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다들 배불리 저녁을 먹고, 허브차를 한 잔씩 마셨다. 소화를 시키기에 딱 좋았다.
리나는 어른들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부르게 먹고, 집 안이 따뜻하니 더 졸음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자신의 다리에 딸의 머리를 뉘였다.
어느새, 리나는 엄마의 다리를 베개 삼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나디아, 요리사로 일해 볼 생각 없어요?”
록사나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말을 툭 내뱉었다.
“요리사요? 저야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는 하지만… 요리는 이런 기본적인 것만 할 줄 알아요. 고급 요리는 배울 기회도, 접해 볼 기회도 없었거든요.”
나디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기본 요리가 제일 어려운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다른 요리들도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정말 잘할 거 같아요.”
“저도 요리를 좋아해서 예전에는 식당에 자리를 알아보았어요. 그런데 다양한 요리를 할 줄 모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때를 회상하며 나디아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은 여관에 손이 필요할 때마다 가서 거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주로 방 청소 같은 잡일과 주방 보조를 해요. 별다른 경력도 없는 저를 누가 요리사로 써 주겠어요…….”
“그럼, 이번에 영주 성에서 고용인들을 뽑는 공고문이 붙은 거 알아요? 거기 주방에 지원해 보는 게 어때요?”
“저도 그 공고문은 봤어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그런데 성에서 일하게 되면 리나와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 하잖아요. 돈이야 훨씬 많이 벌겠지만…….”
나디아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가족이라고는 이 세상에 우리 단둘뿐인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제가 일을 나가면 리나 혼자 있게 해서 늘 미안한걸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영주 성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어요.”
“록시 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공고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는데요.”
“제가 영주님을 잘 알거든요.”
“진짜요?”
록사나의 말에 나디아가 놀랐다.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는 록사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얘기해 주는 걸 보니 영주님과 무척 친한 사이인 모양이라고 나디아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원해요.”
나디아의 거친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은 록사나가 그녀를 재촉했다.
“나디아 님, 뭘 망설여요. 여기보다는 성에서 사는 게 리나에게도 훨씬 좋아요. 급여도 높고요.”
옆에서 아이린이 거들었다.
“그럼 한번 지원해 볼까 봐요. 뽑힐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디아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진짜 지원할 거죠?”
록사나가 강렬한 눈빛으로 나디아를 마주 보았다.
“그… 지원하러 가야죠?”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나디아가 대답했다.
“나디아, 지원하러 갈 필요 없어요. 지금 채용됐으니까요.”
“네?”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록사나의 태도에 나디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미 채용되었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큭큭큭.”
옆에서 아이린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의 상관이 벌인 이 상황이 꽤 재미있었다.
“내가 나디아를 영주 성 요리사로 이 자리에서 채용한 거예요.”
“…….”
나디아는 아직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영주 성에 오게 되면 알게 될 사실이었다. 록사나는 자신이 영주임을 이 자리에서 밝힐 생각이었다.
“나디아, 나는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캠든의 영주죠.”
나디아의 눈이 서서히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여… 영, 영주님…요?! 어떻게?”
“진짜 영주님 맞아요.”
“맞습니다.”
아이린에 이어, 난로의 불을 살피던 기드온이 증언을 해 주었다.
“속이거나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지금은 영지 시찰을 다니는 중이라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다니고 있어요.”
“영…주님.”
어느새, 감정이 벅차오른 나디아의 은회색 눈동자에 맑은 물기가 차올랐다.
나디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오늘 록사나 일행을 만난 일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정기적인 일자리까지 생겼다.
그것도 캠든 영지에서 급여가 가장 높고 안전한 영주 성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디아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손수건을 꺼내 든 록사나가 그녀의 얼굴을 정성 들여 닦아 주었다.
“엄마……?”
나디아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리나가 눈을 비볐다.
갑자기 엄마가 울고 있으니 리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엄마, 왜 울어?”
덩달아 리나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나디아가 팔을 뻗어 딸을 꼭 끌어안았다.
“좋아서. 엄마한테… 엄청 좋은 일이 생겨서 그래.”
“좋은 일?”
코를 훌쩍이며 나디아가 울음을 그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눈물이 더 났다.
“울지 말아요.”
록사나는 아예 손수건을 나디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겨우 마음이 진정이 된 나디아는 기드온 경을 비롯해 록사나 일행을 정식으로 소개받았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도 록사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록사나 일행이 노스로 떠나 웨스트로 향하면 나디아는 지금 집을 빠르게 정리하기로 했다.
세를 놓을지 팔지 고민하는 나디아에게 세를 놓으라고 록사나가 조언을 해 주었다.
앞으로 변화될 노스를 고려했을 때 그게 나디아에게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부동산 투자 개념이었다.
모든 정리가 끝나면 나디아가 딸 리나와 함께 캠든 성으로 먼저 떠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자정이 되어서야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록사나가 눈을 떴다. 밤새도록 피운 난로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이불 밖으로 나가기를 잠시 망설였다.
잠에서 깬 록사나를 발견한 리나가 쪼르르 다가왔다.
“영주님은 잠꾸러기예요.”
“리나!”
나디아가 기겁하며 리나를 불렀다. 아이가 버릇없어 보일까 봐 걱정이었다.
“맞아.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네.”
록사나가 대수롭지 않게 리나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제야 나디아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영주님.”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리나가 버릇없게 군 것도 아닌데.”
기지개를 쭉 켜던 록사나가 쭈뼛거리고 서 있는 리나를 끌어당겨 품에 꼬옥 안았다.
“꺄악.”
록사나의 장난스런 포옹에 리나가 즐거운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록사나는 그대로 이불 위를 한 바퀴 굴렀다.
“까르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아침을 활기차게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록시 님.”
어느새 따뜻하게 데운 물을 준비한 아이린이 그들 옆으로 다가왔다.
“고마워, 아이린.”
“뭘요. 제 일인 걸요.”
세숫물에 손을 담그려던 록사나가 멈칫했다.
“리나, 너는 세수했니?”
“아니요!”
리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이린, 수건 좀.”
아이린이 건넨 수건을 록사나가 가져갔다.
록사나는 물에 수건을 적셔 꾹 짰다.
그러곤 리나를 자신의 앞에 앉혀서 수건으로 얼굴을 살살 닦아 주었다.
따뜻하게 적셔진 수건이 자신의 얼굴에 닿자, 리나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엄청 따뜻해.’
추운 겨울날에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세수를 자주 건너뛰는 리나였다.
따뜻하게 세수할 수 있는 이런 방법을 진작 알았더라면 더 자주 했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영주님도 참.”
못 말린다는 듯 아이린이 가볍게 웃었다.
“자, 다 됐다.”
“고맙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리나의 머리를 록사나가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음식을 준비하며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나디아의 눈빛이 따스하게 물들어 갔다.
록사나는 이를 보지 못했다.
다시 물을 떠 오려고 아이린이 세숫대야를 붙잡았다. 그러자 록사나가 그녀를 말렸다.
“아직 깨끗한 물인데 놔둬.”
“하지만…….”
록사나가 다른 수건을 하나 더 건네받았다.
수건에 물을 적셔 짠 후, 이번에는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제가 다시 준비해 오면 되는데요.”
“뭐 하러 번거롭게 그래.”
록사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수도 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 물 한 동이 떠 나르는 것도 일이었지만 물 자체도 귀하게 취급되었다.
바깥에 나와서도 영주 성에서 하던 것처럼 챙겨서 하다 보면 끝도 없고, 아랫사람만 고생이었다.
환경이 다른 곳에서는 상황에 맞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록사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이런 곳에 머물 때는 늘 한 대야의 물로 세 사람이 함께 세수를 해결했었다.
삐걱, 덜컹.
현관문이 열리고, 기드온 경이 들어섰다. 그 뒤를 커다란 물통을 든 헨리와 장작 무더기를 한 아름 든 마르셀이 뒤따랐다.
“어머, 두 분 정말 감사해요.”
헨리와 마르셀에게 나디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디아는 손님인 그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어서 무척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기도 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어제저녁에 해 주신 맛있는 음식에 대한 보답입니다.”
커다란 양동이에 물을 쏟아붓는 헨리와 난로 옆에 장작을 내려놓은 마르셀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두 사람은 록사나나 기드온 경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나디아를 도울 줄 알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집 안을 채웠다.
나디아는 아침 식사 때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역시 나디아는 엄청난 실력자야.’
자신의 눈이 정확했음을 록사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 * *
든든하게 속을 채운 록사나 일행이 이른 오전에 나디아의 집을 나서 마을 중심가로 향했다.
중앙 광장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발걸음은 대부분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광장에 가는가?”
“자네도?”
“그렇다네. 이런 큰 규모의 상단이 우리 마을을 지나는 건 흔치 않으니까 말일세.”
“맞는 말이네. 그래서 나도 구경 삼아 한번 나와 봤네.”
“볼 만한 게 이것저것 많다고 하더군.”
“그래? 간만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어.”
“괜찮은 가격의 물건이 있으면 울 마누라한테도 하나 사 줘야겠어. 요즘 바가지가 어찌나 심한지 내 고생이 말이 아닐세.”
“허허, 이 사람 보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구먼. 가족한테 뭐 하나라도 사 줄 수 있는 자네가 부러우이. 난 이번 벌이가 시원찮아서 우리 아들 녀석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 하나 사 주기도 힘들어.”
“다들 그렇지 뭐. 영주님이 새로 오셨으니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그랬으면 더 바랄 것이 없네. 나는 이렇게 없이 살아도 우리 자식들은 번듯하게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네.”
“나도 그렇구먼. 자, 서두르세. 언제 사람들이 저리 많이 나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