고라면 당신 부모님…….”
록사나에게 아픈 기억임을 알기에 아스테리온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 앞에서 직접 이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맞아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어요. 샤가 지켜 주지 않았다면 저도 죽었겠죠.”
순간 아스테리온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때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 그의 귀에 거슬렸다.
“샤?”
“샤일리는 정령이에요.”
정령이라는 말에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애칭으로 부를 만큼 친근한 존재였다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에 불길이 일었다.
예전이라면 바로 알아챘을 그의 변화를 록사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온전한 힘을 되찾은 건 아니지만, 웨스트에서 정령의 힘을 어느 정도 다시 쓸 수 있었어요.”
한번 큰 힘을 사용하면 다시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도 밝혔다.
록사나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에게 보여 줬다.
“지금도 정령의 힘을 사용하기 힘들어요.”
그녀의 손안에 콩알보다 작은 하얀 빛이 겨우 모였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손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깡마른 손이 조금만 쥐어도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난 부모님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내 아스테리온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모르지만 아벨리오 남작 부부의 사고를 따로 조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특이 사항이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당신 추측이 맞을지도 몰라.”
너무나 완벽하게 깔끔한 사고라 아스테리온도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조사를 해 봐야겠어.’
두 사람은 그 뒤로 파파베르 사건 처리에 대해서 논의했다. 아스테리온은 그녀가 이 사건에서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고, 록사나도 이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수도 케일라까지 상인들을 호송하고, 재판의 진행 등 모든 처리는 아스테리온이 전담하기로 했다.
아직 자신이 나서기에는 도노반 황태자에게 맞설 힘이 미약하다는 걸 록사나는 잘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기도 했다.
또한 한동안은 영지를 재정비하는 일로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온전하게 되찾는 방법과 육망성과 관련된 일들은 정보가 모이는 대로 차차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서신보다는 서로 직접 왕래를 하는 게 일 처리하기 좋겠어.”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표정을 은근슬쩍 살피며 운을 떼었다. 멀리서 걱정으로 애끓는 것보다 그의 심장이 갈가리 찢기더라도 눈으로 직접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레드포드 성하고 거리도 너무 멀고요.”
“당신은 영지 관리하느라 많이 바쁘니까 내가 올게.”
록사나가 말끝을 흐리자, 아스테리온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바쁜 걸로 치면 그녀보다 아스테리온이 더 바쁜 사람이라는 걸 록사나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록사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한 아스테리온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록사나가 입을 떼었다.
“그래요.”
허락이었다.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은 아스테리온이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정기적으로 캠든 성을 방문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 * *
록사나가 따스한 눈빛으로 작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 늑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진짜 정령이야.’
열세 살 때 이후로 11년 만에 보게 된 정령이었다. 너무 소중하고 반가운 마음에 당장에라도 정령을 깨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샤일리가 아기 정령을 보여 준 적이 있었는데, 정령력이 부족할수록 잠자는 시간도 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고, 어쩌지?”
“록시 님이 아기 정령님 이름을 지어 주시는 건 어때요?”
옆에서 록사나의 시중을 들던 아이린도 정령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몇십 번을 봐도 경이로웠다.
“아기 정령의 이름은 정령왕이 지어 주는 게 전통이야. 그래야 아기 정령이 정령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거든.”
“하지만 언제 정령왕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요. 그러니까 정령사인 록시 님이 지어 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나름 타당한 아이린의 말에 록사나가 고민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정령왕으로부터 아기 정령이 이름을 받았을 때, 자신에게 먼저 받은 이름 때문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지금 상태에서도 이름이 있으나 없으나 힘을 사용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록사나가 이내 마음을 굳혔다.
“그럴까?!”
“그럼요. 어떤 이름으로 하실 거예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아이린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록사나를 재촉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떠드는데도 아기 늑대는 쿨쿨 잘만 자며 깨어날 기미가 전혀 없었다.
“음…….”
록사나가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자, 아이린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름들을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털이 은빛이니까, 실버 어때요? 아니면 울프나 아돌프. 아, 황금빛에 휩싸여 깨어났다고 했으니 태양을 뜻하는 헬리오도 좋은 거 같아요!”
대체로 무난한 이름들이었다.
“좋은 이름들이지만… 미안, 아이린.”
진심으로 미안해진 록사나가 말했다.
“록시 님이 하도 고민하셔서 그냥 제 생각을 말한 거예요.”
자신의 의견이 거부당했음에도 아이린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이 아이한테 더 의미 있고 어울리는 이름을 주고 싶어.’
한참을 더 고민하던 록사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벨루카…….”
“어?!”
아이린이 깜짝 놀라며 정령이 자고 있는 작은 상자를 한 손으로 가리켰다.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두 눈도 크게 뜨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여러 번 깜박거렸다.
아기 늑대 정령의 온몸에서 찬란한 은빛이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벨루카?”
몸을 아기 늑대에게 기울이며 록사나가 혹시나 하고 다시 말해 보았다.
그러자 다시 아기 늑대의 몸에서 화사한 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정령님이 ‘벨루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아이린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은빛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
“진짜 그런가 봐. 마음에 들어 해 줘서 고마워, 벨루카.”
록사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벨루카는 생명력을 뜻하는 아벨에서 벨과 빛을 뜻하는 루카를 합친 이름이야. 벨은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해.”
상기된 얼굴로 록사나가 아기 늑대 정령, 벨루카에게 속삭였다.
“너무 멋진 이름이에요!”
잠잠해진 벨루카 대신 아이린이 격하게 호응을 해 주었다.
“안녕, 벨루카.”
“안녕하세요, 벨루카 님.”
생명의 빛, 아름다운 빛, 벨루카.
어둡고 무서운 붉은빛에 갇혔다가 깨어난 생명력 강한 아름다운 정령.
앞으로 생명을 살리는 아름다운 정령으로 성장하길 바라며 록사나는 자신을 찾아온 아기 늑대 정령을 축복했다.
록사나는 벨루카가 언제 깨어날지 몰랐지만, 자신의 방에 두고 직접 보살피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첫 만남을 학수고대하며.
* * *
영주의 부상으로 캠든 성의 신년은 별도의 파티나 행사 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대신 록사나는 카일라니 기사단이 성내에 머물면서 고생하고 있는 성의 고용인들에게 큰 액수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영지민들이 희망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식량과 땔감 등 겨울 관련 물품들을 넉넉하게 영지에 풀었다.
이 일은 영지 시찰을 떠나기 전에 이미 프레드릭과 논의해 준비했었다.
그렇기에 병상에 그녀가 누워 있어도 한 해가 넘어가기 전에 차질 없이 일이 마무리되었다.
록사나가 깨어나고 사흘 뒤, 아스테리온은 죄인들을 호송해 수도 케일라로 떠났다.
캠든 성의 기사들은 카일라니 기사들이 떠나는 걸 시원섭섭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 함께 대련을 했었는데 지옥의 훈련을 방불케 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캠든 기사들과 병사들은 한층 성장했다.
영주가 겪은 납치로 인해 열의를 불태운 그들의 마음가짐도 한몫한 결과이기도 했다.
카일라니 기사들로 북적이던 캠든 성에 평소와 같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 * *
록사나는 일주일도 안 되어 침대를 벗어났다.
아이린이 더 쉬어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지만, 다쳤던 다리도 어느 정도 나아 거동이 가능했기에 업무들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등의 멍은 애슐리가 준 연고를 꾸준히 발랐더니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멍 자국이 완전히 없어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다.
“여기 지원자 명단입니다.”
프레드릭이 록사나에게 지원자 명단을 포함한 서류를 건넸다.
“지원자가 정말 많네요.”
받아 든 서류를 살피며 록사나가 말했다. 1차 지원자만 어른이 96명, 아이들도 30명이나 되었다.
“네, 성에서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지 다들 열심히 합니다.”
프레드릭은 영지 시찰 중이던 록사나에게서 서신을 받았었다.
그 안에는 화재가 난 웨스트 빈민촌에 대한 물자 지원 등 다양한 지시가 있었는데, 새 고용인 선발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