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 *
“마르셀, 너는 기사단 일부 병력과 함께 해안가를 다시 수색해라. 적들은 분명 아직 시로난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드온 경이 명령을 내렸다.
“혹시라도 적들이 배로 도주할 수도 있으니 이 점 염두에 두고 철저히 살펴야 한다. 나와 헨리는 숲을 중심으로 재수색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해안가에서 뭔가를 발견하거나 문제가 생긴 거라면 거기서 이걸 불고, 그게 아니라면 숲으로 와서 보고하면 된다.”
기드온 경이 목에 걸고 있던 것을 풀어 마르셀에게 넘겨주었다.
작은 피리같이 생긴 그것은 훈련된 이들이 반경 1~2km 이내에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특수한 신호 장비였다.
하지만 마르셀은 신호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불라고만 한 것이었다.
기드온 경과 헨리가 숲으로 향하고, 마르셀 또한 일부 병력과 함께 해안가로 이동했다.
어제저녁 록사나의 실종 소식을 듣고, 아이린과 약속했다. 반드시 영주님을 무사히 찾아서 모셔 오겠다고 말이다.
마르셀이 매의 눈으로 해안가를 살피던 그때였다.
- 끼요.
어디서 짐승 비슷한 울음소리가 마르셀의 귀에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위 뒤에 몸을 숨긴 해달이 보였다.
- 끼요~
“미안, 지금은 네게 관심을 둘 수가 없어.”
마르셀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 끼오옷!
그러자 성을 내듯 해달이 울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마르셀의 시선이 다시 해달에게 돌아갔다.
주변 병사들의 시선도 그와 해달에게 향했다.
해달이 서서히 마르셀을 향해 헤엄쳐 왔다. 모래사장 위로 발을 내디딘 해달이 재빠르게 달려와 마르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너 왜? ……!”
마르셀의 두 눈이 커졌다. 해달이 자신의 한 손에 묶인 남색 천 조각을 빼서 마르셀에게 어서 받으라는 듯 재촉했기 때문이다.
“이건 영주님의!”
“뭐야? 왜 그래, 마르셀?”
동료 병사들의 질문에 마르셀은 대꾸하지 못했다.
깜짝 놀란 마르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뻐금거렸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분명했다. 천 조각에 놓인 수는 영주님의 치맛자락 원단이었다. 영지 시찰 중 자주 입으셨던 옷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도 못 하는 해달이 이걸?!’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어쩌면 짐승과도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 끼욧!
“해달아, 이것 우리 영주님이 입고 있던 옷이야. 너 우리 영주님 어디 계신지 알고 있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
마르셀이 해달의 앞발을 꼭 붙잡았다.
“뭐? 영주님 거라고?”
병사들이 입이 쩍 벌어졌다.
그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해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 조각을 가리켰다가 해안가와 가까운 숲 쪽을 바라보았다.
그 동작을 해달이 두세 번 반복했다. 동작의 뜻을 짐작한 마르셀이 물었다.
“이거 가지고 숲으로 가라고?”
- 끼요! 끼요!
해달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내 마르셀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고맙다, 해달아! 나중에 이 은혜는 물고기로 갚을게.”
- 끼요, 끼오옷!
* * *
기드온 경이 막 숲속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삐익, 삐이익!
피리 소리를 들은 기드온 경의 몸이 우뚝 멈췄다.
“기드온 경?”
주변을 살피던 헨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분께서 오셨군.”
“네? 설마요? 아직 도착하실 때가…….”
두두두두두.
얼마 안 있어 거구의 한 남자가 흑마를 타고 나타났다. 흩날리는 금발을 본 헨리의 입이 딱 다물렸다.
정말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었다.
프레드릭의 심부름차 카일라니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딱 한 번 본 게 전부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공작의 뒤를 따르고 있어야 할 카일라니 기사단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말에서 뛰어내린 카일라니 공작이 그들의 앞에 다가왔다. 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기세가 그의 온몸을 무겁게 감싸고 있었다.
기드온 경과 헨리가 카일라니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각하를 뵙습니다.”
아스테리온의 형형한 파란 눈이 그들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기드온 경과 헨리의 온몸이 바짝 얼었다. 자신들의 주군을 지키지 못한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각하, 우선은 이 숲을 수색하면서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숲 안쪽으로 몸을 돌린 기드온 경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동안의 일들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아스테리온이 단숨에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꼭대기에서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이 산자락 한곳에 다다랐다.
이리저리 파이고, 꺾인 풀과 나무들.
나무를 징검다리 삼아 아리테리온이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발!’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눈앞에 】
아스테리온은 처음 록사나의 납치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도 피가 바짝 마르고 애가 탔다.
수많은 후회가 그를 끊임없이 덮쳐 왔다.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캠든으로 달려오는 동안 모든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그녀만 무사하게 해 달라고. 어떤 벌도 달게 받겠으니 제발 그녀만은 온전하게…….
반짝!
저물어 가는 석양빛을 받은 무언가가 달려가는 아스테리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땅에 내려선 아스테리온이 풀숲을 뒤적였다.
‘이건!’
반지였다. 겉에는 아무 문양이 없었고, 안쪽에 두 개의 달이 새겨져 있었다. 초승달과 보름달.
처음 보는 반지였지만 어디가 눈에 익은 문양. 차마 다시 버릴 수가 없었다.
“헉헉, 헉! 각하, 지금 발견하신 게 뭡니까?”
소드 마스터인 공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쫓아온 기드온 경이 물었다.
그와 동시에 기드온 경은 아직 당도하지 못한 카일라니 기사단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반지다.”
아스테리온이 손을 펼쳐 기드온 경에게 보여 주었다.
기드온 경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님의 반지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영지 시찰 중 록사나가 끼고 있던 반지였다.
냉혹하던 아스테리온의 눈에 작은 불씨가 피워졌다. 그가 반지를 와락 움켜쥐었다.
앞을 향한 아스테리온의 시선과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여긴?!”
그를 뒤따르던 기드온 경이 낮게 신음했다.
내리막을 따라 풀과 키 작은 나무가 이리저리 꺾이고 땅이 헤집어졌다.
내내 수색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곳. 숲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영주님께서 이곳까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의 눈이 땅의 흔적을 놓칠세라 주변을 살폈다. 뭔가를 끈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이 록사나라는 걸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입술을 앙다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입술이 찢어지고, 손바닥 안쪽에 손톱이 파고들며 피가 배어 나왔다.
단서를 모으는 사이 한참 뒤처졌던 헨리가 당도했다.
뒤를 이어 아스테리온과 기드온 경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익.
“해안가에서 마르셀도 뭔가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아스테리온의 고개가 저 너머, 숲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제가 마르셀을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기드온 경이 재빨리 몸을 돌려 사라졌다가 마르셀을 데리고 나타났다. 두 사람의 표정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기드온 경이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걸 보십시오, 각하.”
남루한 남색 천 조각이 아스테리온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마르셀이 인사도 생략한 채 뒤이어 말했다.
“실종 당시 영주님께서 입고 계셨던 옷입니다.”
아스테리온이 기드온 경의 손안에서 천을 조심스럽게 낚아챘다. 그의 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엄습해 오는 불길함이 아스테리온의 온몸을 옥죄었다.
마르셀이 천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천을 물고 온 해달이 숲으로 가라고 했다고 얘기했을 때는 믿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때였다. 뭔가를 감지한 아스테리온이 몸을 바로 낮추며 일행에게 신호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챈 그들이 몸을 숨기자, 얼마 안 있어 복면을 쓴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
복면을 쓴 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몸의 움직임이 날렵하고 거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이 고도로 훈련을 받은 자들 같았다.
그들은 뭔가를 찾는지 산자락 주변 땅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록사나를 납치한 이들임을 직감한 아스테리온의 두 눈에 보이지 않는 푸른 불꽃이 일었다. 그의 가슴속에 거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적들을 앞에 두고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의미했다.
순식간에 아스테리온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가 바로 옆에 다가갈 때까지 그들은 아스테리온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의 날카로운 검이 적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적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스테리온의 검은 적들이 대처할 새도 없이 차례로 심장을 꿰뚫었다. 네 명의 적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어떻게?”
당황한 20호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절명한 동료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스테리온이 20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녀는 어디 있지?”
자신을 압도하는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 20호의 몸이 바짝 굳었다.
“카, 카일라니 공작?!”
20호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통 소름이 끼쳤다.
‘어째서 공작이 여기에?! 당장 도망쳐야 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퇴로를 찾아보려 했지만 거미줄에 걸린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인 공작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20호가 절망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아스테리온의 무시무시한 살기가 온몸을 파고들자, 20호의 무릎이 팍 꺾였다.
생살을 가르는 극심한 고통이 밀어닥쳤다.
20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렸다.
공작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그를 죽일 듯이 번뜩였다.
“큭! 말, 말하겠다.”
필사적으로 20호가 소리쳤다.
아주 잠깐 아스테리온의 기운이 거둬졌다. 겨우 숨통이 트인 20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굴에 있다. 안내할 테니까 제발……!”
“굳이 네가 아니어도 될 거 같군.”
넓게 퍼뜨린 기감을 통해 어떤 움직임을 감지한 아스테리온이 20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컥!”
고꾸라지는 20호의 몸을 잡아 아스테리온이 한쪽으로 내던졌다.
쿵.
기절한 20호가 세 사람의 발치에 떨어졌다.
공작의 뒤를 이어 바로 칼을 빼 든 기드온 경과 두 명의 병사가 황망한 눈으로 아스테리온과 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피 한 방울 묻힐 새도 없었던 세 사람의 칼날은 깨끗한 상태로 각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