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안 되는데…….”
열두 살의 소녀 록사나는 고민에 빠졌다. 거슬러 줘야 하는 돈은 98브론즈인데 지금까지 자신이 실팔찌를 팔고 벌어들인 돈이 18브론즈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8브론즈를 거슬러 줘야 하는데 80브론즈가 부족하네요.”
이어서 록사나가 울상을 지었다.
“그럼 80브론즈 대신 나중에 실팔찌를 내게 더 팔아.”
아스테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꺼냈다.
“세 개에 2브론즈이니까 제가 나중에 드려야 하는 수량이 120개가 되겠네요.”
순간 아스테리온이 크게 놀랐다. 소녀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암산을 해냈기 때문이다. ‘수’라는 말 대신 ‘수량’이라고 표현한 것도 흥미로웠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만큼 학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꽤 높았으리라.
하지만 소녀는 여느 평민들이 입는 재질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 학자가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소녀가 지금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내 아스테리온은 옷차림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과 네이든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자주 평민들의 옷차림을 하고 수도 거리를 돌아다녔으니까.
소녀를 살핀 아스테리온은 아이가 귀족임을 알아챘다. 소녀의 말간 얼굴에는 귀티가 흘렀고, 실팔찌를 들고 있는 작은 손도 곱기만 했다.
“120개를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닌데요, 언제까지 전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왜?”
“며칠 있다가 부모님과 함께 집에 갔다가 수도에 다시 올 거예요.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요.”
“수도에 사는 게 아닌가 보군.”
“맞아요. 거스름돈도 드릴 수 없고, 나중에 실팔찌도 만들어 드리기 어려우니까… 안 사 주셔도 돼요. 그리고 죄송해요.”
아스테리온이 대뜸 소녀의 손안에서 실팔찌를 가져갔다.
“팔아. 살 거야. 거스름돈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충분해.”
“하지만…….”
“행운의 실팔찌라니 가족에게 꼭 선물하고 싶군.”
쐐기를 박는 아스테리온의 말에 고민하던 록사나가 포기했다.
가족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행운의 실팔찌는 정말 특별했다.
“감사합니다. 여기 18브론즈요.”
소녀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고마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 잠시만요.”
거스름돈과 실팔찌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던 아스테리온이 멈칫했다.
“실팔찌 다시 줘 보세요. 다 못 드린 거스름돈 대신에 추가로 축복을 불어 넣어드릴게요!”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아스테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축복을 불어 넣겠다고 하는 건지 몰랐지만, 아스테리온은 실팔찌를 건네주었다.
록사나가 실팔찌 세 개를 자신의 두 손에 꼭 감싸 쥐었다. 눈을 내리뜨자, 어여쁜 녹색 눈이 아스테리온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정령들의 힘을 모아 축복합니다. 실팔찌에 깃드는 이 정령의 힘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
소녀의 손안에 선명한 황금빛 기운이 모여들었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동시에 그 순간 아스테리온은 따스한 무언가가 모여들었다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에게 손을 내민 록사나를 보자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아주 빵빵하게 축복을 불어 넣었어요. 나중에 팔에 한 실팔찌가 끊어지면 행운이나 축복이 이루어졌다는 뜻이에요.”
소녀가 뿌듯한 얼굴을 하고는 아스테리온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두 개의 실팔찌를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아직 들고 있는 나머지 실팔찌를 보였다.
“연인이 없다고 하셨으니까, 서비스로 이 실팔찌를 대신 묶어드릴게요.”
‘서비스가 뭐지?’
신기한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어느새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왼 손목을 내밀었다.
낯선 사람의 접근에 평소에는 의심이 많던 아스테리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이름이 록시라고 했던가?’
아까 여자아이들이 소녀를 부르던 게 떠올랐다.
소녀의 손끝이 자신의 팔목에 닿자, 아스테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간질간질한 게 미칠 것 같았다. 심장 박동이 바로 귀 옆에서 울리는 것처럼 쿵쿵거렸다.
아스테리온의 상태를 소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롯이 제 할 일에만 집중했다.
소녀는 혹여 풀어질세라 꼼꼼하게 매듭을 마무리 짓고는 손을 떼어 냈다.
“다 됐다!”
아스테리온의 피부에 와 닿던 부드럽고 따스했던 온기가 금방 사라졌다.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소녀가 몸을 돌렸다.
“잠깐만.”
다급한 마음에 아스테리온이 소녀의 가는 손목을 잡아채듯 붙들었다.
“아야!”
너무 세게 붙잡는 바람에 소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눈물이 찔끔 차올랐다.
“아, 미안.”
아스테리온이 황급히 손을 놓아주었다.
아린 손목을 다른 손으로 어루만지며 소녀가 물었다.
“왜요?”
“그… 이름이 뭐야?”
“…….”
소녀가 빤히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겨우 코끝까지만 보였다.
“음, 다음에도 또 사려고… 실팔찌. 네가 수도에 다시 오면… 말이야. 이름을 알아야 행운의 실팔찌를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록사나예요. 다음에 언제 다시 팔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시 구매를 해 주신다면 그때는 잔돈도 넉넉하게 준비해 놓을게요. 그럼, 저는 이만.”
“한 가지만 더!”
“또 뭔데요?”
“몇 살이야?”
“열두 살이요. 이제 됐죠?”
나이까지 묻는 아스테리온을 소녀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아스테리온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녀가 등을 돌려 총총 걸어갔다.
작은 소녀의 움직임에 따라 묶지 않은 검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록사나…….”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스테리온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텅 비는 것 같았다.
* * *
한편, 록사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빛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달빛의 집’은 자그마한 보육원으로 록사나의 부모님이 후원하는 곳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1년에 한두 번씩 방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햇수로 8년째였다.
오늘 난생처음 길거리 장사를 경험해 본 록사나는 무척 신이 났다.
보육원 친구들과 같이 실팔찌를 만들고, 자신의 몫인 스물다섯 개를 혼자의 힘으로 다 팔았기 때문이다.
벌어들인 금액은 크지 않았지만 보육원 운영에 보탤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아. 원래는 20브론즈만 벌었을 텐데 1실버가 되었네! 5브론즈짜리 빵을 무려 스무 개나 살 수 있어!!’
치안이 좋은 수도라고 할지라도 어른도 없이 어린 여자아이들만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록사나에게는 정령의 힘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쉽게 허락해 주셨다.
아까 친구들끼리만 돌아갈 때도 혹시 몰라서 록사나는 샤일리에게 그들과 함께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하늘을 보니 해가 막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기온이 덩달아 낮아졌다. 차가워진 바람에 록사나가 발길을 더욱 재촉했다.
록사나의 눈앞에 보육원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누군가 ‘달빛의 집’의 현관문을 열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안나 언니!”
“어머, 록시. 이제 오니?”
“응! 나 실팔찌 다 팔았어!”
“진짜?! 정말 축하해! 록시도 장사에 소질이 있는 거 같아.”
“헤헤헤.”
안나의 열렬한 칭찬에 록사나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안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달빛의 집’에 와서 일을 도와주는 마음씨 고운 언니였다.
마음뿐만 아니라, 외향도 무척 아름다웠다.
올해 성년이 된 안나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화사하게 피어난 것 같았다.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는 그녀에게 우아함을 더해 주었다.
“언니, 지금 돌아가는 거야?”
“응.”
록사나가 급하게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찾더니 이내 손을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야.”
“행운의 실팔찌네!”
“응, 이건 언니 주려고 따로 만들었던 거야.”
실제로 록사나는 파는 것 외에도 선물용으로 실팔찌를 몇 개 더 만들었었다.
“고마워! 두 개씩이나 주다니, 완전 감동적이야.”
실팔찌 두 개를 안나가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하나는 언니 거고, 다른 하나는 언니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라고.”
안나의 청회색빛 눈동자가 작게 일렁거렸다.
남들은 미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이 팔찌가 정말 행운을 안겨 준다고 믿었다.
“그럴게. 정말 소중히 하고 다닐게.”
“응. 언니, 조심히 돌아가.”
“그래. 추우니까 너도 어서 들어가.”
이내 안나가 몸에 걸치고 있던 망토의 모자를 눌러썼다. 그녀의 적발은 어두운 거리에서도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록사나의 배웅을 받으며, 어두워진 거리로 안나가 발걸음을 옮겼다.
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록사나가 그제야 현관문을 열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 * *
검은 머리 소녀 록사나가 떠난 후에도 소년 아스테리온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대체 뭐 하느라고 이제 온 거야?”
“미안해, 아스.”
어두컴컴한 땅거미가 내려앉고 나서야 네이든이 평민 지구의 광장에 나타났다.
분수대 근처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아스테리온이 불만을 쏟아 냈지만, 네이든의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을 보고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아스테리온은 친구가 늦은 이유를 찾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나도 루나는 방금 전에 만났어. 내가 늦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네이든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아스 님.”
다른 여자들보다 키가 큰 편인 루나가 아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루나의 청회색 눈동자가 네이든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루나 님, 오랜만입니다.”
“아스 님께 못 미더울 수 있는 이든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루나가 꽃같이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람인 건 사실이었지만 아스테리온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루나의 말에 그러겠다는 듯 아스테리온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