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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35)화 (35/214)

35화 

나디아가 받은 총 금액은 30실버였다.

인당 1실버씩 계산된 다섯 명의 숙박비 15실버에 아침저녁 식사비로 책정된 15실버를 더한 금액이었다.

보통 여관에서는 숙박비 1실버에 한 끼의 식사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록사나 일행은 자신들이 좀 많이 먹는 편이라며 식사비를 따로 계산해 주었다.

여관보다 안 좋은 집에서 30실버를 벌게 된 건 기적에 가까웠다.

겨울철인 요즘은 일이 너무 없었다. 어쩌다 하루라도 일이 생기는 날이면 어린 딸 리나를 집에 홀로 남겨 두고 나가야 했다.

나디아는 몸이 부서져라 늦은 시간까지 일했지만 한 달에 20실버를 겨우 벌까 말까였다.

불규칙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도 한몫했다.

‘오늘도 하루 벌이로 일을 나갔던 터라 내일부터는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어야 했는데…….’

록사나 일행이 처음 숙박을 청했을 때 바로 수락하지 못한 건 오히려 역으로 화를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린 딸하고 단둘이만 사는 나디아에게는 힘이 없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가서 마음에 안 든다고 돈을 다시 내놓으라고 행패라도 부린다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의 집에 머물지 못해도 그들의 행색으로 봤을 때 더 좋은 집에서 흔쾌히 받아 줄 것 같았다.

지금은 이 행운을 놓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디아가 했던 우려와는 다르게 록사나 일행은 정중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기다리다가 허기가 져서 먹을 것을 좀 샀는데 너무 많이 사 버렸다며 빵과 식재료를 나디아에게 잔뜩 안겨 주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배가 고프니 저녁 식사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받은 식재료는 내일 저녁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집에 남아 있는 재료들은 전부 긁어모아도 오늘 밤 빵과 묽은 수프로 겨우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였다.

만약 이 식재료들을 받지 못했었다면 지금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아 가며 밖을 헤매고 있었을 거다.

게다가 지금은 가게들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빌려 달라고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만에 제대로 해 보는 요리인지 모르겠다.

어느덧, 나디아의 옆으로 아이린이 다가와 재료 손질을 거들었다.

한편 마르셀과 헨리는 무언가를 열심히 다락방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들이 깔거나 덮고 잘 짚을 넣은 매트와 이불이었다.

집주인을 기다리며 록사나는 그들에게 식료품과 매트, 이불, 땔감 등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었다. 침구 등이 부족할 거라는 걸 예상한 록사나의 조치였다.

기드온 경은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주홍빛 불이 활활 타오르며 집 안의 공기를 훈훈하게 데워 갔다.

남은 땔감은 난로 옆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밤새도록 때워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골목길이 좁아 마차가 이 집 앞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마차와 말은 큰길 쪽에 있는 집에 돈을 주고 3일 동안 돌보는 걸 맡겨 놓았다.

록사나는 따뜻한 난로 앞에서 리나와 놀고 있었다. 리나는 올해 일곱 살이라고 했다. 또래에 비해 작은 몸짓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말해 주었다.

직접 물어보지 않았지만, 엄마와만 단둘이 산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나디아와 달리 리나의 파란색 눈은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엄마가 일 가시면 그럼 계속 리나 혼자 집에 있는 거야? 심심하겠다.”

“네. 가끔 옆집 토미랑 안젤라하고 놀기도 해요.”

록사나의 질문에 리나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잔뜩 털을 세우며 경계하는 아기 고양이 같던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구김 없는 모습을 보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티가 났다.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 아니에요.”

“응?”

“자기들이 내킬 때만 끼워 주는걸요.”

“음……. 그렇구나.”

“나보고 아빠 없는 아이라고 막 놀려요. 못됐어!”

목소리가 높아졌던 리나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후다닥 막았다.

그러고는 엄마 나디아가 있는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엄마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록사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어딜 가나 가정 환경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게 아이일지라도 말이다.

“이상하네. 아빠가 없었으면 리나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텐데.”

“맞아요!”

분한 듯 씩씩거리던 아이의 표정이 금방 풀어졌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아빠도 엄마도 없는걸. 사고로 돌아가셨거든…….”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나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어른도 엄마, 아빠가 없을 수 있구나!

엄마 아빠가 없는 어른이라니, 생각하지도 못했다.

큰 깨달음을 얻은 리나의 표정이 화악 밝아졌다.

아이들이 놀릴 때면 내심 아빠 있는 아이들이 부러우면서도 화가 났었다.

‘이제는 나도 아이들을 놀릴 수 있어. 너희 엄마도 아빠가 없잖아, 라고 하면 되잖아!’

사실이었다. 토미에게는 외할아버지가 안 계셨다.

물론 리나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조부모님이 한 분도 안 계셨지만 아무렴 어떤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온 집 안에 진동했다.

“이제 거의 다 되었어요. 그릇에 담아 내가기만 하면 돼요.”

나디아의 말에 록사나와 리나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배가 몹시 고팠던 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까 밖에서 빵을 좀 뜯어 먹기는 했었지만 허기만 겨우 달래는 수준이었었다.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마르셀과 헨리가 내왔다.

이 집에는 식탁이 없었기에 난로 앞쪽 바닥에 음식이 놓였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와아~!”

리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드러워 보이는 눈처럼 하얀 빵과 달콤한 잼, 빵에 얹어 먹을 수 있는 치즈,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따끈한 수프, 한겨울에는 보기 힘든 알록달록하고 신선한 샐러드, 두툼하게 익힌 고기 요리까지 완전 진수성찬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에 리나의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특히 평소에 맛보기 어려웠던 고기를 본 리나의 파란 눈은 파도치듯 마구 흔들렸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자, 우리 어서 먹어요. 배고프네요.”

록사나가 스푼을 들어 수프를 맛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각자의 스푼과 포크를 들었다.

“정말 맛있어요!”

그녀가 지금까지 먹어 본 감자 수프 중 제일 맛있었다.

공작 부인으로 지낼 때 일류 요리사들의 온갖 산해진미를 맛본 그녀였다.

그들의 요리도 정말 맛있었지만 나디아의 요리는 조금 더 특별했다.

적절하게 간이 된 감자 수프는 원재료의 맛을 제대로 살리면서 풍미가 넘쳤다.

물론 여기에 크림을 넣으면 부드러움과 고소함을 더욱 배가시켜 줄 테지만, 그게 아쉽지 않을 만큼 맛이 뛰어났다. 꼭 고향의 맛이 깃든 시골 요리 같았다.

“엄마, 너무 맛있어!”

“저희 어머니도 한 요리 하시는데 진짜 맛있습니다.”

“감자 수프가 정말 맛있는 거였군요.”

“레시피를 알고 싶군요. 저희 집사람한테도 알려 주게요.”

리나와 마르셀을 시작으로 기드온 경까지 한마디씩 칭찬을 하자, 긴장했던 나디아의 얼굴이 확 풀렸다.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해요. 우유를 넣었더니 더 맛있게 끓여진 것 같아요.”

“우유를 넣어서 이런 맛이 나는 거라면 제 집사람은 지금쯤 일류 요리사가 되었을 겁니다.”

아내의 요리 실력을 떠올린 기드온 경이 말했다.

그의 아내가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독특한 맛을 선보일 때가 자주 있었다.

당연히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정성이 담긴 요리를 아주 맛있게 먹는 남자였다.

“이런 맛있는 요리를 해 주신 나디아 씨께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헨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 그들의 본격적인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음식들도 맛본 사람들이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말을 하면서도 사람들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다양한 재료를 다뤄 볼 일이 많지 않았을 텐데…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할까?’

연신 감탄하며 식사를 하던 록사나의 눈에 두 모녀의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음식을 가운데에 놓아두고 다들 덜어 먹고 있었다.

나디아와 리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의 그릇에는 고기의 흔적이 없었다.

리나는 다른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연신 고기가 담긴 그릇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딸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면서도 어떤 내색도 하지를 못했다.

왜 그런지 알 만했다. 록사나가 제공한 식재료이다 보니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두툼한 고기를 집어 든 록사나가 리나의 그릇에 턱 하니 얹어 주었다.

이어서 나디아의 그릇에도 똑같이 담아 주었다.

눈이 대번에 커진 두 모녀가 고기가 담긴 자신들의 그릇과 록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왜들 안 먹어요?”

그러고는 두 덩어리의 고기를 더 얹어 주었다.

어느새 두 모녀의 그릇에는 각각 세 덩이의 고기가 놓여 있었다.

“남으면 버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최소한 그 정도는 먹어야 해요. 이건 의무예요. 부족하면 더 먹고요.”

이 추운 겨울에 음식이 상해 버릴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록사나는 두 모녀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네!”

힘차게 대답한 리나가 육즙이 좔좔 흐르는 고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흐물흐물 풀어진 표정이 아이의 기분을 대변해 주었다.

딸을 바라보던 나디아의 눈에 순간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누가 볼세라 앞치마로 얼른 눈물을 훔쳐 내고는 록사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록사나의 배려에 대한 나디아 나름대로의 감사 표현이었다.

낯간지러운 느낌이 든 록사나가 고기를 한 입 먹기 전에 나디아에게 말했다.

“얼른 먹어요. 식으면 맛없어요.”

“네.”

“맞아요, 나디아 님. 어서 빨리 드세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이 고기 요리도 완전 맛있어요.”

그녀의 요리를 직접 옆에서 지켜본 아이린이었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쩜 이런 맛을 낼 수 있을까 신기했다.

나디아가 고기를 베어 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였다. 맛있는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 남편이 떠올랐다.

‘그 사람 마지막 가는 길에 고기 한 번 제대로 먹여 주지 못했는데……. 아, 이 좋은 날 무슨 청승이람.’

코가 시큰거리자,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입으로 야무지게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내겐 우리들의 보물 리나가 있잖아. 열심히 살다 보면 이런 행운이 따르는 날도 있고……. 힘들어도 더 성실하게 살자.’

기운을 차린 나디아의 포크질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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