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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50)화 (50/214)

50화 

“아기 정령이에요.”

갓 깨어난 아기 정령이 놀랄까 봐, 록사나가 소곤거렸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정령이요?”

반응은 헥터에게서 먼저 튀어나왔다.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선 헥터가 록사나의 손에 들린 아기 늑대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기드온 경과 기사들도 가까이 다가왔다. 다들 처음 보는 정령이 신기하면서도 어리벙벙한 기분이었다.

“와, 나 정령 처음 봐.”

“나도!”

“이 콩알만 한 게 진짜 정령이라고요?”

다소 젊은 기사들이 아이처럼 몸을 들썩였다.

“내 살아생전 정령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더 나이가 많은 기사들이라고 반응이 다르지는 않았다. 인원이 많다 보니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을 중심으로 반원이 그려졌다.

“정령 맞아요.”

록사나가 한 손으로 아기 늑대를 옮겨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은빛 털을 살살 쓰다듬었다. 비단처럼 매끄럽고 보들보들한 감촉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아가야, 이름이 뭐야?”

- 아울?

아기 늑대가 육성으로 되물었다.

육성이 아니어도 그녀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아기 정령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이라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응, 네 이름 말이야.”

은빛 아기 늑대의 눈과 꼬리가 축 처졌다.

- 아우우…….

“이름이 없나 보네…….”

덩달아 록사나의 목소리도 힘을 잃고 줄어들었다.

정령에게 이름은 정령의 힘 그 자체였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령들은 태어나자마자 정령왕에게 축복과 이름을 받는다.

이 아기 늑대 정령은 조금 전까지 구슬 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건 이미 태어난 후에 봉인되었다는 말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받았을 텐데……. 뭔가 이상해. 혹시 이름을 부여받기 전에 붙잡혀 구슬에 갇힌 걸까?’

그러고 보니 언어를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아기 늑대는 울음소리로만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더 깊은 생각에 록사나가 빠져들려고 하는 찰나였다.

“우선 여기를 나가도록 하지.”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품에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는 내내 자신이 전 남편에게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려 줘요.”

갑자기 몰려드는 불편한 마음에 록사나가 몸을 버둥거렸다.

아스테리온이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가. 당신 발로 여길 빠져나가려면 날 새워야 해. 그리고 지금 당신 손에 들린 것도 있잖아.”

록사나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가 곧 다물렸다.

봉인을 깨고 나오느라 힘들었는지 아기 늑대가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내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잠들려는 품새였다.

록사나가 정령을 다른 손으로도 살포시 감쌌다. 그러고는 품에 끌어안듯 두 손을 몸 안쪽 가까이 붙였다.

해안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곳에 왔던 모든 사람들이 아스테리온의 뒤를 따랐다.

척척, 척척!

고도로 훈련받은 기사들의 움직임은 질서정연하기 그지없었다.

온통 정령에게 빼앗겼던 록사나의 신경이 제자리를 차츰 찾아갔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아스테리온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것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아 록사나는 그의 품에서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아스테리온에게 공주님처럼 안겨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혼 전이나 다른 상황에서였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시선을 둘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록사나가 옆으로 눈을 돌렸다. 그 순간 기드온 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록사나의 눈빛을 읽은 기드온 경이 난감하게 아스테리온을 힐끔 쳐다보았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아스테리온이 툭 내뱉었다.

록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결국엔 포기했다. 대신 다른 의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전 남편은 왜 이곳에 있는 건가, 그 붉은 육망성은 뭐였을까, 정령의 힘을 모두 소모한 자신이 어떻게 봉인을 풀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렇지만 긴장이 일시에 풀리며 피곤함이 불시에 덮쳐 왔다. 어느 순간, 그녀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록사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캠든 성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영주님.”

바로 옆에서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윽.”

반갑고 기쁜 마음에 몸을 일으키던 록사나가 다시 이불 속에 파묻혔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되세요. 어찌나 심하게 다치셨는지……. 흑.”

아이린이 울먹거리면서도 록사나의 목을 살짝 받쳐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입가에 물잔을 대 주었다.

꿀꺽.

미지근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후아. 고마워, 아이린.”

“저야말로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거의 이틀 만에 깨어나셨어요.”

아이린이 눈물을 훔쳤다.

처음 록사나의 몸 상태를 봤을 때는 결코 무사히 돌아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감기에 걸려 몸져누운 사이, 록사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이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아파도 죽자 살자 영주님 옆에 있었어야 했다며 수도 없이 후회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뿐이었다.

카일라니 공작이 기절한 록사나를 데려왔을 때는 대성통곡을 했었다. 안도감에 눈물이 나왔고, 그녀가 당한 심한 부상에 또 한 번 눈물이 쏟아졌었다.

“그럼 오늘 날짜가…….”

“12월 31일요. 그래도 해 넘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참 다행이다 싶어요.”

이어서 아이린이 시로난에서 캠든 성으로 복귀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절한 록사나를 데리고 바로 캠든 성으로 복귀할 수 없었다. 어촌 마을 시로난의 의원을 수소문해 여관에서 일차적으로 록사나를 치료했다. 그 이후에 바로 캠든 성으로 복귀했다.

“어디 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응. 생각보다 몸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 그나저나 몸이 너무 갑갑해.”

“아, 그건 등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그래요. 발목도요.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당분간 그러셔야 해요.”

허리 부근까지 시커멓게 멍들었던 록사나의 상처를 떠올린 아이린이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아직도 치가 떨렸다. 등의 상처를 봤을 때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떻게 때렸는지는 몰라도 온 등이 저렇게 시커멓게 멍들 정도면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라고 약사 애슐리가 말했었다.

웨스트에 있던 애슐리는 그녀의 남편 켈빈과 함께 록사나의 치료를 위해 지금 캠든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어쩐지…….”

특히 가슴 부근이 답답했던 록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가슴 쪽만 붕대를 느슨하게 해 줄래?”

“잠시만요.”

아이린이 붕대를 다시 묶어 주자 록사나의 몸이 한결 편해졌다.

‘아 참!’

록사나가 깨어난 것이 기뻐 이런저런 말을 하던 아이린이 정신을 차렸다.

“록시 님 깨어나셨다고 의원이랑 사람들에게 알리고 올게요. 다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아이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아이린.”

“말씀하세요.”

“아기 늑대가 안 보여.”

아까부터 방을 살피며 아기 늑대의 모습을 찾았던 록사나가 말했다.

“아, 정령님요!”

깜찍하고 귀여운 아기 늑대 정령을 떠올린 아이린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게 말이죠…….”

우물쭈물하는 것이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뭔데?”

초초한 기분이 든 록사나가 재촉했다.

“정령님은 지금 2층 다른 방에 있어요. 정령님이 록시 님한테서 절대 안 떨어지려고 기를 쓰셨는데… 카일라니 공작님이 떼어 놓으셨어요.”

“뭐?!”

“정령이라지만 록시 님 곁에 두기에는 위험할 수 있다고 하셔서요.”

록사나가 헛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알아봐야 할 일들 중에는 전 남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상기했다.

“공작님은 지금 어디 계시니?”

“이 캠든 성에 계세요.”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직접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찝찝함을 빨리 털어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아기 늑대를 내게 데려오렴. 그리고 공작님은…….”

“공작님은 지금 바쁘신 거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늦게 만나셔도 될 거 같아요.”

아이린이 재빨리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당분간 카일라니 공작이 록사나의 곁에서 떨어져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두 분은 이혼한 사이잖아요.”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린이 록사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록사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카일라니 공작님 덕분에 록시 님을 더 빨리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부분은 정말 감사해요.”

아이린은 록사나를 구해 온 카일라니 공작에게 더없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카일라니 공작저를 떠나올 때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부상당한 록사나를 보면서는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해 댔다.

마치 후회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심하게 냉대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는 모습이 눈꼴사나웠다.

“하지만 영주이신 록시 님의 허락도 없이 본성에 기거하시고, 죄인들도 마음대로 심문하시고…….”

아이린은 그동안 눈에 거슬렸던 부분들을 하나둘씩 일러바쳤다.

록사나가 묘한 얼굴로 아이린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스테리온에 대해서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동안 쌓인 불만이 많았나 보다.

본성에 머무는 거야 그녀가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니 허락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신경이 쓰였다.

“죄인 심문이라니?”

“잡아들인 상인들이요.”

웨스트에서 독성 약초인 파파베르를 판매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는데?”

아이린이 말끝을 흐리자, 록사나가 재차 물었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아이린이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납치 사건을 겪으며 충격받으셨을 텐데 이 말을 해도 될지 고민이 되었다.

“그게 있잖아요, 영주님을 납치했던 무리들 중 한 명을 사로잡았대요. 지금 성의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자도 심문하신다고 들었어요.”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 다 죽은 걸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개중에 생포된 자가 있다니 좀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붉은 육망성과 정령에 관련된 정보를 파헤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의 납치와 관련해서도 말이다.

“그랬구나.”

록사나가 별스럽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안심이 되면서도 아이린은 왠지 속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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