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사악! 챙그랑.
쇠창살을 잘라 낸 아스테리온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벽처럼 거대한 등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전 남편의 뒷모습. 심장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등은 견고한 성처럼 눈앞에 자리했다.
아스테리온이 요망한 붉은빛의 육망성을 향해 검푸른 칼날을 겨누었다.
그의 눈빛은 단숨에 육망성을 얼려 버리기라도 할 듯 한없이 시린 빛을 띠었다.
붉은 육망성을 향해 손을 뻗는 록사나를 본 그 순간, 아스테리온은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세상이 무너지듯 발밑이 푹 꺼졌고, 지금도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할 새도 없었다.
화르륵!
붉은 육망성이 의지를 가진 듯 더욱 붉게 타올랐다.
아스테리온의 몸에 가려져 있는 록사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주변이 확 밝아지는 것으로 뭔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감지했다.
헥터와 카일라니 기사단도 칼을 빼내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기드온 경은 록사나의 옆으로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영주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다리랑 등이 좀 아프지만 견딜 만해요.”
앞에 선 아스테리온의 등이 움찔거렸다.
록사나가 다쳤다는 사실에 그의 심정은 처참해졌다.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졌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붉은 육망성이 그를 피하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그의 뒤에 있는 록사나를 찾는 듯했다.
‘대체 저건 왜 록사나에게 다가가려고 애쓰는 거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답을 알지 못했다.
반면에 오직 한 사람, 록사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에 붉은 육망성이 보이지 않으니 어떤 슬픔이 그녀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이상한 것은 결코 그녀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확실하게 베어 주지.’
아스테리온이 육망성을 향해 검을 내뻗는 찰나였다.
“안 돼요!”
록사나가 등 뒤에서 튀어나오며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상태 그대로 아스테리온의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하지 말아요.”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는 록사나의 표정이 간절했다. 이에 그의 금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럴 수 없어, 록사나. 저걸 당장 없애야 돼. 당신을 납치한 자들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위험한 힘이라고.”
“알겠어요. 그런데… 위험한 게 아닐지도 몰라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슬퍼하고 있어요.”
록사나가 붉은 육망성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느낀 어둠과 슬픔이 육망성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보다는 덜 무서웠다. 대신에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이 더욱 강해졌다.
아스테리온과 카일라니 기사단은 록사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모두가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한편, 기드온 경은 정령사인 영주님에게만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스테리온이 여전히 자신의 한 팔을 붙들고 있는 록사나의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작은 두 손이 구명줄이라도 쥔 듯 힘을 꽉 주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간지러운 수준보다 못했다.
그가 다시 붉은 육망성을 쳐다보았다. 희한하게 붉은빛이 약해져 있었다.
아스테리온은 격한 고민에 휩싸였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저대로 내버려 두는 것 자체도 너무 위험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할 수 있어요.”
록사나가 결연한 눈빛으로 아스테리온의 파란 눈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무력이라곤 하나도 없잖아.”
“무력이 아니에요. 어떻게 하는지는… 보면 알아요.”
정령의 힘을 모조리 소모한 상태였지만 록사나는 자신이 육망성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켜도 상관없었다.
그사이, 생명이 서서히 사그라지듯 붉은 육망성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에 어찌 애타는 마음이 드는지는 록사나 자신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육망성에 닿아야 한다는 마음만이 더욱 강해졌다.
“제발요…….”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우레처럼 아스테리온의 귓가에 꽂혔다.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위험해진다 싶으면 내가 막으면 돼.’
칼을 거두며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당신 혼자는 안 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같이 해. 그렇게 못 하겠다면 나도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알겠어요.”
붉은 육망성이 아기 주먹 크기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록사나가 다급하게 아스테리온의 손을 잡아끌며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윽!”
발목에서 올라온 찌릿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지며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아스테리온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그에게 안기게 된 록사나는 아픔도 잊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게 되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육망성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록사나의 시선도 어쩔 수 없이 육망성으로 향했다.
육망성은 더 작아져 간신히 붉은빛만 깜박이고 있었다.
록사나가 왼손을 내밀었다. 허공에 떠 있는 육망성에 그녀의 왼손가락 하나가 닿았다.
톡.
여린 꽃잎을 건드리듯 조심스러운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갑자기 빛이 사방으로 터졌다.
“윽!”
갑자기 빛줄기가 쏟아짐과 동시에 아스테리온이 본능적으로 록사나와 자신의 몸을 오러로 감싸며 바로 등을 돌렸다.
록사나의 고개가 자신의 가슴을 향하도록 뒷머리를 재빨리 감싸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일라니 기사단과 기드온 경도 강렬한 빛에 눈을 재빨리 감쌌다.
빛이 약해졌다 느껴졌을 때쯤 눈을 뜬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아스테리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육망성은 사라지고,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구체가 황금빛을 은은하게 발산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록사나도 아스테리온의 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육망성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
그녀의 입에서 감탄과 놀라움의 탄성이 터졌다.
핏빛 같던 붉은빛은 사라지고 태양처럼 따스한 황금빛 구체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잠시 동안 모두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구체도 놀라웠지만, 육망성을 변화시킨 록사나가 더욱 경이로웠다.
단 한 번 손으로 건드렸을 뿐인데, 불길하고 위험했던 육망성이 순한 양처럼 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공작 부인께서 가지고 계신 힘은 대체 뭐지? 아차, 이제 공작 부인이 아니라 남작님이시지…….’
헥터가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그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계신 저분을 놓친 자신의 주군이 좀 한심스러웠다.
‘역시 우리 영주님은 위대한 정령사!’
기드온 경의 눈에 다시 한번 경외가 깃들었다.
‘역시 내가 느꼈던 게…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스테리온 또한 놀란 눈으로 품에 안은 록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황금빛 구체를 바라보느라 그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록사나가 자신도 모르게 아스테리온의 가슴을 두드렸다.
“가까이 가 봐요.”
아스테리온은 그녀의 말을 충실히 따라 황금빛 구체 가까이 다가섰다. 위험한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록사나가 신기하게 황금빛 구체를 바라보았다. 구체 안에 작은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머, 넌 누구니?”
한껏 들뜬 록사나가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둥둥 공중에 떠 있는 구체에게 말을 거는 록사나를 아리송하게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록사나의 눈에만 그 존재가 보였다.
정신이 팔린 록사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
록사나가 인사를 건네자, 작은 존재가 꿈틀거렸다. 마치 몸으로 응답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황금빛 구체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구체가 그녀의 두 손안으로 알아서 쏙 들어왔다.
잠시 후, 황금빛이 서서히 줄어들며 단단한 구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쩍, 쩌적.
록사나가 당황할 새도 없이 구슬이 갈라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슬이 모두 깨지자, 작은 존재가 록사나의 손안에서 눈을 떴다.
록사나와 모두가 깜짝 놀랐다.
“넌?”
록사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눈부신 은빛 털에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눈. 그녀의 한 손바닥보다 한참 작은 크기였다.
갓 깨어난 아기 늑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록사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아우?
록사나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아기 늑대가 작게 하울링을 했다.
헥터와 카일라니 기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더러는 자신의 두 눈을 비벼 보았다.
분명 구슬에서 나오는 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눈앞에 떡하니 콩알만 한 늑대 한 마리가 생겨났다.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기드온 경도 입을 뻐끔거렸다. 꿈에서나 볼 법한 광경에 도저히 말이 안 나왔다.
반면 아스테리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안고 있는 록사나가 낯선 존재를 두 손안에 고이 담고 있으니 기분이 별로였다.
아기 늑대가 록사나의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와 몸을 한껏 비벼 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과 따스한 기운이 록사나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록사나의 눈에는 상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의 몸이 살짝 들썩거리자 허공에 들린 다리도 동동거렸다.
- 아우, 아울!
그녀의 눈빛과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아기 늑대가 기분 좋다는 듯 소리를 냈다.
‘너무 귀여워!’
깜찍함을 참지 못한 록사나가 아기 늑대를 자신의 눈높이쯤 들어 올렸다.
앙증맞은 것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녀의 주머니에 쏙 들어가기 알맞았다.
록사나가 얼굴을 가까이 디밀자, 아기 늑대가 그녀의 뺨을 마구 핥아 댔다.
“꺄~ 간지러워.”
순간 아스테리온의 반듯한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건 뭐지?”
그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록사나에게 물었다.
사실 아까부터 세상에 단둘만 있다는 듯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그의 신경을 살살 긁어 대고 있었다.
특히 잃어버린 어미라도 찾은 것처럼, 몸부림치며 갖은 아양을 떨어 대는 아기 늑대가 그의 눈에 몹시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