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당장에라도 캠든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어떤 자격도 없었다.
자신은 리온 제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물과 권력, 무력을 가지고 있는 카일라니 공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도려낼 수밖에 없었다.
눈먼 칼날 하나가 족쇄가 되어 순식간에 그의 숨통과 모든 걸 끊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록사나를 지켜 주고자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혼을 선택했다.
이 모든 것은 록사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이 독단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아스테리온이 고뇌의 늪에서 간신히 자신의 의식을 건져 올렸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각은 캠든 영지에서 다시 록사나로 이어졌다.
이번에 캠든에서 벌어진 파파베르 사건은 단순한 처벌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한동안 리온 제국이 떠들썩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록사나를 자신의 적대 세력권 밖으로 벗어나게 하려던 그의 전략은 보란 듯이 실패하고 말았다.
파파베르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눈에 띄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 미치겠군.’
아스테리온의 심경이 점점 착잡해졌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들고 있던 서신이 구겨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스테리온이 집무 책상에 앉아 구겨진 서신을 조심스럽게 펴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님께’로 시작되는 전형적인 서두였지만, 록사나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 같았다.
【 겨우 딱 세 개 남았는데 】
12년 전인 제국력 889년 11월 중순, 리온 제국의 수도 케일라.
열다섯 살의 아스테리온이 상점가가 즐비한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망토 후드에 가려진 얼굴은 앳되었지만, 장신의 키와 검술로 단련된 몸 때문에 뒤에서 보면 소년은 다 자란 성인 같았다.
성큼성큼 걷는 소년의 발걸음이 어느 가게 앞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이 보석 가게의 문을 밀어젖히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문에 매달려 있던 작은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이 정중하게 소년을 맞이했다.
보석이 진열된 곳으로 다가선 아스테리온이 눈으로 전체를 쓱 훑어보았다.
눈썰미가 좋은 점원은 소년의 값비싼 옷차림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여기 진열된 것 외에도 더 아름다운 보석들이 안쪽에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내하게.”
“네!”
귀빈실에 들어간 아스테리온의 앞에 고품질의 보석들이 줄줄이 펼쳐졌다.
디자인을 세심하게 살피던 아스테리온이 그중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참으로 안목이 높으십니다.”
소년이 고른 것은 목걸이, 귀걸이, 반지로 구성된 귀금속 세트였다.
영롱한 빛의 최상급 다이아몬드와 얇은 화이트 골드 체인을 주재료로 한 고급스러우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어머니께 잘 어울리겠어.’
소년은 카일라니 공작가로 배송을 요청했다. 보석 가게를 나서며 아스테리온은 망토의 후드를 더 푹 눌러썼다.
이번에는 평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장으로 향했다. 소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식자재와 식료품 가게가 주로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호객 행위와 물건값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아스테리온은 그들을 지나치며 더 안쪽으로 나아갔다. 조금 구석진 그곳에는 좌판을 펼치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접 키운 농작물부터 먹거리, 각종 공예품과 장식품 등 개인들이 만든 물품들이나 중고 물품 등을 팔았다.
이곳에서도 호객 행위는 계속되었다.
“이보시오, 젊은 청년. 여기 한번 보고 가시구려. 오늘 신상이 나왔는데 애인이 아주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다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는 수제 소시지입니다. 어서들 오셔서 한번 드셔 보세요.”
노련한 장사꾼들 사이에는 어린 장사꾼들도 제법 있었다.
“싸다 싸, 한 개에 1브론즈! 세 개 사면 단돈 2브론즈! 행운의 실팔찌!! 한정 수량 100개! 오늘만 팔아요. 그러니까 어서들 사 가세요.”
어느 소녀의 우렁찬 목소리에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스테리온의 발걸음이 광장의 조그만 분수대 앞에서 멈춰 섰다.
서둘러서 왔건만, 만나기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스테리온은 너무 눈에 띄는 분수대에서 벗어나 구석져 보이는 건물 옆으로 비켜섰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
‘두고 보자, 이 녀석!’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친우를 벼르며, 아스테리온이 한숨을 삼켰다.
늦가을의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었고, 거리에는 슬슬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점점 늦어짐에도 아스테리온은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언니, 여기 예쁜 실팔찌 하나 보고 가세요. 행운의 실팔찌예요.”
“어머, 얘, 내가 지금 바쁘거든!”
아까 지나치며 들었던 소녀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저절로 아스테리온의 고개가 돌아갔다.
자그마한 소녀의 뒤통수가 아스테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한 여자에게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소녀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다시 길 가는 젊은 남자 하나를 붙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에게 행운을 선물해 보세요. 행운의 실팔찌가 세 개에 단돈 2브론즈예요. 이거 딱 세 개밖에 안 남았어요.”
“꼬마야, 미안. 우리 집사람은 은이나 금팔찌를 더 좋아한단다. 그리고 이걸 사다 주면 밥도 안 차려 줄 거야.”
“그럼 아저씨가 사서 아저씨 팔목에 하세요. 하나만 구매하시면 1브론즈예요. 행운의 실팔찌라 절대 손해 안 보실 거예요.”
당돌한 소녀의 영업에 남자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게… 있잖니? 이 실팔찌를 내가 하면 바람피운다고 아내가 의심할 거야.”
아스테리온은 잘 몰랐지만, 남자의 변명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안 되죠. 그냥 가셔도 돼요.”
“그래, 고맙구나. 남은 거 다 팔길 바라마.”
“감사해요.”
소녀가 떠나가는 남자를 향해 잘 아는 사람인 양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까지도 소녀는 아스테리온을 등지고 서 있었다.
“겨우 딱 세 개 남았는데…….”
기운이 빠지는 목소리로 소녀가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해가 점점 떨어지며 거리의 사람들도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었다.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늦가을의 날씨는 저녁이 될수록 더욱 쌀쌀해졌다.
추운지 소녀가 잔뜩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터벅터벅 걸었다.
소녀는 광장의 분수대 근처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아픈지 연신 작은 손으로 치마 아래 종아리를 조물조물 주물렀다.
그때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그 소녀에게 다가갔다.
“록시, 다 팔았어?”
“나 다 팔았어.”
“나도.”
언제 시무룩해졌냐는 듯 자신을 둘러싼 여자아이들에게 소녀가 활기차게 응답했다.
“더 늦기 전에 다 팔아서 다행이다! 나는 아직 세 개가 남았어. 이거만 팔면 나도 끝이야.”
소녀의 대답에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도 같이 팔게.”
“그래!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면 더 빨리 팔 수 있을 거야.”
“맞아, 록시. 그렇게 하자!”
친구들의 배려에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고마워. 린, 애나, 로즈마리!”
소녀가 팔을 뻗어 한 명씩 친구들을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얘들아, 정말 고마워. 너희들은 이미 나를 도와줬어. 봐봐, 너희들이 오니까 나 다시 이렇게 힘이 나!”
소녀가 주먹을 불끈 쥔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이 걱정스런 마음을 드러냈다.
“끝까지 내 힘으로 다 팔아 보고 싶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래?”
소녀의 부탁에 여자아이들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먼저 집에 가 있어. 나 금방 팔고 갈게. 그리고 너희들, 저녁 식사 준비도 거들어야 하잖아. 어서 가, 빨리~!”
소녀가 그들의 등을 밀며 재촉하자, 여자아이들이 마지못해 빨리 팔고 조심히 오라며 멀어져 갔다.
친구들에게 팔이 떨어져라 손을 흔들던 소녀가 광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 건물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소녀가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자의 눈이 점점 커졌다. 소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자신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서였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주변에는 자신뿐이었다. 저 소녀는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작은 소녀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저기요, 오빠?!”
소녀가 한껏 고개를 젖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남자의 턱 끝만 겨우 보였다.
남자, 아스테리온의 파란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석양이 내려앉았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반짝거렸다.
숲의 요정같이 앙증맞은 소녀의 얼굴이 아스테리온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두근!
아스테리온의 심장 박동이 이상 신호를 보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멀어져 가고 소년의 눈에는 오직 소녀만이 보였다.
“행운의 실팔찌 사세요. 팔에 하고 다니면 액운을 막아 주는 행운의 팔찌예요.”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저절로 소녀의 입술로 향했다. 앵두같이 자그마한 입술이 작은 참새처럼 조잘댔다.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빠가 안 할 거면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선물해도 좋아요.”
겨우 제정신을 차린 아스테리온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연인 같은 건 없다.”
“그렇군요. 그럼 가족들을 위해서 사는 건 어때요?”
에메랄드빛 커다란 눈망울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깊은 숲속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녀의 조잘대는 입술과 얼굴을 자신의 앞에 계속 붙잡아 두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얼만데?”
호객 행위를 하는 소녀를 지켜봤었기에 사실 그는 이미 정확한 가격을 알고 있었다.
“세 개에 2브론즈인데 연인이 없다고 하셨으니까, 한 개에 1브론즈예요.”
“세 개 다 사지.”
“네?”
“가족에게 주면 좋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신이 난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에게 실팔찌 세 개를 내밀었다.
아스테리온은 품에서 동전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1실버였다.
그것을 받아 들지 못한 록사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음……. 제가 거슬러 드릴 브론즈가 부족한데요. 사실 아주 많이 부족해요.”
“잔돈은 필요 없어.”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손에 1실버를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