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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44)화 (44/214)

44화 

타다다닥!

어느새 적들의 움직임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록사나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의 눈이 주변 지형을 빠르게 훑었다.

바위틈을 발견한 록사나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내달렸다.

탁.

“악!”

돌멩이에 걸린 록사나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리막길을 따라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록사나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떼굴떼굴 구르던 몸이 속도를 줄이자 바로 벌떡 일어섰다.

“윽!”

내디딘 오른발에 큰 충격이 강타했다. 넘어지면서 접질린 모양이었다.

“저기다!”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적들이 내리막길을 빠르게 뛰어내렸다. 둘이었던 적들은 다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제발!’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록사나가 미친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속도는 턱없이 느려졌다. 적들은 점점 그녀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 순간, 적 중 하나가 나무토막 하나를 록사나에게 내던졌다.

퍽!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록사나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동시에 눈앞에 암흑이 드리웠다. 록사나가 정신을 잃었다.

* * *

똑. 또옥, 똑.

“…으음.”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추워.’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몇 번 느리게 깜빡였다.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린 록사나의 눈앞이 흐릿했다. 축축하고 눅눅한 냄새가 맡아졌다. 자신의 몸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결박되어 있지는 않았다.

록사나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윽.”

오른 다리와 등에서 엄습해 오는 고통을 참으며 벽에 간신히 몸을 기대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주변이 조금씩 보였다.

사방이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쪽에서는 돌출된 바위를 타고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동굴인 것 같은데…….’

유일하게 안 막힌 곳에는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었다. 적들이 자신을 이곳에 가둔 모양이었다.

록사나가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들을 떠올렸다.

아픈 아이린을 마르셀에게 맡기고 기드온 경, 헨리와 함께 시로난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었다.

시로난은 카일라니 공작가 레드포드 영지 내의 큰 항구 도시 메러딘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매달 말쯤 되면 어획량이 풍부한 메러딘에서는 해산물을 판매하러 많은 상인이 시로난에 왔다.

마침 그 시기였기에 록사나는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잘됐구나 싶었다.

시로난에는 농사를 병행하는 어부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어획량은 대개 자체적으로 소비되었고, 그 종류도 많지 않았다.

록사나는 시장과 시로난의 주변 지형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일이 터졌다.

메러딘에서 온 작은 상단이 정체불명의 이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록사나와 기드온 경, 헨리는 상단을 돕기 위해 나섰다.

처음에 기드온 경은 그녀가 나서는 걸 만류했었다. 그러나 록사나는 자신의 영지에서 벌어지는 약탈을 편하게 지켜볼 수 없었다.

정령의 힘을 어느 정도 회복했기에 과감하게 먼저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살이 갈라지고 피가 난무했다. 처음 겪는 상황에도 역겹거나 구역질을 할 틈조차 없었다.

세 사람이 합류하자, 위기에 몰려 있던 상단은 차츰 약탈자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갈 때쯤이었다.

또다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공격을 해 왔다. 이번에는 그 수가 열 명 정도 더 많았다.

기드온 경이 그녀를 보호하며 적을 상대했지만, 난전이 계속되었다. 어느새 록사나는 일행들과 홀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재빠르게 인지한 기드온 경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자, 여러 명의 적들이 그를 막아섰다.

마치 록사나와 일행을 일부러 떼어 놓은 것 같았다.

힘을 쓸수록 정령의 힘은 약해졌고, 결국 그녀는 적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잡혀 버렸다.

‘등에 뭔가를 맞고 쓰러졌었지.’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록사나는 등이 너무 욱신거리고, 추워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다리를 힘겹게 끌어모아 두 손을 맞잡으며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조심스럽게 파묻었다. 한쪽 다리가 아파서 눈물이 찔끔거렸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가장 편한 자세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 무사할까?’

자신의 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함께 싸운 사람들이 더 걱정되었다.

록사나가 손을 들어 정신을 집중했다. 정령의 힘이 하나도 모이지 않았다.

‘역시 안 되네. 하긴,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냈었으니까.’

그때였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록사나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멀게 느껴지던 발소리가 쇠창살 앞에서 멈춰 섰다. 어둡던 감옥 안에 불빛이 비쳤다.

고개를 든 록사나가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모두 세 명이었다. 그들은 검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록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깨어났군.”

날카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평범한 목소리였다. 그가 대장 같았다.

가운데에 서 있는 그 남자가 한 명에게 눈짓을 했다. 지시를 받은 자가 열쇠를 꺼내 쇠창살에 달린 자물쇠를 풀어냈다.

그들이 감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록사나 앞에 마주 섰다.

록사나는 많이 두려웠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가장했다.

“당신들 누구예요?”

“우리?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인데.”

“네?”

당황한 록사나가 반문했다.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그러나 그녀는 다음 말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일라니 전 공작 부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영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재미있다는 듯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군요. 날 왜 가두었죠?”

“그 전에 그건 뭐였지?”

남자는 도통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졌지만, 록사나는 자신의 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뭐가요?”

그녀가 시치미를 뚝 뗐다.

남자가 한쪽 무릎을 굽혀 록사나를 마주했다. 뱀같이 차가운 눈을 본 그녀의 몸이 뻣뻣해졌다. 뭔가 소름이 쫙 끼쳤다.

순식간에 남자의 눈동자 안에서 별 비슷한 문양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참으로 기이했다.

뱀이 먹이를 낚아채듯 남자의 눈이 매섭게 록사나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분명히 당신 손에 무기 같은 건 없었는데 그 힘은 뭐였을까?”

록사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기드온 경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시로난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도 록사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영주님,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되고 록사나가 홀로 떨어졌을 때 대부분의 적들이 그에게 쏠렸었다.

적들은 처음 도적들에 비해 무위 수준이 월등히 높았고, 마치 그의 발을 묶어 놓는 것 같은 공격 패턴을 취했다.

한참 동안 주고받는 공방 가운데 적들은 어느 순간 썰물처럼 물러났다. 록사나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로잡은 도적들을 심문하자, 상단을 공격하라는 의뢰를 받았으나 의뢰자의 정체를 모른다고 실토했다.

기드온 경은 영주를 노린 계획적인 공격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드온 경, 이렇게나 흔적이 남지 않았다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헨리가 다가와 말했다. 그들은 다시 사고 현장 주변에 와 있었다.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 분명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결연한 표정의 기드온 경이 주변 일대를 날카롭게 살폈다. 그의 눈에 멀리 떨어진 숲이 눈에 들어왔다.

“영주님이시라면 분명 뭔가 단서를 남겼을 겁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어제 바로 합류한 마르셀이었다. 록사나의 명에 따라 아이린의 간호를 위해 여관에 남아 있었던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들의 공격을 받을 때 힘을 보태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그들의 영주 록사나가 행방불명된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아무래도 저 숲을 다시 살펴야겠다. 이 근방에서 저기 말고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거의 없어.”

“저희 생각도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 숲을 향해 움직였다.

어젯밤부터 오늘 오후까지 시로난의 치안대를 동원해 밤샘 수색을 벌였었다. 현재는 그들을 돌려보내고 셋만 움직였다.

아침에 당도한 캠든 기사단은 시로난의 경계 근무를 섰다. 적들의 무위가 높았기에 시로난의 주민들과 이곳을 오고 가는 상단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삐이―익!

세 사람의 머리 위에서 매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본 기드온 경이 팔을 내밀어 폈다.

재빠르게 하강한 매가 기드온 경의 팔에 내려앉았다.

“수고했다.”

기드온 경이 주머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매에게 물려 주고는 발에 묶인 서신을 풀어냈다.

재빨리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그를 보며 참지 못한 마르셀이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그분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 몇 시간 후면 도착하시겠군.”

헨리와 마르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의 해가 서서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매가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기드온 경이 잠시 바라보았다.

저 매는 록사나 일행이 영지 시찰을 시작하면서부터 늘 함께했지만 오직 기드온 경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제 록사나가 사라지고, 기드온 경은 매를 불러 공작가에 전령을 날렸었다. 방금 받은 것은 그에 대한 회신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스테리온이 며칠 전 이미 캠든으로 떠났으며 곧 당도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 *

“이런, 이런. 숨겨 봤자 소용없어. 이미 다 들켰거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히죽 웃었다. 코앞에서 그를 보고 있는 록사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죠?”

낭패한 록사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남자가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웨스트에서부터 지켜봤지.”

깜짝 놀란 록사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자들이 적어도 웨스트에서부터 그녀를 몰래 살펴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숨겨진 능력이 결국 드러나게 되다니.

“그 힘은 여러 번 쓰면 쓸수록 위력이 줄어드는 것 같던데. 지금쯤 다시 회복되었겠지?! 지금 한번 보여 봐.”

남자가 록사나의 턱을 한 손가락으로 치켜들어 올렸다. 마치 닿기 싫은 것에 어쩔 수 없이 손을 가져다 대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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