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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48)화 (48/214)

48화 

“누군가 온다.”

아스테리온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기드온 경이 20호를 든 채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헨리와 마르셀도 함께였다.

아스테리온이 그들의 몸에 자신의 오러를 덧씌워 기척을 지웠다.

나무 위로 아스테리온이 몸을 숨기자, 얼마 안 있어 방금 전 처리한 적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 자가 나타났다.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적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스테리온이 그의 뒤를 밟았다.

적이 동굴 입구에 다다라 입을 열었다.

“제로, 밖……!”

스걱!

아스테리온의 검에서 뻗어 나간 검푸른 기운이 적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분리된 12호의 목이 땅으로 툭 떨어졌다. 떼구루루 굴러가 아스테리온의 발치에서 멈췄다.

* * *

동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스무 명이 넘는 부하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것도 단 일격에.

제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일그러졌다.

‘젠장! 어째서 카일라니 공작이 여기에 나타난 거야?!’

그는 20호와 12호가 돌아오지 못한 것도 공작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수세에 몰린 제로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제법 유용한 은신처였던 동굴은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며 발목을 잡는 곳이 되어 버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소드 마스터의 기운을 피하기란 실력자인 제로에게도 쉽지 않았다.

전 공작 부인을 인질로 붙잡기 위해서는 동굴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카일라니 공작이 눈앞에 버티고 있으니 어려웠다.

제로는 도끼로 자신의 발등을 스스로 찍었다고 자책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제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리온에서 자신의 몸에 새겨 준 힘뿐이었다.

제로를 마주한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너!”

제로의 왼쪽 눈동자 속 붉은빛의 육망성, 두 개의 정삼각형 중 하나가 역삼각형이 되어 겹쳐져 만들어진 여섯 개의 모.

아스테리온이 세 번째로 보게 된 육망성이었다.

그들과의 끈질긴 인연을 여기에서도 마주하게 될 줄이야.

검을 든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더욱 매섭게 돌변했다.

제로 역시 자신의 숨겨진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왼쪽 눈에서 육망성이 빛을 발하며, 온몸으로 뻗어 나갔다.

붉은빛에 감싸인 제로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피부 위로는 힘줄이 도드라졌다.

순식간에 제로는 190cm에 가까운 공작보다 머리 두 개 이상으로 커졌다.

그의 왼눈에서는 붉은빛을 내뿜는 육망성이 태양처럼 빛났다. 그러나 제로가 앞을 보는 데 있어서 어떤 방해도 되지 않았다.

“크하하핫!”

괴성과 함께 제로가 아스테리온을 향해 몸을 날렸다. 힘껏 휘두른 제로의 손에서 붉은 빛이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처럼 뻗어 나와 아스테리온의 심장을 노렸다.

아스테리온이 오러를 덧씌운 검으로 그것을 맞받아쳤다.

쾅!

두 검이 맞부딪치듯 붉고 검푸른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여파로 동굴 내부가 진동했다.

쩍. 후드득, 후드득.

갈라지고 터진 돌 조각이 떨어져 내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제로가 검에 막힌 오른손을 거둬들이며 왼손을 순식간에 내뻗었다.

검푸른 기세를 머금은 아스테리온의 검이 제로의 왼손을 스치고 오른손마저 베어 냈다.

“으악!”

콰직, 투두둑투두둑.

제로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손에서 형성되었던 붉은 발톱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악!”

분노와 고통에 찬 제로가 육망성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제로의 왼눈이 더욱 붉은빛을 발하며, 그의 손에 다시 기다란 붉은 발톱이 형성됐다.

“공작님!!”

카일라니 기사단의 부단장 헥터가 아스테리온을 향해 소리쳤다.

어느새 아스테리온의 뒤로는 카일라니 기사단과 기드온 경이 당도해 있었다.

“이놈은 내가 상대할 테니 너희들은 록사나를 찾아라! 반드시 찾아내!”

제로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않으며, 아스테리온이 갈급하게 외쳤다.

“명을 받듭니다!”

헥터와 기드온 경, 카일라니 기사들이 재빠르게 흩어져 록사나를 찾기 시작했다.

“절대 찾을 수 없을 거다. 찾더라도 시체를 만나게 될 거야. 크하하핫!”

제로가 이죽거리며 한껏 비웃음을 흘렸다.

시체라는 말에 아스테리온의 심장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녀는 살아 있어!’

아스테리온은 어릴 적 록사나에게 받았었던 행운의 실팔찌를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가슴 안쪽을 한 손으로 더듬어 조심스럽게 작은 로켓 목걸이를 꺼냈다.

공방이 오고 가는 잠깐의 틈새를 이용해 버튼을 눌러 열었다. 실팔찌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성을 뒤흔들며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아스테리온의 분노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은 더없이 차분해졌다. 반대로 제로를 향한 그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흔들리던 아스테리온의 눈빛에 속으로 환호하던 제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멈췄던 두 사람의 발톱과 검이 다시 맞붙었다.

처음보다 제로의 발톱이 더욱 단단해져 오러가 깃든 검으로도 단번에 베기가 쉽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은 힘을 더 사용할 수 있었지만 동굴이 무너질까 염려되어 신중히 행동했다.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를 록사나가 위험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니! 대체 저 육망성은 뭐지?’

육망성과 관련된 적의 정체를 아직 제대로 밝혀내지도 못했는데, 아스테리온은 어려운 과제 하나를 더 받은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폭발, 지금은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건가? 발전했군. 저 육망성을 가진 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그나마 새로운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딴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만만한가 보군.”

제로가 더 매섭게 아스테리온을 몰아세웠다. 붉은빛에 싸인 그의 온몸은 단단한 갑옷을 두른 듯 아스테리온의 검을 수시로 튕겨 내었다.

타다다닥.

아스테리온의 주변으로 수십 명의 발소리가 모여들었다.

“주군, 동굴 내부를 다 뒤져 보았으나 록사나 님이 안 보입니다. 이곳에 갇힌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헥터가 수색 상황을 짧게 보고했다.

“크크큭. 거봐, 내가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 날 살려 주면 그곳이 어딘지 알려 주지.”

대등하게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제로가 협상을 시도했다.

육망성의 힘은 파괴력이 큰 만큼 오래 지속해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헛소리!”

단번에 일축하며, 아스테리온이 더욱 제로를 몰아세웠다. 이제는 거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록사나가 이곳에 없다는 게 확인된 이상 전처럼 힘을 조절할 필요 따윈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큭!”

아스테리온의 기세가 맹렬해지며, 제로는 점점 수세에 몰렸다.

쩌저적, 쿵! 쿠궁.

동굴 벽이 갈라지고 돌덩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에 헥터와 기드온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모두 동굴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아스테리온의 검무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이어졌다. 검푸른 빛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기운이 줄어들었고, 제로의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마구 솟구쳤다.

‘젠장! 이대로 죽을 순 없어!’

패배를 직감한 제로가 이를 악물었다. 힘을 잃어 가는 그의 몸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안 돼!”

자신도 모르게 제로가 절규했다.

그때였다. 아스테리온의 검이 제로의 심장을 꿰뚫으며 등으로 칼날이 튀어나왔다.

푹!

“큭!”

눈 깜짝할 사이에 아스테리온이 검을 회수했다. 그러곤 제로의 왼눈을 향해 다시 검을 찔러 넣었다.

검푸른 검기가 먼저 왼눈에 닿으며 육망성을 부수려던 찰나, 붉은빛이 폭발할 듯 요동쳤다.

아스테리온이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퍽!

제로의 머리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와 동시에 작은 구슬 같은 형태를 띤 붉은 육망성이 아스테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구슬이 파삭 깨지며 안에 있던 붉은 기운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육망성을 파괴하려는 순간 벌어진 현상에 기분이 찝찝했다.

마치 힘이 어딘가로 옮겨 가는 형상이었다.

적이 사라지자, 동굴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각하.”

기드온 경이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아스테리온에 대한 경외와 함께 록사나를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찾을 수 있다.”

기드온 경에게 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한 아스테리온이 품속에서 남색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따스한 기운이 그의 손안에 느껴졌다.

12년 전 그때처럼.

* * *

록사나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밤이 되었는지 동굴의 희미하던 빛마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몇십 분 전 다녀간 해달이 덕분에 작은 희망이 보였다. 해달이의 팔에 묶어 주었던 천 조각이 일행 중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무척 고마웠지만 줄 것이 없어 차마 먹지 못한 전복을 해달에게 다시 주었더랬다.

꼬르륵.

‘아, 너무 배고프고 춥고 아프다.’

배가 등가죽에 붙을 만큼 몹시 허기가 졌고 치료하지 못한 등과 발목이 너무 아팠다.

남겨 두었던 물도 모두 마셔서 입 댈 거라고는 짠 바닷물뿐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조금만 참자.’

그때였다.

화악!

“윽!”

갑작스럽게 비친 강력한 불빛에 록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부셔서 절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간 시간이 흐르고, 눈부심이 사라진 록사나가 슬그머니 손을 떼었다.

“헉!”

더럭 겁이 난 록사나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시뻘건 불덩이 같은 빛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크기가 사람 머리보다 조금 더 컸다.

“별? 뭐야, 대체?!”

핏빛처럼 빨간 것이 너무 무서운데,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육망성이었다.

록사나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귀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붉은 육망성이 너울거렸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이 기운, 정령의 힘 같은데 좀 달라. 뭐랄까, 좀 무겁고 끈적거려. 살짝 무섭기도 하고.’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기도 하고, 두려워서 꺼려지기도 하는 게 참 이상했다.

뭔가에 홀리듯 벽에 기대서며 몸을 일으킨 록사나가 육망성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록사나, 위험해!”

허공에 손을 멈춘 록사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이 화악 커졌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록사나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영주님!”

“아벨리오 남작님!”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록사나의 녹안이 점점 흔들렸다. 그녀에게 아스테리온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정말 꿈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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