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잠시간의 망중한을 즐긴 록사나 일행은 서둘러 노스 영지로 향했다.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록사나와 아이린의 대화가 이어졌다. 마차가 다니는 길이 울퉁불퉁해서 그들의 몸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흔들렸다.
“주택 정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면 도로와 수로 정비도 같이 진행해야겠어.”
“대규모 공사가 될 테니 사람들이 많이 몰리겠네요. 농사철이 돼도 다들 공사 현장으로 몰리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영지의 낮은 작물 생산량이 더 떨어질까 염려가 되는 아이린이었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아이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면 되니까.”
“어떻게요?”
“농부에게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지. 농사를 지어도 공사 현장에서 버는 돈만큼을 벌 수 있다면 굳이 공사 현장에서 일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혹시 그 기회가 농사짓는 거랑 관련이 있어요?”
“눈치가 좋은데! 맞아. 몇 가지 식물들을 선별해서 캠든 영지 곳곳에 심은 뒤 키워 볼 거야. 일종의 특산품 작물 개발 실험이라고나 할까.”
“그렇군요. 농작물로 우리 영지만의 특산품이 있으면 타 영지에 판매하기 수월할 거 같아요. 물론 그만큼 수확량이 많아야 하니 그 문제도 신경 써야겠어요.”
“그래.”
록사나가 손을 뻗어 기특한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이 어릴 적 부모님이 자주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늘 기분이 좋았더랬다. 지금 아이린의 표정처럼 말이다.
“헤헤헤.”
흐물흐물 풀어진 표정이 꼭 귀여운 아기 고양이 같았다.
* * *
노스의 중심에 들어서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마차를 타고 왔다면 정오가 조금 지나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록사나는 마차에서 내려 주변 환경과 땅을 둘러보았다.
작은 마을들이 보이면 그들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들르기도 했다.
한번은 마차 바퀴에 문제가 생겨 수리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도착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마차에서 내린 록사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스 시내는 이스트와 크게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2,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거리는 얼기설기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록사나 님. 지금 여관에 남는 방이 하나도 없답니다.”
록사나가 헨리에게 몸을 돌렸다.
“지금 겨울철이라 방이 다 차는 일은 드물 텐데 어느 상단이나 길드가 머물고 있나 보죠?”
“맞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헨리가 대답했다.
“이런, 진짜 큰일이군. 다른 여관을 찾아보지.”
“다른 여관도 이미 다 꽉 찼다고 합니다. 여기보다 작은 규모의 여관이 세 군데가 더 있는데 다 그렇답니다. 여길 지나가는 상단인데 인원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
기드온 경의 말에 헨리가 여관 주인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기드온 경이 록사나를 바라봤다.
“촌장의 집으로 갈까요?”
“아니에요, 기드온 경.”
록사나가 빙글 몸을 돌렸다. 거리를 눈으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 많은 집들 중에 저희가 머물 만한 집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그러더니 씩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록시 님?”
네 사람이 황당한 얼굴로 록사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마르셀은 우선 여기 있어요. 내가 잠잘 곳 구해서 올게요.”
“네…….”
얼떨결에 마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이 가요.”
아이린이 후다닥 록사나에게로 뛰어갔다.
헨리가 상관인 기드온 경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쩝니까, 기드온 경?”
“뭐, 우리도 따라가야지.”
그들의 상관은 상식적이면서도 은근히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왜 멀쩡한 집들을 놔두고 이리로 오신 건데요?”
록사나의 옆에서 아이린이 투덜거렸다.
호위로 뒤를 따르는 헨리와 기드온 경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노스 시내에서 가장 허름한 집들이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이왕 숙박비를 지불할 거면 더 다급하고 필요한 사람한테 지불하고 싶어서.”
“그건 그렇지만…….”
세 사람은 그녀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지나치는 집들의 상태를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들의 영주님이 이런 집들에서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록사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마치 캠핑 온 거 같아.’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실례되고, 정말 미안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의 집들은 그녀에게 따뜻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적 부모님과 여행을 떠날 때가 있었다.
대부분 시설 좋은 여관에 머물렀지만, 가끔씩 이런 집들이 있는 곳을 찾아서 하루나 이틀 정도 숙박을 하곤 했었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가 방금 전 록사나가 했던 대답과 같은 말을 하셨었다.
‘그리고 다른 말도 하셨었지. 내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랐으면 좋겠다고……. 그때 어머니가 그럼 이상하고 안 좋은 모습까지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펄쩍펄쩍 뛰셨었지.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무척 즐거웠고…….’
비슷한 장소에 오니까 기억이 더 생생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세바스티안은 그들의 딸이 폭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셨던 거다.
록사나가 가진 힘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기에 더욱 많은 염려를 하셨다.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 올바르게 힘을 사용하라고 하셨는데…….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겠지?’
담고 있는 생각의 폭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딸이 세상과 어울려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도 같다.
요즘 들어 부모님과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혹시나 딸이 혼자 살아가게 될 때를 대비해서 교육을 하셨던 게 아닐까도 싶었다.
부모님의 그런 교육들이 지금에 록사나에게는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척 고독하기도 했다. 온전히 자신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았었던 전 남편은 너무 먼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비밀은 아이린에게는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지원하러 갈 필요 없어요 】
정처 없이 추억에 잠겨 걷던 록사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허름한 집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자아이에게로 향했다. 나이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추운 겨울바람에도 옷차림은 한없이 가벼웠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아이의 퀭한 눈이 록사나와 마주쳤다.
낯선 사람의 시선에 아이의 몸이 흠칫거렸다.
아이는 몸을 더욱 옹송그리며 슬금슬금 집 현관문 쪽으로 붙어 섰다.
록사나는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덩달아 그녀의 옆과 뒤에 있던 아이린과 호위들도 몸을 쭈그렸다.
“안녕? 나는 록사나야.”
“…….”
아이의 맑은 파란 눈에 경계심이 더욱 짙어졌다.
“있지, 내가 지금 잠잘 곳을 구하고 있는데… 집에 어른이 계시면 만날 수 있을까?”
“…….”
아이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노스에 있는 여관들이 다 차서 여기까지 온 거야. 만약 너희 집에 머물 수 있게 되면 당연히 돈을 지불할 거야.”
아이의 고개가 순간 번쩍 들렸다.
“돈?”
“응. 잠잘 곳을 빌리면 숙박비… 돈을 내는 거지.”
아이의 경계심은 여전했지만 두 눈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따라가지도 말고,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를 어른들에게 들었을 거다.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니? 혹시 가족을 기다리는 거라면 나도 같이 기다려도 될까? 너희 집 어른이 오시면 방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아이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록사나가 설명을 해 주었다.
“음…….”
아이가 록사나 일행을 힐끔거렸다.
“아, 이 사람들은 내 일행이야.”
“우리 집 좁은데…….”
덩치가 큰 남자 어른 둘과 성인 여자 둘이 머물기에는 자신의 집이 턱없이 비좁다는 걸 떠올린 아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 그건 걱정하지 마.”
아이의 집이 좁다는 건 겉으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아이의 부모가 허락한다면 록사나와 아이린만 이 집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호위 세 사람은 옆집 문을 두드려 해결을 보면 될 거다. 그것도 안 되면 다른 옆집을…….
록사나가 슬쩍 앉은걸음으로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몸이 옴찔거렸다.
은근슬쩍 아이 옆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데 성공한 록사나가 말했다.
“같이 기다리자.”
아이린과 기드온 경, 마르셀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허허…….”
기드온 경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저 격의 없는 영주님의 행동은 그를 내심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록사나는 자신이 본 귀족들과는 완전 달랐다. 물론 그도 하급 귀족 출신이었지만 전 공작 부인까지 했던 사람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아이린과 마르셀, 기드온 경까지 쪼르르 처마 밑에 자리하게 되었다. 마치 한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참새 무리 같았다.
세상에 어둠이 내려앉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 엄마 나디아가 도착했다.
나디아는 록사나의 제안에 처음에는 망설였다. 집이 누추하고 좁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속된 설득과 어두워진 거리로 인해 결국 나디아가 수락을 했다.
집 안에 들어서자, 휑한 공간이 드러났다. 단칸방이었다. 작은 집이 사람들로 꽉 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에 다락 공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하도 있었는데 창고로 사용한다고 했다.
기드온 경을 포함한 남자 세 명은 다락 공간에서 자고, 난로가 있는 1층에서는 나디아와 그녀의 딸 리나, 록사나, 아이린이 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처음에 록사나는 다락에 난방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염려를 했었다.
그러자 세 사람은 겨울에 기사단 훈련을 할 때 바깥의 맨땅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안락하다며 극구 옆집이 아닌 다락을 선택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식사를 준비해드릴게요.”
나디아가 주방 공간이 있는 화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힘들었던 오늘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무려 3일 치의 숙박비와 식비를 받았는데 금액이 무척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