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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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온이 서류를 들여다봤다. 로웰 후작이 대리인을 내세워 은밀히 운영 중인 불법 도박장의 위치를 파악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도박장 수익의 상당 부분이 황태자 도노반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정황도 확인했다.
아스테리온이 서랍에서 빈 종이를 하나 꺼내 글을 써 내려갔다. 익명으로 황실 감사원과 귀족원에 고발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서였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위 내용이 단 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안을 위해 특수 잉크로 작성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터지면 한동안 록사나에게 쏠릴 수 있는 도노반과 귀족파의 시선을 돌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의 굵직한 자금줄도 하나 더 끊어 내게 된다.
이 외에도 아스테리온은 요즘 그들의 사업 계약을 중간에 가로채거나 이익을 낼 수 없게끔 손을 쓰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록사나를 제 옆으로 데려오고 싶은 아스테리온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다소 걸리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방법을 택한 이유는 제대로 된 명분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모은 증거와 정보들만으로도 도노반 세력을 위험에 빠뜨리기에는 충분했지만, 그를 황태자 자리에서 확실히 끌어내리기에는 약간 불충분했다.
잠시 후 트레버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아스테리온이 밀봉한 명령서를 건넸다.
이를 받아 든 트레버 역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뭐지?”
트레버가 내민 것을 바라보며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트레버의 손에 들린 건 딱 봐도 서신이었다.
자신의 상사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트레버는 잘 알았다.
트레버는 한 번 말한 내용을 다시 읊었다.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님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
아스테리온의 매끈했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두 손을 깍지 끼자 양쪽 엄지손가락이 맞부딪쳤다.
그 모습을 신기해하는 트레버의 시선이 아스테리온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초조해하는 것은 또 처음 보네.’
이혼한 부인에게서 서신이 왔으니 놀랄 만도 하다고 트레버는 생각했다.
트레버의 장난기가 살짝 발동했다.
“그냥 태워 버릴까요?”
난로 쪽을 향해 그가 몸을 돌리자,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자동으로 따라왔다.
“잠깐.”
아스테리온이 트레버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의 눈은 여전히 트레버의 손에 들린 서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자신을 불러 세워 놓고는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주군을 트레버가 얄궂게 바라보았다.
트레버가 서신을 들어 올리자, 아스테리온의 눈이 따라 위로 들렸다.
“어떻게 할까요?”
쐐기를 박듯, 주군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이리 내.”
서신을 노려보던 아스테리온이 깍지를 풀고 한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트레버가 서신을 내밀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트레버는 서신의 한쪽 끄트머리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반대쪽 부분을 잡고 있는 아스테리온이 힘으로 잡아당긴다면 서신이 찢어질 수 있었다.
“저도 보여 주신다고 약속하시면 온전히 넘겨드리겠습니다.”
“죽고 싶어?”
“살고 싶습니다. 이 서신도 무사히 살아서 공작님 손에 들리고 싶을 겁니다.”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트레버가 서신을 자신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스테리온의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서신이 양쪽으로 팽팽해졌다.
“남의 사적인 서신에 양심도 없군.”
“사적인 서신은 아닐 겁니다. 가져온 심부름꾼이 캠든 영지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해서 전하는 거라고 했거든요.”
“무슨 일?”
“그건 저도 아직 모릅니다. 공작님도 모르시는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다. 그건 서신에 쓰여 있겠지요.”
록사나 아벨리오 곁에 그녀 모르게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놓은 음흉한 공작이었다.
그리고 트레버는 음흉한 공작의 명을 받아 시행한 장본인이었다.
서신의 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스테리온이 보고받지 못한 일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아스테리온의 반응이 날카로운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알았으니까, 내놔.”
아스테리온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
서신 내용을 보여 주겠다는 대답과 다름없었기에 트레버가 냉큼 손을 떼었다.
아스테리온이 서신을 펼쳐 읽는 동안, 트레버는 공작의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아래로 향할수록 단정한 그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졌다.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고 트레버는 생각했다.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트레버, 마지막 보고가 언제였지?”
“2주 전쯤 된 거 같은데요.”
록사나의 곁에 심어 놓은 정보원들의 최근 마지막 보고를 순식간에 떠올린 트레버가 바로 대답했다.
전령 새를 통해 받은 마지막 보고는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이 캠든에서 잘 적응하고 있으며, 막 영지 시찰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서신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아스테리온이 인상을 썼다.
“적어도 그 이후에 한 번은 더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요. 별일 없으면 앞으로 정기적으로 보고하지 않겠다고 지난 보고서에 적혀 있었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아스테리온이 모르고 그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트레버는 잘 알았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캠든 영지에 파파베르 가루가 흘러 들어갔어.”
심각한 얼굴로 침음을 내뱉으며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라고요?!”
트레버가 재빠르게 책상 위의 서신을 가져갔다.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아니,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 어이가 없군요.”
“그래.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캠든 영지에서 일어났어.”
이를 악물고 내뱉는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그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와 트레버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넉살 좋은 트레버라도 이번만큼은 아스테리온을 말릴 수가 없었다.
캠든 영지를 록사나에게 주기 위해 아스테리온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특히 오랜 시간을 들여 캠든 영지 내의 음지와 뒷골목 세력들을 구석구석 단속했었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무리들은 차근차근 철저하게 뿌리를 뽑아냈다.
캠든 영지가 록사나 아벨리오에게 넘어갔던 시점에서는 어두운 세력들이 말끔히 청소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쥐새끼들이 어느새 남몰래 숨어들었다.
검은 손을 뻗어 영지를 갉아먹고 있었다니.
아스테리온이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받을 만도 했다.
참으로 다행인 점은 파파베르 독으로 인한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록사나가 초기에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카일라니 공작의 제1 보좌관인 트레버의 안일했던 부주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캠든 영지를 살폈어야 했다.
“저의 불찰입니다.”
트레버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스테리온의 날카로운 기운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캠든 영지에서부터 수도까지 죄인들의 호송은 우리 쪽에서 맡는다. 우리 영지에도 이미 퍼지기 시작했을지 몰라.”
“물론입니다. 호송은 물론 레드포드 영지의 쥐새끼들도 바로 색출해 내겠습니다.”
아스테리온의 힘이 조금씩 거두어졌다.
트레버가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단번에 숨통이 트이자,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이 온전하게 힘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는데 힘겨웠다.
최근 자신이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바로 쓰러졌을 거라고 트레버는 생각했다.
트레버는 등줄기를 적신 식은땀을 추스를 새도 없이 서둘러 집무실을 떠났다.
한시라도 빨리 파파베르와 관련된 문제들을 처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남은 아스테리온이 창가로 다가갔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정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딘가 공허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낸 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록사나가 공작 성을 떠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아스테리온은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혼 서류를 내밀게 되면서부터 그에게 편안한 수면은 사치였다.
가슴 어딘가에 더 큰 구멍 하나가 생겨 버렸다.
거대한 물살에 둑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마음속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시시때때로 심장이 시리고,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 저려 왔다.
건강함을 드러내던 탄탄한 몸은 전체적으로 살이 내려 위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들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지만 아스테리온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버렸음을…….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눈과 귀와 온 신경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그 말이 거짓임을 아스테리온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록사나와의 끝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면서도 아스테리온의 마음은 은연중에 드러나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꼼꼼히 따져 가며 그녀에게 위자료로 건넬 캠든 영지를 준비했다. 무엇보다도 그곳의 치안을 강화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었다.
록사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는 그 나름대로의 강구책이었다. 그녀를 보호할 캠든 기사단과 고용인들의 신분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음 같아서는 풍요로운 영지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향기로운 꽃에는 온갖 벌레들이 꼬이니까.
록사나가 떠난 후로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힘들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며 그의 마음속을 채워 갔다.
한번 뚫려 버린 가슴은 시시때때로 헛헛해졌다.
‘싹 다 깨끗이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했어.’
그의 관심이 잠시 소홀해진 틈을 타서 심한 악취의 오물이 그녀의 영지에 튀어 버렸다.
록사나에게 정도 이상의 관심을 쏟으면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서 트레버에게만 맡겨 놓았었다.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부주의가 뼈아팠다.
낯선 영지에서 파파베르 사건을 겪으며 혼자 감당해야 했을 시간들이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