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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37)화 (37/214)

37화 

이야기를 나누는 영지민들의 곁을 록사나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 쪽을 바라보니 남자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허연 입김을 허공에 내뿜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들 한곳에 쏠려 있었다.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다 보니 물건 같은 건 록사나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장사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어서들 오세요. 많지는 않지만, 저희 상단에서 취급하는 품목들을 일부 풀려고 합니다. 여기 이 물건은…….”

물건에 대한 장황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록사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조금 더 앞쪽으로 향했다. 아이린과 일행들도 그 뒤를 따랐다.

좌판에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목걸이와 머리핀 등의 여성용 장신구와 신발, 카펫 같은 실용적인 물품들이 가장 많았다.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알록달록한 사탕 종류와 다양한 찻잎을 담은 통들도 눈에 띄었다.

“여기 보십시오. 제가 오늘 여러분께 소개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장사꾼이 엄지와 검지로 받쳐 든 작은 유리병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유리병은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큼 작아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흑갈색의 물질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여기저기 아플 때 이것을 담배처럼 피우면 금방 싹 낫게 해 주는 약초로 만든 것입니다. 이걸 한번 써 본 사람은 계속 찾아 쓰게 되지요.”

중간쯤에 자리하게 된 록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약병을 바라보는 록사나의 눈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그것을 정확하게 확인하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었기에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록사나가 슬그머니 상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내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바람 한 줄기가 상인이 들고 있는 약병을 향해 나아갔다.

무언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그저 바람이 부는 걸로 착각했다.

그 바람 줄기의 형체는 오직 록사나의 눈에만 보였다.

푸른빛의 바람 줄기가 약병에 닿은 것을 본 록사나가 그것을 뚫어져라 보았다.

“아직은 못 믿으시겠지요. 그럼 여기에서 바로 효과를 보여드릴 수밖에요. 몸이 많이 아프신 분이 있다면 손을 번쩍 들어 주세요. 한 분을 선택해서 그분께는 돈을 안 받고, 이 신비의 약초를 조금 드리지요.”

사람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구경하는 군중들 속에서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

장사꾼이 그들을 둘러보더니 한 명씩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약병을 감싼 채 변화가 없었다.

록사나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어!’

그때였다.

한참 동안 변화가 없던 푸른빛이 조금씩 흐려지며 회색빛으로 변하다가 점점 검은빛을 띠었다. 완전한 검은빛이 되자, 폭발하듯 발했다.

‘저건!’

록사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기드온 경.”

록사나는 숨길 수 없는 무거운 목소리로 기사단장을 불렀다.

그녀의 시선은 약초가 든 유리병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드온 경이 바로 록사나의 옆에 자리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하명하십시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기드온 경이 신중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기드온 경에게 속삭이는 록사나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장사꾼들을 잡아들이세요. 저자가 들고 있는 건 독초인 파파베르입니다.”

록사나의 지시를 받는 기드온 경의 표정 또한 심각해졌다.

“그리고 바로 치안대를 호출해서 저자의 일행인 상단 사람들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들여요. 그들이 가진 물품 또한 모조리 압류해야 합니다. 죄목은 영주의 허락 없이 상행위를 한 것으로 하지요.”

진짜 죄목은 숨기라는 의미였다.

“명을 받듭니다.”

기드온 경이 고개를 돌려 헨리와 마르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사람은 지금 당장 치안대에 가서 그들을 이끌고 상단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물품도 빠짐없이 모조리 압수해 모두 치안대로 호송하도록 하고. 난 이곳을 정리한 후에 바로 치안대로 가겠다.”

장사꾼이 파는 것이 독성이 있는 파파베르 약초로 만든 거라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헨리와 마르셀이 재빠르게 군중 속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장사꾼은 손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한 남자를 꼭 집어 선택했다.

얼마 전 일을 하다 팔을 심하게 다쳤는데 통증이 심하다는 한 남자였다.

앞쪽으로 오라고 장사꾼이 남자를 불러내었다.

남자가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은 부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기드온 경도 앞쪽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큰 체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눈에 부각되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드온 경을 발견한 장사꾼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당신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나오는 거요?”

“이렇게 하려고.”

장사꾼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유리병은 순식간에 기드온 경의 손에 넘어갔다.

“아니, 이런 날강도 같으…….”

기드온 경의 손날이 순식간에 장사꾼의 목을 내리쳤다.

장사꾼의 몸이 땅바닥으로 고꾸라져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드온 경이 바로 몸을 돌렸다.

그는 장사꾼을 거들기 위에 옆에 있던 두 명도 한순간에 제압해 버렸다.

물론 그들도 기절을 면치 못했다.

“아니, 이게 무슨?!”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사꾼의 부름을 받아 앞으로 나온 남자와 구경꾼들은 몹시 놀랐다. 굳어졌던 그들의 몸이 서서히 풀리며,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거구의 남자는 기절시킨 사람들을 그자들이 가지고 있던 끈으로 꽁꽁 묶어 버렸다.

남자의 덩치와 무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덜컥 겁이 났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너도나도 우왕좌왕했다.

그 거구의 남자, 기드온 경이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나는 캠든 영지의 기사단장 기드온 시오마라입니다. 지금 이들은 영주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멋대로 장사를 벌였습니다. 영지의 법을 어긴 것은 물론이요, 우리 영지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치안대로 연행될 겁니다.”

영지의 기사단장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 기절시키는 건 좀…….”

체포하는 과정이 과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드온 경의 신분을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당신이 우리 영지의 기사단장인 게 진짜 맞소?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한 남자의 지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새로 왔다는 기사단장의 얼굴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드온 경을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드온 경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치안대 사람이나 촌장이 증명해 줄 겁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누군가 저 멀리서 소리쳤다.

“기드온 경!”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노스의 치안대 부대장인 채드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채드의 뒤로는 세 명의 치안대원들이 뒤따랐다.

“하아, 하, 오랜만입니다. 노스에는, 하아, 언제 오신 겁니까? 그리고 오셨으면 치안대부터 들르시지……. 후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채드가 기드온 경의 앞에 섰다.

그의 눈에 기절한 채 손이 묶인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이미 체포하셨군요.”

“채드, 이자들을 치안대로 호송하고, 물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압수하도록 하게.”

“네.”

기드온 경의 지시에 따라 중앙 광장에 펼쳐져 있던 좌판이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를 의심했던 사람들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흠흠.”

“허허, 기사단장님이 맞았구먼.”

“그러게.”

“난 의심하지 않았네.”

사람들이 떠드는 가운데 그 속에 섞여 있던 록사나와 아이린이 무리 밖으로 빠져나와 걸었다.

“록시 님, 뭔가 다른 큰 문제가 생긴 거죠?”

아이린이 물었다. 록사나의 옆에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장사꾼이 팔던 병을 바라보며 기겁하는 록사나의 표정을 통해 심각한 일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었다.

“저자들이 팔려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치료제 아닌가요?”

여기저기 아플 때 사용한다는 장사꾼의 말을 떠올린 아이린이 대답했다.

“치료제라……. 장사치가 그랬지. 한번 써 본 사람은 계속 찾게 된다고 말이야. 저건 치료제라기보다는 독초야.”

“네? 뭐라고요?”

“파파베르가 통증을 줄여 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주 위험한 약초야. 덜 익은 씨앗을 가공해서 만든 저것을 오래 사용하면 안 좋아. 차츰 몸에 쌓여 사람을 순식간에 폐인으로 만들어 버리지.”

“맙소사. 설마 그럼……?”

“그래, 저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팔려고 한 거지.”

“영주님은 저걸 대체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아이린은 작은 병에 담겨 있는 걸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챈 록사나가 놀라웠다.

“장기간 파파베르를 사용한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때 파파베르로 가공한 것도 봤었고. 보통은 냄새나 맛을 봐야 알아볼 수 있겠지만, 알잖니. 내게는 그 힘이 있어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었어.”

“아! 그랬군요.”

아이린은 정령의 힘을 말하는 것임을 재빠르게 눈치챘다.

‘정령사는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완전 멋지다!’

그녀는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죄인들을 호송하는 기드온 경과 치안대의 뒤를 록사나와 아이린이 따라서 걸어갔다.

* * *

노스의 치안대장 자이르와 부대장 채드, 기드온 경과 마르셀, 헨리, 아이린이 치안대장의 집무실에 모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했다.

사십 대에 접어든 자이르가 상석을 바라보았다.

영주인 록사나 아벨리오가 자이르가 항상 앉아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청초한 모습은 묘하게도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여자는 투박한 사무실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이르는 지금 이 상황들이 무척 못마땅했다.

아무리 영주라지만 록사나가 눈에 매우 거슬렸다.

‘안전한 성에서 편안하게 나자빠져 있을 것이지……. 쯧쯧. 어린 계집이 낄 데 안 낄 데도 구분을 못 하니 원. 하긴, 제까짓 게 뭘 알겠어. 영주입네 하고 폼 한번 재 보고 싶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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