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비바람이나 추위를 막는 것도 생각해야 하고, 불에 강한 자재로 지으려면 석재가 좋은데……. 흙하고 돌을 섞어서 하면 깎여 나가는 흙들을 매년 보수해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더라고요.”
“건축가를 구하고, 자재를 수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수로 공사도 염두에 두고 계시니까, 아예 수로 연결을 미리 염두에 두고 집을 지으면 물을 이용할 때 더 편하고 좋지 않을까요?”
집 안의 난방과 욕실 위치나 구조 등 소소한 얘기들까지 흘러나왔다.
록사나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괜찮다 싶은 의견들을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제법 쓸 만하고 도움이 되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들의 의견에 록사나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 더해졌다.
이왕 영지민들에게 새로 지어 주는 집, 제대로 지어 주고 싶은 욕심이 한가득이었다.
늦은 밤까지 계속되던 토의는 우선 건축 기술자들을 찾아 고용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해 진행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이 모은 의견들을 바탕으로 주택뿐만 아니라, 마을, 아니, 도시 전체의 설계를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영지에서도 발굴해 내겠지만 전문가나 인재를 찾아내는 것은 우선 록사나가 거래하고 있는 상단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록사나는 유용한 건축 자재들을 떠올려 보았다.
‘벽돌을 만들려면 많은 벽돌공들이 필요해. 시멘트의 원재료인 석회를 찾아 철근과 콘크리트로 집을 지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장은 어렵겠지. 그래도 미래를 생각해서 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대리석 등의 석재가 가장 비싼 건축 자재라면 벽돌은 그다음으로 비쌌다. 건축용 목재도 그랬다.
정령사라는 것 외에도 록사나에게는 숨겨진 또 다른 힘이 있었다. 그것은 정령의 신비한 힘을 통해 얻은 다른 세계의 지식이었다.
당연히 어느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지식을 활용해 영지 전체에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지식을 현실에서 구현해 줄 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예를 들면 석회를 원재료로 시멘트를 개발하고,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하는 건축 기술 같은 거라든가…….
록사나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리온 제국과 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다 구현해 내려면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정도였다. 아니, 최소 몇백 년이 걸릴 일이었다.
무엇보다 혁신적인 사상과 기술을 내포하고 있어서 현 시대에 구현하기는 대단히 위험했다. 지나가는 말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록사나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힘을 조금씩 풀어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록사나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록시, 다른 사람에게 신비한 힘에 대해서 아직은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왜?’
‘우리 록시가 위험해질 수 있어.’
‘애 위허매? (왜 위험해?)’
‘록시가 가진 힘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엄청난 힘이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록시의 힘을 빼앗으려고 할 거야.’
‘빼느 거 나빠! (뺏는 거 나빠!)’
‘맞아. 함부로 뺏는 건 나쁜 거야. 록시가 신비한 힘을 잘 가지고 있다가 꼭 필요한 곳에 사용했으면 좋겠어.’
‘로씨 히미 피료해? (록시 힘이 필요해?)’
‘응. 언젠가 꼭 필요한 날이 올 거야. 어른이 되어서 록시가 괜찮다고 생각되면 그때 신비한 힘을 써도 돼. 그전까지는 비밀이야.’
‘비미! (비밀!)’
어린 록사나가 작은 손으로 입을 꼭 막았다.
어른이 되어 가면서 록사나는 어머니의 걱정 어린 당부의 말들을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은 곧 힘이자 권력이고 어마어마한 무기였다. 더군다나 록사나가 가지고 있는 다른 세계의 지식은 세상을 뒤엎을 만한 파괴력을 지녔다.
자신과 어머니가 이런 힘을 갖게 된 이유는 록사나 자신도 잘 몰랐다.
어머니의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정령의 목걸이, 정령과 관련된 신비한 힘이었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이제는 록사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다.
논의를 마치고 일행들이 모두 떠난 빈방에서 록사나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캠든 성에 있는 프레드릭에게 내일 아침에 보낼 편지였다.
영지 주택 개선 사업을 알리고, 함께 동봉된 또 다른 편지는 그녀가 거래하는 문라이트 상단에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 * *
카일라니 공작가 집무실 안.
아스테리온이 쪽지 하나를 훑어본 후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로웰 후작령 근처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파견된 정보부원이 보내온 짧은 보고서였다.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수상한 병사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으며, 감추어진 시설이 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아스테리온의 앞에 서 있던 트레버가 말문을 열었다.
“역시 로웰 후작이 뭔가를 감추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시설에 잠입하되 위험할 시 바로 몸을 빼라고 해.”
공작이 말하는 위험은 목숨을 잃게 될 것 같은 경우를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처리해.”
아스테리온이 막 집무실을 떠나려는 트레버를 붙잡으며 서류 뭉치를 떠넘겼다.
그것을 펼쳐 든 트레버의 두 눈이 커졌다.
“다 말입니까?”
“응.”
트레버가 경악했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차갑게 굳은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보며 수긍했다.
‘아니, 이혼한 전 남편 중 도대체 누가 전 부인 평판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냐고!! 이럴 거면 이혼하지를 말았어야지!’
아스테리온이 지금 당장 전 부인과 재혼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데려올 생각으로 이혼했던 걸 거야. 틀림없어!’
트레버가 절규에 가까운 한탄을 속으로 내뱉으며 집무실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얼마 후, 여러 귀족가들이 경제적·정치적 타격을 받아 귀족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전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었던 록사나 카일라니가 불임이어서 이혼당했다는 소문을 적극적으로 퍼트린 일원이 존재하는 가문들이었다.
물론 당한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에 의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 * *
“와아!”
록사나와 일행은 페어리 레이크의 아침 풍경에 입을 쩍 벌렸다.
안개가 고즈넉한 호수와 숲을 감싼 모습이 마치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호수가 하얀 베일을 걷어 내는 아가씨처럼 수줍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이국적인 풍경인데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호수에 매료된 아이린이 감탄을 연발했다.
“하긴, 나도 그래. 리온 제국 어딜 가도 이런 풍경은 거의 보기 힘들걸.”
어느 순간부터 아이린에게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한 마르셀이었다.
그 역시 제국을 많이 돌아다녀 보지는 못했지만, 페어리 레이크의 독특한 풍광은 가히 신비로웠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아.’
록사나는 대륙에서는 본 적 없는 화풍을 떠올렸다.
“크. 운치 있군요. 다음에 아내랑 꼭 한번 와 보고 싶네요.”
“그래. 신혼 때는 자주 여행 다니게. 아이가 생기고 나면 1, 2년 정도는 하기 힘들거든.”
헨리의 말에 기드온 경이 인생 선배로서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해 주었다.
헨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영지 시찰을 떠나기 며칠 전에 알게 되었던 사실을 수줍게 털어놓았다.
“어쩌죠? 이제부터 여행은 이미 못 갈 거 같은데…….”
“엥? 설마?! 벌써 애가 생긴 거야?”
기드온 경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헨리에게 쏠렸다.
이미 입꼬리가 하늘로 향해 있는 헨리였다.
“네.”
“축하해요, 헨리. 그런 기쁜 소식을 여태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군요.”
아이린이 제일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와, 헨리 형, 축하해.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능력도 참 좋아!”
“와하하! 축하한다. 너도 이제 달콤한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마르셀의 축하에 이어 기드온 경이 헨리의 어깨에 통나무 같은 자신의 팔을 두르며 말했다.
“헨리,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영주님.”
“내가 장담하건대 헨리의 아이는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게 될 거예요.”
“네,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헨리는 영주인 록사나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캠든 영지의 주택 개선 사업이 정해졌을 때, 헨리는 내심 무척 기뻤었다.
그가 사는 집도 영지민들과 같았다. 오래되어 낡고, 흙과 돌을 섞어 지은 집은 여름 장마철만 되면 천정에서 비가 새기 일쑤였다.
천정과 함께 부서져 내리는 흙벽을 매년 보수하는 게 집안에서 하는 연례행사였다.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겨울에 찬바람이 숭숭 드나들었다.
자신이야 이런 집에 익숙해져서 계속 산다고 해도, 자신의 아이에게만큼은 익숙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번듯하고 따뜻한 집에서 언제 무너질지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며 자라게 하고 싶었다.
어쩌면 헨리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님이 캠든의 영주님으로 오신 건 그들에게 내려 주는 신의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드온 경이 헨리에게 출산과 육아에 대한 조언을 마구 쏟아 내는 모습을 보며 록사나는 조금 떨어져서 호숫가를 거닐었다.
그녀는 천천히 호수와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진짜 요정이 살았었던 장소처럼 보이긴 해.’
동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들은 장난기도 많지만, 반짝이는 보석이나 아름다운 장소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묘사되곤 했다.
‘뭔가 특별한 장소인 것은 확실한데, 요정과 관련해서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네.’
이스트에서 화재를 진압하며 한꺼번에 많은 정령력을 소모한 록사나였다.
그런데 페어리 레이크에 발을 들인 후부터는 비워진 정령의 기운이 제법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하면 미미했지만, 이곳에 오기 전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또옥, 또옥…….’ 떨어지던 물이 ‘똑똑…….’ 연달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차이를 실제 몸으로 체험하고 있으니 더욱 놀라웠다.
어쩌면 요정을 만나 정령에 대해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했었던 거와는 달리 요정들의 모습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록사나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록사나 일행이 페어리 레이크를 벗어나자, 호수 근처의 수풀에서 무지개 빛깔의 아주 작은 불빛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