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해달아, 파도가 센 거 같으니까 조심히 돌아가.”
- 끼오옷.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한 번 비벼 댄 해달이 소리 없이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잠수하기 직전 울음소리를 한 번 내고는 이내 사라졌다.
다시 파도 소리만이 그녀의 곁에 남았다고 생각할 때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복면을 쓴 마른 사내가 다시 찾아왔다. 그가 쇠창살 사이로 주머니 하나를 내던졌다.
“물이다.”
록사나가 뭐라고 말하거나 반응할 새도 없이 마른 사내는 자리를 급하게 떴다.
물주머니를 집어 든 록사나가 뚜껑을 열었다. 주변의 기운을 한 번 더 살핀 록사나가 물주머니 안으로 가느다란 힘을 불어 넣었다.
파란 빛의 줄기가 흘러 들어갔다. 물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약이나 독 같은 건 안 탄 모양이네.’
그제야 안심한 록사나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
한층 목마름이 가셨다. 다 마셔 버릴까 하다가 혹시 몰라 절반 정도 남겼다.
- 끼요~
록사나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너 왜 다시 왔어?”
그녀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물에서 빠져나온 해달이 앞발로 들고 있던 무언가를 록사나에게 내밀었다.
“응? 이거 나 먹으라고?”
- 끼요.
해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짧은 앞발을 더 쭉 내밀었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해달이랑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 끼오옷.
록사나가 해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해달이 그녀의 손에 자신의 앞발보다 큰 전복 하나를 놓아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록사나는 자신의 먹이를 나눠 주는 해달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난감했다. 갓 잡은 싱싱함을 자랑하듯 전복이 꿈틀꿈틀했다.
“해달아, 미안. 나 바로는 못 먹을 거 같아.”
날것이기도 했지만, 꿈틀거리는 걸 먹기는 힘들었다.
- 끼요?
“이건 우선 네가 먹는 게 어떨까?”
록사나가 전복을 다시 해달에게 내밀었다.
- 끼요옷!
해달이 약간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강렬히 가로저었다. 그러곤 자신의 빈손을 입가로 가져가서는 먹는 시늉을 했다.
“하하…….”
난감해진 록사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퍼뜩 뭔가가 머리를 스쳤다.
“해달아, 혹시 너…….”
- 끼요?
이내 차분해진 해달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록사나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정령의 힘을 다루기 때문일까.
어릴 적부터 동물들이 자신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오곤 했었다.
얼마 전 시찰 도중 발견했던 해달이 문득 떠올랐다.
그 기억들을 떠올린 록사나가 물었다.
“혹시 너 그 해달 아니니? 얼마 전 바닷가에서 우리를 쳐다보았던 그 해달 같아서 말이야.”
- 끼요, 끼욧!
해달이 마구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맞구나!”
록사나가 눈을 반짝이며 곧장 해달을 끌어안았다.
- 끼요옷!
“아, 미안. 내가 너무 세게 끌어안았지?”
포옹을 풀며 록사나가 해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해달아, 그럼 너 나랑 같이 있던 사람들도 기억해? 내 친구들인데.”
- 끼요오?
해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록사나의 눈썹이 축 처졌다.
“기억 못 하는구나…….”
목소리에서도 힘이 빠졌다.
이상함을 느낀 건지 해달이 록사나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폈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해달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 끼오옷!
“응?! 기억하는 거야?”
해달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록사나가 확신을 담아 다시 한번 물었다.
“나랑 같이 있던 사람들 기억한다고?”
- 끼욧!
표정이 환해진 록사나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해달의 앞발을 붙잡았다.
“해달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 끼요?
록사나가 자신의 치맛자락 한쪽을 길게 찢었다. 그러고는 뜯어낸 천 조각에 얼마 남지 않은 정령의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황금빛이 반짝이며 천에 사르르 스며들었다.
도적들을 상대하며 힘을 거의 사용했기에 외부까지 내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록사나는 천 조각을 해달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걸 네가 본 사람들, 내 친구들에게 전해 줄 수 있겠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이 영리한 해달이라면 충분히 그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간절한 록사나의 눈빛을 읽은 것일까.
해달이 천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어떻게 들고 갈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록사나가 천을 팔에 감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네 팔에 감아 줘도 될까? 네가 풀 수 있을 정도로만 감을게.”
입이나 앞발 한쪽이 자유롭지 않으면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하는 데 장애가 될까 봐 걱정이 앞섰다.
- 끼요.
해달이 천 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록사나가 해달의 앞 발목 쪽에 조심스럽게 묶어 주었다. 다른 앞발을 사용하면 바로 벗겨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잘 부탁할게, 해달아.”
- 끼욧!
해달의 까만 두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고마움을 담아 록사나가 자그마한 두 앞발을 마주 잡았다.
“조심히 다녀와. 그리고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혹시 이곳에 없더라도 놀라지 말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다른 이유로 자신이 이 장소에 없을 경우를 대비한 말이었다.
- 끼요.
“난 괜찮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내 해달이 몸을 돌려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해달이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록사나가 속으로 빌었다.
제발 해달이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기를, 자신의 일행들 중 한 명이라도 해안가나 강가 쪽에 있기를, 그리고 자신이 보낸 천 조각을 꼭 알아보기를.
동굴 안에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게 전부라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로난에 처음 도착하고 해달을 봤을 때 해가 떠 있었으니 지금도 해가 떠 있는 시간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해달이 가진 천 조각을 발견하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누구라도 천 조각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담겨진 정령의 힘이 어딘지 모를 이 해안 동굴까지 이끌어 줄 것이다.
* * *
“20호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남자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게… 아직입니다.”
마른 남자, 12호가 한참 전에 은신처를 나섰던 20호를 떠올리며 말했다.
캄캄해진 지금쯤이면 반지를 찾아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수하 몇 명도 함께 데리고 갔으니 단순히 더 늦어지는 거라면 기별이라도 보냈어야 했다.
“설마. 그 녀석, 반지를 가지고 튄 건 아니겠지?”
“…….”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갈망하던 20호였다.
대장의 의심이 어느 정도는 타당했기에 12호는 대신 변명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빨리 알아봐.”
“네.”
그들의 우두머리인 남자 제로가 12호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12호 또한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의 마음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뭔가 단단히 꼬여 가는 느낌이었다.
* * *
12호, 그들 조직이 카일라니 공작가의 감시망을 피해 레드포드 영지에서 가까운 시로난으로 옮겨 온 건 불과 세 달 전이었다.
즉, 그들은 도망친 이종족들을 뒤쫓다가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상부의 명령을 받아 잠시 시로난 영지로 대피해 있는 상태였다.
한 달에 한 번 정기 물자를 구하기 위해 12호를 포함한 몇몇이 한 달 전쯤 쿠엔틴 백작령 앨론드라에 갔었다.
외부인이 적은 캠든 영지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이 앨론드라에서 록사나를 목격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카일라니 공작 성에 있어야 할 공작 부인이 마부와 달랑 시녀 한 명만 데리고 그곳에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캠든 성으로 향하는 록사나를 확인한 후, 상부에 보고하니 감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캠든 기사단의 경비가 삼엄해서 성내로는 접근하기가 어려워 외부에서 동태를 살피는 게 전부였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캠든의 영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는 믿기 힘들었다.
추수절 황궁 사건이 있었다지만 멀쩡한 공작 부인이 뜬금없이 영주가 되다니.
처음엔 그저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캠든에서 몸을 사리고 있나 보다 싶었다.
영지 시찰을 나왔을 때도 카일라니 공작의 약점을 잡기 위해 감시했지, 공격해서 납치해 오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웨스트 빈민촌 화재 현장에서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지역에만 퍼붓듯 비가 내렸고, 순식간에 화재가 진압되었다.
제로는 뭔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 중심에 록사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카일라니 공작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불과 이틀 전, 그들은 카일라니 공작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그들은 록사나가 이혼을 하고 캠든의 영주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로는 뒷배를 잃은 록사나를 사로잡기 위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도적들에게 상단 습격을 의뢰하고, 그 뒤를 이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결국 록사나를 사로잡았다. 궁금했던 힘의 정체도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런데 힘이 깃든 반지를 찾으러 간 20호가 돌아오지 않으니 내내 불안했다.
* * *
동굴을 빠져나온 12호가 록사나를 사로잡은 산자락에 도착했다.
12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의 눈앞에 동료들이 보였다. 네 명의 동료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다가가 맥박을 짚어 보았다. 모두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료들은 단번에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
‘이들 중 20호가 안 보인다!’
이상함을 눈치챈 12호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그러나 심장을 단번에 찌를 만큼 20호의 무위가 뛰어나진 않았다.
12호가 급히 은신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혹시 20호가 반지의 힘을 사용했나? 아니야, 사용법이 따로 있다고 했으니 그 힘을 쓸 수는 없었을 거야. 혹시 캠든 기사단장이? 그렇다면 큰일이다!’
12호가 직접 칼을 맞대 본 캠든 기사단장 기드온 경의 실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동료들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을 만큼의 실력이 아니라는 걸 냉정하게 판단할 정신이 지금의 12호에게는 없었다.
이 사실을 빨리 알리기 위해 산의 숨겨진 동굴로 향하는 12호의 뒤를 누군가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12호가 은신처 동굴로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제로, 밖……!”
스걱!
검푸른 섬광이 12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