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45)화 (45/214)

45화 

록사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쓸 수 없어요.”

“뭐라고?”

남자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렸다.

“이게 어디서 거절이야?!”

몸집이 큰 사내가 록사나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악!”

갑작스러운 고통에 록사나의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걷어차인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무진장 아팠다.

‘저 나쁜 놈! 너 나중에 두고 봐. 가만 안 둘 거야.’

록사나가 눈을 치켜뜨며 자신을 때린 상대방을 힘껏 노려보았다.

“덜 맞았군!”

“그만해, 20호. 지금 대장이 심문하고 있는데 다시 기절하면 곤란하잖아.”

사내가 다시 발을 치켜올리자, 몸이 마른 편인 다른 한 명이 그를 말렸다.

“이봐, 전 공작 부인.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방금 경험해 봤듯이 내 말을 안 들으면 내 수하들이 당신을 어떻게 할지 모르거든.”

남자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섬뜩한 진심이었다.

“안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보여 주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그래요.”

남자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걸 잃어버렸어요.”

“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남자가 반문했다.

“그 힘이 담겨 있는 반지요. 당신들한테 쫓기다가 구르면서 빠진 것 같아요.”

남자에게 직접 확인해 보라는 듯 록사나가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가운뎃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있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네 힘이 아니라 반지의 힘이었다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남자가 되물었다.

“위자료로 전 남편한테 받은 거예요. 전 힘이 없는 여자이니까 내 몸 지키기에도 좋고, 고대 유물은 돈 주고도 못 살 만큼 귀하고 비싸잖아요.”

록사나의 입에서 진실과 거짓이 섞인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녀가 반지를 끼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반지는 위자료로 건네받은 게 아니었고, 무엇보다 아무런 힘도 없었다.

또한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떨어뜨린 거였지만 이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자가 복면으로 가린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리라.

고대 유물 중에는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들이 실제로 다수 존재했다.

그런 것들은 황실과 권력 있는 귀족가가 주로 소유하고 있었으며,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는 만큼 그에 대한 관리도 무척 철저했다.

“대장, 사실인 거 같은데요.”

마른 사내가 말했다.

알 수 없는 힘을 썼다고 하기에 여자는 아무 능력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카일라니 공작가라면 고대 유물 한두 개쯤은 우습게 위자료로 건넬 만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눈에서 의심이 얕아졌다.

“그 반지만 있으면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거야? 빨리 말해!”

그녀를 때렸던 사내의 눈에 욕심이 가득 차올랐다. 록사나의 말을 믿는 게 틀림없었다.

“당신들도 봤잖아요. 반지의 힘을 계속해서 쓰면 위력이 약해져요. 그 후에는 며칠 정도 시간이 지나야 다시 쓸 수 있어요.”

“잃어버린 장소를 정확히 밝혀!”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록사나를 윽박질렀다. 그의 눈에는 어떻게든 반지를 얻겠다는 욕망이 그득했다.

잔뜩 겁을 먹은 척 록사나가 몸을 떨며 움츠러들었다.

“얘기했잖아요. 쫓기다가 구르면서 손에서 빠졌다고요.”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

아직 의심을 다 거두지 않은 남자가 록사나에게 경고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사내에게 지시를 내렸다.

“20호, 가서 찾아와.”

“네, 대장.”

록사나를 때렸던 사내가 자리를 떴다.

이에 록사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남자가 여전히 록사나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이제 당신은 쓸모없어졌네. 어떻게 할까?”

잘 가지고 놀다 질려 버린 놀잇감을 쳐다보듯 남자가 이죽거렸다.

막혀 있어 더 물러날 곳이 없음에도 록사나가 뒤로 주춤 몸을 물렸다.

“그… 반지의 힘을 확인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사용법을 모르면 힘을 쓸 수가 없어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뭐, 그렇다면 잠시간은 살려 둬야겠군.”

마치 그녀를 배려하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그의 말처럼 록사나의 목숨이 잠시 유예되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전 공작 부인.”

남자와 마른 사내가 몸을 돌려 감옥을 빠져나갔다. 떠나면서 열쇠로 문을 다시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의 발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자, 한껏 긴장했던 록사나의 몸이 조금씩 풀렸다.

‘휴, 다행이다.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기드온 경이 그 반지를 꼭 발견해야 할 텐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자 눈앞이 더 캄캄했다.

록사나의 고민은 다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더 이어지지 못했다.

마른 몸의 사내가 다른 자들을 이끌고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그녀의 눈을 가리개로 가리고 어딘가로 끌고 갔다.

양팔을 붙잡힌 채 거의 들리다시피 옮겨지고 있었다.

‘대체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처음 몇 번은 방향 감각을 살려서 갇혔었던 감옥을 기준으로 지나가고 있는 위치들을 가늠해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체감한 것으로는 한 시간쯤 움직인 것 같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붙잡힌 처지에 어떤 불평불만도 할 수가 없었다.

‘응?’

록사나의 코끝에 낯선 내음이 맡아졌다.

그녀가 남몰래 숨을 더 크게 들이마셨다. 짠 내가 섞여 있는 것이 바다 향이었다.

철썩!

이어서 희미하지만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바다다!’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단단하던 바닥도 푹푹 빠졌다. 모래였다.

자신을 왜 바닷가로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던 감옥보다는 낫다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마른 몸의 사내가 록사나의 눈에서 가리개를 치웠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록사나가 눈치껏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서 빛이 들어오는지 희미하게나마 주변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들이 왔던 방향의 맞은편 쪽으로는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는데 해안 근처의 동굴 같았다.

록사나의 시선이 바닷물 쪽으로 향하자, 마른 사내가 몇 마디 덧붙였다.

“저곳으로 뛰어들 생각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추워서 얼어 죽기 전에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거나 바위에 내동댕이쳐져서 죽기 아주 좋아. 우리 조원들 여럿이 이곳을 탐사하다가 그리됐거든.”

위험한 곳에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가두어 놓기 위해서인지 이곳에도 감옥처럼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살벌한 내용을 쏟아 낸 마른 사내가 사람들을 이끌고 사라지자, 록사나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날 왜 갑자기 이곳으로 옮긴 거지? 혹시 기드온 경이 내 흔적을 발견한 게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혹여 저들의 은신처가 발각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그녀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장소를 옮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꼬르륵.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록사나는 갑자기 목이 마르고 무척 허기가 졌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실 것은 물론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바닷물을 마셨다가는 더 갈증에 시달릴 게 뻔했다.

‘아, 배고프다. 물이라도 좀 가져다주지…….’

철썩, 처얼썩.

파도 소리를 위안 삼아 록사나가 고개를 다리 사이에 막 파묻을 때였다.

- 끼요.

‘응?’

- 끼요옷, 끼요.

‘뭐야? 꼭 낑낑거리는 강아지 소리 같잖아?’

낯설지만 귀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 끼요~ 끼요옷!

더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어머!”

록사나가 깜짝 놀랐다.

바닷물이 차 있는 곳에 까맣고 맨들거리는 작은 머리통 하나가 비죽 솟아나 있었다.

작은 얼굴에 콕 박힌 까만 두 눈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해달?!’

록사나는 해달이 놀라 달아날까 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잠시 후, 해달이 슬금슬금 그녀가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모래사장에 다다르자, 그 위에 앞발을 살짝 걸쳤다. 그러고는 또 록사나를 쳐다봤다.

- 끼요~

“혹시 나를 부르는 거니?”

해달이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맞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갈까 말까 자꾸 망설여졌다. 그녀는 작은 친구가 달아나길 원하지 않았다.

해달이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물갈퀴 달린 앞발 하나를 들어 손짓했다.

“나보고 오라고?”

- 끼요.

또 앞발을 흔들었다.

그제야 록사나가 앉은걸음으로 모래사장 위를 조금씩 걸어 해달에게 다가갔다.

두세 걸음쯤 남았을 때 멈췄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해달아?”

- 끼요, 끼오옷.

조심스럽게 해달에게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해달이 그녀의 손에 얼굴을 마구 비벼 대기 시작했다.

“아하하, 간지러워.”

해달의 몸이 물기에 젖어 있어 손이 바로 축축해졌지만,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록사나가 해달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해달도 모래사장 위로 완전히 몸을 드러냈다.

자그마한 해달의 몸이 그녀의 발치 아래 자리하더니 애교를 부리며 다리에 매달렸다.

“그래, 그래. 나도 너무 반가워.”

록사나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해달아, 여기 나쁜 사람들이 있어서 너무 위험해.”

해달과 자신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혹여나 그들에게 들켜 해달이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염려되었다.

- 끼요오.

해달은 한껏 귀여운 목소리로 울며 록사나의 손을 붙잡고 놀았다.

“아니, 내 말 듣고 있니? 여기 위험해.”

그러거나 말거나 그 뒤로도 해달은 록사나와 한참을 놀았다. 록사나는 해달이 보여 주는 행동에 잠시나마 울적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록사나 옆에서 휴식을 취하던 해달이 얼마 후, 몸을 일으켰다.

“응? 이제 가려고?”

- 끼요.

해달이 몇 걸음 내딛다가 록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