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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38)화 (38/214)

38화 

자이르는 차마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생각들을 속으로 거침없이 내뱉었다.

영주가 거의 자식뻘인 것도 모자라 여자라니, 배알이 뒤틀렸다.

그를 짜증스럽게 만든 일들은 오늘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캠든 성의 두 병사가 치안대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캠든 영지의 기사단 인장을 들이밀었다.

그러곤 기드온 경의 명이라며 치안대원들의 지원을 요구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자이르는 치안대원들을 이끌고 여관으로 향했다.

물론 그 두 병사인 마르셀, 헨리와 함께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이번에 노스에 방문한 상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허가 없이 장사를 했다는 게 체포 사유였다.

그 상인들을 통해 요즘 부가 수익도 얻고, 여러 면에서 재미를 보고 있던 자이르로서는 참으로 난감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새똥을 잔뜩 맞은 기분이었다.

치안대로 상인들을 끌고 오는 내내 그들의 원망과 따가운 시선을 그대로 받아 내야 했다.

감시처럼 따라붙은 마르셀과 헨리 때문에 상인들에게 제대로 상황 설명을 해 주기도 어려웠다.

금방 풀려날 거라는 짧은 말을 몰래 전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국 상인들은 모두 치안대 감옥에 구금되었다.

자이르는 한참 꼬여 버린 일들이 어서 풀리고, 도도한 저 계집이 자신의 눈에서 한시라도 빠르게 사라지길 바랐다.

록사나가 무거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자이르 대장.”

“…네, 영주님.”

영주의 부름보다 한 박자 늦게 자이르가 대답했다.

“내가 상인들을 왜 잡아들였는지 알아요?”

“허가 없이 장사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자이르의 얼굴에 얼핏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표정을 기민하게 잡아챘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요.”

자이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부대장 채드도 마찬가지였다.

“…뭡니까?”

상당히 건방진 말투였지만, 자이르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다.

자이르의 불손한 말투를 들은 기드온 경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바로잡지는 않았다. 록사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탁!

록사나가 작은 유리병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 든 물질이 흑갈색이어서 투명한 병도 얼핏 보면 같은 색으로 보였다.

이 병은 그녀가 중앙 광장에서 상인이 들고 있던 것이었다.

순간 자이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장 표정을 갈무리한 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뭡니까?”

“정말 몰라서 물어요? 치안대장인 자이르는 알 거 같아서 물어봤는데.”

그를 마주 보는 록사나의 짙은 녹안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 같았다.

자이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음, 흑설탕인 것 같군요.”

데구루루.

작은 유리병이 자이르 앞에서 멈추었다.

록사나가 굴려 보낸 것이었다.

“그럼 한번 먹어 봐요.”

“네?”

“열어서 맛보라고요.”

‘젠장!’

자이르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저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상인들을 잡아들이느라 지쳤을 텐데…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나요.”

“하하하. 저를 생각해 주시는 영주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정말 괜찮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록사나의 시선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래요.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지요.”

자이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이르는 거짓말을 잘 못 하네요.”

순간 자이르의 몸이 굳어졌다.

록사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치안대장의 집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물건을 손에 들어 올렸다.

그걸 들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자이르의 눈빛이 그녀의 손에 의해 옮겨진 담뱃대를 보는 순간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연한 록사나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자이르의 얼굴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침착해야 해!’

“아, 제가 가끔 담배를 피우는데 그게 영주님의 눈에 거슬리셨던 모양이군요. 영주님께서 오실 줄 알았더라면 미리 정리해 놓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참으로 뻔뻔한 대답이었다.

‘갈 데까지 가 보자 이건가?’

치안대장의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록사나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던 꼴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치안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몸 여기저기에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상이 늘면서 치료를 하다 보면 효과가 좋은 약초나 약물을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혹시나 자이르가 그렇게 파파베르 가루를 접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록사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추측은 빗나갔다.

저자는 파파베르의 유해한 독성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휙!

록사나가 담뱃대를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담뱃대를 자이르가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취미로 피우는 담배가 참 달았겠어요. 통증이나 고통도 잊게 해 주고, 기분도 좋게 해 주었을 테니까. 안 그런가요, 자이르 경?”

자이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담뱃대가 뚝 하고 부러졌다.

쿠당탕.

몸을 벌떡 일으키는 자이르에 의해 나무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자이르가 채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 기드온 경과 헨리가 그를 재빠르게 제압했다.

“아니, 이게 무슨……!”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채드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록사나와 자신의 상관인 자이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영주님. 이게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이르 대장님이 담배를 피우시는 건 사실입니다. 혹시 치안대에서 담배가 금지 품목입니까?”

평소라면 웃음이 빵 터질 만한 질문이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채드를 보며, 록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치안대의 두 우두머리가 모두 파파베르와 엮여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머리 아픈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노스의 안전과 치안을 생각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다.

적어도 우두머리들 중 한 사람만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한편, 그녀의 일행들도 치안대 집무실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록사나와 자이르의 대화가 지속되면서 이게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차츰차츰 깨달을 수 있었다.

파파베르 가루가 위험한 독성을 지닌 물질임을 사전에 록사나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자이르가 반항할 거라 예상하고 미리 대비했다.

덕분에 빠르게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자이르는 포박된 채 록사나의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까지도 채드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 같았다.

성격이 좀 불같고 말투가 좀 거칠기는 하지만, 나름 성실했던 자이르 대장이었다.

채드는 그런 그를 위해 지금 변명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이르가 용서받기 힘든 큰 죄를 저질렀다고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채드의 궁금증은 이어지는 영주의 말에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믿었던 사람이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자이르, 당신은 이 파파베르 가루가 독성이 무척 강한 위험 물질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느새, 록사나의 손에 파파베르 유리병이 다시 들려 있었다.

그 난리 속에서도 충격에 약한 유리병은 용케 깨지지 않았다.

록사나는 치안대장 집무실에 들어섰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내가 여기에 들어선 순간 책상 위에 놓인 당신의 담뱃대가 가장 눈에 띄더군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담뱃대와 그 주변에 흑갈색 가루들이 떨어져 있었죠.”

말을 하는 록사나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상황이 참 교묘하더군요. 허가 없이 파파베르 가루를 파는 상인과 파파베르를 피우는 치안대장이라……. 감이 딱 오지 않나요?”

‘치안대장이라는 자가 어찌!’

록사나의 말을 듣는 기드온 경과 다른 일행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이럴 수가! 자이르 대장, 당신을 믿었었는데……. 담배가 아니라 파파베르였다고?!’

채드는 그게 사실이냐고 자이르 대장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진실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큰 규모의 상단일수록 머무는 영지의 법규를 잘 준수하기 마련인데, 노스에 온 상단들은 그렇지 않았죠. 뭘 믿고 그들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는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겠죠. 당신과 촌장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일일 테니까요.”

채드의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뚝 끊겼다.

“더군다나 촌장이 당신 형이니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이미 당신은 파파베르에 상당히 의지하는 거 같은데……. 그들이 평생 동안 당신에게 파파베르 가루와 치료제를 제공해 준다고 했나요?”

록사나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다.

“아니지. 그것뿐만 아니라 재물이나 노스에서 나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약속했을 테죠. 사람들이 하나둘 파파베르 독성에 노출되면 치료제를 계속 찾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씩씩거리던 자이르의 얼굴이 시시각각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록사나가 추측한 내용들이 그가 한 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록사나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거 아나요? 사실 파파베르 독성에 대한 치료제는 없어요. 일시적으로 고통을 없애 주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성이 생겨 독에 대한 통증이 더욱 극심해지죠. 결국 그 치료제도 독이에요.”

“거짓말!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자이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파파베르의 독이 몸에 쌓인다 싶을 때, 치료제를 복용했다. 그러면 씻은 듯이 통증이 가라앉곤 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당신이 몸소 느끼며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쉽군요.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독에 당하지 않게 지금이라도 적발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죠.”

“대장, 당신이 어떻게!!”

울분과 배신감을 이기지 못한 채드가 분노했다.

당장에라도 그의 얼굴을 갈기려고 했지만, 헨리와 마르셀이 재빠르게 팔을 붙잡았다.

채드를 치안대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자이르였다.

늘 따랐고 신뢰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로 인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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