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자, 어서 가자.”
네이든이 원래의 목적을 위해 서둘렀다.
오늘 두 사람은 용병 길드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네이든이 지각하는 바람에 일정이 늦어졌다.
그리고 사실 오늘 동행자로 루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다.
아스테리온 일행은 발걸음을 서둘러 한 주점 앞에 다다랐다. 주점 간판에는 맥주잔을 움켜쥔 새의 발이 그려져 있었다.
새 발 주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독수리 용병대의 본거지였다.
세 사람은 왁자지껄한 주점 안으로 들어선 뒤 바텐더가 있는 앞쪽으로 곧장 다가갔다.
“맥주 세 잔. 일반 맥주 말고 독수리가 만든 걸로.”
남들에게는 주문하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실은 일종의 은어였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세 사람을 훑어 내렸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라보니 인상이 더 사나워 보였다.
“잠시 기다리쇼.”
이내 사내가 그들을 놔두고, 바 뒤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사내는 세 사람을 주점의 숨겨진 공간으로 이끌었다.
먼저 바의 뒤쪽 공간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밀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미로처럼 된 통로가 드러났다. 세 사람은 그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걸었다.
아스테리온과 네이든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통로들은 아마도 다른 건물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그들은 어느 나무 문 앞에 다다랐다. 사내가 나무 문 위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똑똑, 똑똑, 똑똑똑. 탁!
맨 마지막에는 주먹이 아닌 손바닥을 펴서 문을 쳤다.
끼익.
곧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그들에게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아스테리온 일행은 사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업무를 보는 공간이 나타났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도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책상에서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사내가 그 사이를 가로질러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아스테리온 일행은 자신들이 곧 만나게 될 사람이 이 문 너머에 있음을 눈치챘다.
“단장, 데려왔어.”
사내는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는 아스테리온 일행만 그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문을 닫았다.
집무실처럼 꾸며진 실내였다. 커다란 책상 너머에서 한 남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주황빛이 감도는 샛노란 빛의 눈은 먹이를 노려보듯 날카로웠다.
“당신이 독수리 용병대 단장인가?”
아스테리온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흐음.”
남자는 대답 대신 흥미로운 듯, 아스테리온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자리를 권유했다.
“우선 앉지, 손님들.”
아스테리온 일행이 방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자리하자, 남자도 일어나서 건너왔다.
상석에 자리한 남자, 에이글이 양옆의 세 사람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독수리 용병대의 단장이었다.
“그래서 날 찾은 이유는?”
“호위를 의뢰하려고.”
아스테리온이 대답했다.
“호오.”
에이글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거렸다. 세 사람 중 가장 키가 작은 루나에게 그의 시선이 꽂혔다.
“우리 황태자님과 카일라니 소공작님은 호위 따윈 필요 없으실 테니 여기 이 아가씨의 호위를 말하겠군.”
“역시 우리 정체를 알고 있었군.”
네이든이 망토를 젖히면서 말했다.
“아무리 용병대라지만 우리도 그 정도 정보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에이글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황태자에게 반말을 고수했다. 그의 행동에 대해 네이든은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이 황태자님 봐라?’
황태자 네이든과 카일라니 소공작 아스테리온이 찾아온 것도 흥미로웠지만, 오히려 그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에이글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만큼 저 여자의 호위 문제가 중요하다는 거겠지.’
호위에 있어서 독수리 용병대의 명성은 알음알음 대륙 내 최고로 손꼽힌다.
외부에는 철저히 비밀이지만 독수리 용병대는 조인족 중심의 이종족 용병대였다.
조인족은 무력이 뛰어나고 인간들과 다르게 하늘 위에서까지 비밀 호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가 독수리 용병대를 넘어설 수 있으랴.
단장인 에이글 역시 조인족이었고, 지금의 조인족 수장이기도 했다.
에이글이 독수리 마을의 후계자였던 5년 전, 그들의 마을은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당시 외부에 나가 있었던 에이글 일행이 돌아왔을 때는 마을의 조인족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의 부모님과 하나뿐인 어린 누이 에이샤 역시도.
남은 자들끼리 사방으로 동족들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다가 만든 게 지금의 독수리 용병대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가족들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에이글이 자신의 턱을 손으로 쓸었다. 그는 루나의 호위 의뢰를 받아들일까 말까 고민했다.
뛰어난 용병대인 만큼 그들은 정보력도 뛰어났다.
미래의 황제와 카일라니 공작에게 연줄을 만들어 놓는다면 좋겠지만, 리온 제국 내 귀족파의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물들과 얽히게 되면 실종된 동족들을 찾는 일에도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에이글이 거절의 말을 막 꺼내려던 찰나였다.
아스테리온 소공작의 손목에 걸린 팔찌가 반짝였다. 이에 에이글의 두 눈이 미친 듯이 커졌다.
‘저건 분명?!’
정령의 기운이었다!
순간 의뢰 거절도 까맣게 잊은 채, 에이글이 아스테리온의 손목을 움켜쥐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 팔찌 어디서 났지?”
갑작스럽게 한쪽 팔을 붙잡힌 아스테리온은 처음부터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중한 팔찌를 빼앗길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을 붙잡은 에이글의 손을 쉽게 떼어 냈다.
에이글은 절박하고 다급해졌다.
“빼앗으려는 게 아니오! 내겐 아주 중요한 문제이니 제발 알려 줄 수 없겠소?”
지금까지의 거만했던 태도는 사라지고, 에이글의 말투가 단숨에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령사를 만날 수 있다면 행방불명된 조인족들의 흔적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혹여 록사나가 해를 입게 될까 봐 아스테리온이 잠시 주저하며 망설였다.
그러자 에이글이 루나의 호위 수락은 물론, 자신은 조인족이며 가족을 찾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솔직히 밝혔다.
그제야 아스테리온이 팔찌를 얻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소녀의 거처까지는 모른다는 말에 에이글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때였다. 옆에서 입 한 번 열지 않았던 루나가 손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저, 제가 알아요.”
루나는 바로 록사나가 팔찌를 줬던 안나였다. 안나라는 이름은 루나가 사용하는 가명이다.
록사나라는 소녀가 머물고 있는 보육원의 위치를 들은 에이글의 얼굴이 환해졌다.
에이글은 곧장 해당 보육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록사나는 그날 밤 부모님과 함께 보육원을 떠난 상태였다.
* * *
쏴아. 쏴. 쏴아.
파도가 끊임없이 바위를 덮쳤고, 흰 거품을 일으키며 모래사장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거세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따라 일행의 옷자락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에취!”
아까부터 코가 간질거리던 아이린이 기어코 재채기를 했다.
“아이린, 너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냐?”
록사나가 아이린의 볼록한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훌쩍, 아니에요. 그냥 재채기가 나온 것뿐이에요.”
아이린의 대답에도 록사나는 신경이 쓰였다.
영지 시찰을 떠나온 지도 벌써 2주가 넘었다.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많은 바깥 활동을 하기도 했고 이동 시간 또한 길었기에 몸이 축나는 건 당연했다.
“너 지금 코도 훌쩍거리잖아. 안 되겠다. 오늘은 이만 여관으로 돌아가자.”
그녀가 바닷가 언덕을 등지며, 아이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록시 님, 저 정말 괜찮아요.”
“나도 오늘은 좀 피곤해. 빨리 들어가서 쉬자.”
이에 아이린의 입이 한 번에 다물렸다.
록사나가 피곤하다는데 뭐라고 말릴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이린 또한 그녀가 걱정되었다.
록사나 일행은 웨스트 시내와 그 주변 마을을 3일 정도 둘러보고, 지금은 외곽 쪽에 위치한 작은 어촌 마을 시로난에 와 있었다.
발길을 돌리는 두 사람의 뒤를 기드온 경과 마르셀만이 뒤따랐다.
마침 시로난이 고향인 헨리는 하룻밤 부모님이 계신 고향 집에서 자고 오라고 보낸 참이었다.
일행은 언덕을 내려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그들이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접어들 때쯤이었다.
“앗, 저길 보십시오.”
마르셀이 뭔가를 가리켰다.
바위 뒤에서 무언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건?”
록사나와 아이린뿐만 아니라 기드온 경도 신기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해달이로군요.”
기드온 경이 그것의 정체를 밝혔다. 해달은 그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해달요?”
아이린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응. 바닷가에 사는 저 아이를 해달이라고 부른단다. 야행성이라 이 시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데 운이 좋구나.”
“저 해달은 처음 봐요.”
아이린의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수달은 어릴 때 몇 번 본 적 있는데, 해달은 나도 처음이야.”
“록시 님도요? 그런데 저 해달 너무 귀엽게 생긴 것 같아요!”
“네 말처럼 귀엽게 생겼네.”
마르셀이 가볍게 맞장구를 쳐 줬다.
네 사람은 여전히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해달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여관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록사나의 염려대로 아이린은 그날 밤에 몸져누웠다. 마을 의원은 몸살감기라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잘 먹고 잘 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픈 와중에도 아이린은 록사나에게 감기를 옮길 수 있다며 따로 다른 방을 사용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에 못 이기는 척 옆방을 추가로 잡아 줬지만, 록사나의 간호만은 물리칠 수 없었다.
* * *
“헉헉!”
록사나가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정체 모를 두 명의 사내가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안 돼! 이러다 잡히겠어.’
바닥나기 시작한 정령의 힘을 힘껏 끌어모았다. 몸을 살짝 비틀어 손을 뻗었다.
그들의 손이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기 직전, 록사나의 손에서 가는 바람 줄기가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쉬익!
바람이 그들의 발목을 움켜쥐듯 휘어 감았다.
“윽!”
두 명이 동시에 고꾸라졌다. 그 틈을 타 록사나가 어두컴컴한 숲속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다.
다리가 몹시 후들거렸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같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절대 멈출 수가 없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와 어둠이 록사나의 모습을 조금씩 가려 주었다.
나무의 잔가지가 록사나의 얼굴과 손을 마구 할퀴었지만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