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 저는 어서 가서 의원이랑 정령님을 모셔 올게요. 후딱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잊고 있던 일을 상기하며, 아이린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록사나에게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이내 방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노집사 프레드릭, 주방장 니아, 기드온 경, 의원 캘빈과 약사 애슐리, 그리고 록사나의 전 남편 아스테리온까지 들어와 넓은 방이 꽉 찼다.
여러 사람이 자신을 둘러싸자, 록사나는 낯섦과 불편함을 함께 느꼈다. 그렇다고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기도 좀 그랬다.
아기 늑대 정령을 데려온 아이린이 가장 뒤늦게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뒤에서 켈빈의 진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별다른 이상은 없으십니다.”
켈빈이 진찰 결과를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여기저기서 내쉬었다.
캠든에도 뛰어난 의원과 약사가 있었다. 하지만 기드온 경은 록사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켈빈과 애슐리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부부를 카일라니 공작에게 적극 추천했고, 캠든 성으로 함께 데려왔다.
“영주님, 이 약을 쭉 드세요. 멍든 상처 치료에 좋아요.”
진한 녹갈색 빛깔의 액체를 본 록사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지못해 약을 받아 마신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최소한 발목이 다 나을 때까지 당분간 거동을 삼가시는 게 좋습니다, 영주님.”
켈빈이 방 안에 자리한 사람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여러분들은 영주님이 환자라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주의 사항을 덧붙인 켈빈이 애슐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영주님, 많이 시장하시죠? 제가 얼른 속을 편하게 해 줄 맛있는 수프를 준비해 올게요.”
니아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제 방 안에는 록사나를 제외하고 노집사 프레드릭과 기드온 경, 아이린, 아스테리온이 남아 있었다.
기드온 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주님,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기드온 경, 무릎 꿇지 마세요!”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짐작한 록사나가 강경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마세요. 그건 기드온 경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제가 고집을 부렸었고, 그에 대해 저는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요.”
시로난에서 습격당하는 상단을 도운 일을 떠올리며 록사나가 기드온 경의 말을 잘랐다.
“영주님…….”
기드온 경이 감격한 표정으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다들 자리에 좀 앉지 그래요. 제 고개가 너무 아프네요. 아이린, 너도 어서 앉으렴.”
침대에 기대앉은 록사나가 키가 큰 두 장정을 계속해서 올려다보기에는 목이 너무 아팠다.
“아, 죄송합니다.”
기드온 경이 의자 세 개를 침실 밖 응접실에서 끌어와 아스테리온과 프레드릭에게 건넸다. 아이린은 침대 근처 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때 습격당한 상단 사람들은 무사한가요?”
록사나가 아스테리온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기드온 경에게 물었다.
“부상자들이 몇 명 발생했지만, 장애를 가지거나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닙니다. 치료도 잘 이루어지고 있고요.”
불과 3일 전에 벌어졌던 일이었기에 다 나으려면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이만하시길 천만다행입니다. 요새 이 늙은이 심장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내내 잠자코 있던 프레드릭이 나섰다.
노집사는 기드온 경과 함께 그동안의 뒤처리와 영지 관련 일들에 대한 경과를 짤막하게 보고했다.
“두 사람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예, 뭐…….”
은근 격려와 칭찬에 약한 두 사람이 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렸다.
“그나저나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프레드릭의 시선이 아이린이 받쳐 든 작은 나무 상자로 향했다. 그 상자 안에는 폭신한 쿠션 위에서 자고 있는 아기 늑대가 있었다.
록사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아기 늑대에게로 향했다.
“영주님과 떨어진 이후로 내내 잠만 주무십니다.”
기드온 경이 경이로운 존재인 아기 늑대 정령을 높여 말했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정령은 볼 때마다 무척 신기했다.
록사나가 아이린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가 들고 있던 상자를 록사나에게 건넸다.
아기 늑대를 눈으로 꼼꼼히 살펴본 록사나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가 볼 땐 정령의 힘이 부족해서 내내 잠만 자는 것 같아요. 시간이 좀 지나면 깨어날 것 같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제야 기드온 경이 안심이 된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입단속은 단단히 해 두었습니다. 당분간 크게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프레드릭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그의 인생에서 지금까지 가장 놀랄 만한 일이 뭐였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록사나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아기 늑대 정령을 처음 보았을 때였다.
프레드릭의 염려에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누구누구가 자신의 비밀과 정령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앞으로 최대한 정령의 존재를 숨길 거예요.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숨길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잠시 동안 말이 없어졌다.
“흠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환자를 더 붙들고 있는 것은 좋지 않았기에 프레드릭이 몸을 일으켰다.
“저도 가 보겠습니다.”
그 뒤를 기드온 경이 따랐다.
“아이린, 너도 잠시 자리를 비키는 게 좋겠구나.”
몸을 돌리기 전 프레드릭이 아이린을 향해 말했다.
아이린은 록사나와 카일라니 공작 두 사람만이 남게 된 이 상황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부르시면 바로 달려올게요.”
애칭 대신 격식을 갖춰 말한 아이린이 두 사람을 따라 방을 나섰다.
방 안에 침묵이 일순간에 내려앉았다.
두 사람과 한 정령의 숨소리만이 커다란 공간의 어색함을 메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저 아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아스테리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에 대해 록사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혼 후 겨우 한 달이 넘어선 시점에 그를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하물며 그녀를 아끼는 아이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스테리온이 마음에 들지 않을 테니까 아까 같은 반응을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대신 록사나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지금 이 시점에 카일라니 공작님이 왜 캠든 영지에 계시게 되었는지 저로서는 의아하네요.”
자신을 딱딱하게 호칭하는 록사나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니 아스테리온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애써 말을 돌리는 록사나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당신이 잡아들인 상인들을 수도로 호송해 가려고 왔다가 소식을 들었어.”
“정말 그것뿐이에요?”
록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귀가 쫑긋해졌다.
“당신 편지를 받고 조사해 보니 레드포드에서도 파파베르가 퍼지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당신 덕이 커.”
록사나의 녹색 눈이 동그래졌다. 전 남편이 입바른 말도 할 줄 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배후는요?”
“도노반 마르퀴스.”
황태자를 언급하는 아스테리온의 목소리는 어느 촌부의 이름을 말하는 것같이 덤덤했다.
반면에 록사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혹시나 했었는데 사실이었다니.
카일라니 공작과 이혼한 전 부인에게까지 손을 뻗을 만큼, 황태자가 어지간히도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전 남편의 시선이 영지에 쏠리면 본인 뜻대로 정치판을 좌지우지하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아니지. 빅토리아 로웰과 그렇게 대놓고 언쟁을 벌였으니 나도 이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겠네.’
그때 아스테리온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 때문에 당신에게까지 불똥이 튀어서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록사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글쎄요. 사실 빌미를 제공한 건 나니까 당신이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록사나는 재빨리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췄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늘 여러 번이나 아스테리온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록사나는 과연 그가 제가 아는 사람이 맞나 싶었다.
‘머리 다친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변할 수는 없었다.
당당하던 아스테리온 카일라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만이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걱정 어린 눈으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긴장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낯설었다. 늘 차갑고 냉혹하던 사람이 자신을 걱정하고 그녀의 시선을 갈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내 착각일까?’
그러나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록사나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의문과 채 지워지지 않은 감정을 가슴 깊숙이 내리눌렀다. 전 남편을 마주하는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다.
아스테리온은 손에 땀이 찼다. 전에 없이 평온한 록사나의 얼굴 표정을 본 그의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도움받은 일까지 모른 척할 수 없어 록사나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천만에.”
아스테리온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절 납치한 일당 중 한 명을 잡았다면서요?”
“맞아.”
록사나의 질문에 어둠 속을 정처 없이 헤매던 그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자도 도노반 황태자의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아.”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붉은 육망성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하나둘씩 그녀에게 밝혔다.
해안 동굴에서 직접 그녀의 힘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예전처럼 감추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무의미했다.
기드온 경을 통해 웨스트에서 일어난 화재를 록사나가 진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그녀를 너무 약한 존재로만 보아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틀에 가두고 수동적인 존재로 살게 했다.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것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공작님이 육망성을 처음 본 게 전 황태자 네이든의 습격 현장에서였군요.”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록사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사고로 전 황태자 전하께서는 결국 돌아가셨는데,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공작가를 습격했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