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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32)화 (32/214)

32화 

보육원에는 열 명의 아이들과 한 명의 여원장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캠든 성에서 보조금이 매달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곳이었다.

아이들의 차림새는 낡았지만 정갈한 편이었고, 구김살 없이 곧잘 웃었다.

록사나가 만난 중년의 여원장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보조금을 착복하거나 아이를 학대하는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갓 걸음마를 뗀 아기부터 열네 살짜리 아이까지 총 열한 명의 인원이 생활하는 보육원 주택이었다.

그들은 작은 방 두 칸짜리의 낡고 좁은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화재 사건의 영향으로 거주지가 부족해진 상황이다 보니 당장 해결해 주기에는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우선은 호위들의 도움을 받아 보육원 내의 부서진 집기나 가구, 집 안팎의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들을 수리해 주었다.

보육원에서도 록사나 일행은 여전히 신분을 감춘 상태였다.

후원금 명목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돈을 조금 지불하고, 식자재와 땔감을 넉넉히 채워 주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지었다.

‘보육원 건물 위치를 바꾸는 것도 그렇고, 영지민들 집을 하루빨리 새로 지어야 할 텐데…….’

록사나의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록시 님,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노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아이린이 물었다.

록사나 일행은 3일을 더 이스트에 머무르다가 노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일정에서 4일 이상 지체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마차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록사나가 아이린을 마주 봤다.

“집 생각.”

“성이 그리우세요? 하긴, 집 떠나면 고생이에요.”

아이린의 귀여운 오해에 록사나가 살포시 웃었다.

“아니, 내 집 말고, 이번에 화재로 불탄 집들 말이야. 빈민가랑 보육원도 그렇고. 영지민들의 집들도 많이 낡았어. 가장 큰 문제는 화재에 취약하다는 거지.”

큰일을 겪고 나니 영지의 문제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둘 드러났다.

“제가 잘못 짚었네요.”

멋쩍은 표정을 짓던 아이린이 록사나의 말에 동조했다.

“벽돌로 된 집은 몇 곳 없고, 지붕들을 나무를 덧대 풀로 엮어서 만들다 보니 더 그런 거 같아요. 벽돌이 비싸니까, 평민들은 웬만해서는 벽돌집을 엄두도 못 내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야. 수로 시설도 미비하고,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돈만 있으면 뭐든 못 하겠어요.”

“그래, 가장 큰 건 돈이지. 그렇다고 무턱대고 돈만 마냥 쏟아붓다가는 영지가 먼저 파산하고 말 거야. 하루속히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을 마련해야겠어.”

“저도 같이 고민해 볼게요.”

“그래. 같이 생각을 나누다 보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지.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우리끼리라도 모여서 머리를 맞대 보자.”

“네!”

아이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록사나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칼바람이 마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록사나가 마차 뒤를 따라오는 기드온 경을 소리쳐 불렀다.

“기드온 경!”

그녀의 부름에 기드온 경이 말을 몰아 쏜살같이 마차 옆에 자리했다.

“네, 영주님.”

“우리 이따 저녁 먹고 회의 좀 해요.”

그들은 전에 여관 주인이 말한 페어리 레이크 근처에서 하루 숙박을 할 예정이었다.

“회의 말입니까? 어떤 회의인가요?”

“이번에 화재가 난 집들의 재건부터 시작해서 영지민들의 주거 환경에 대한 논의예요.”

기드온 경이 방금 전보다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영지의 문제점들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 놓으면 성으로 돌아가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훨씬 수월해지겠죠. 그러니까 경뿐만 아니라 마르셀과 헨리도 같이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영지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노력하는 록사나의 열정적인 태도가 기드온 경은 기꺼웠다.

그는 말을 모는 마르셀과 앞쪽을 살피러 간 헨리를 불러 차례대로 영주님의 뜻을 전달했다.

* * *

영지를 함께 시찰 중인 일행이 록사나가 머무는 여관방에 모두 모여 앉았다.

그들은 모두 진지한 얼굴빛을 띠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다들 피곤해서 쉬고 싶을 텐데, 모여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영주님.”

기드온 경의 겸손한 선창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아시다시피 제 보좌관은 현재 아이린 한 명뿐이에요. 집사 프레드릭은 캠든 성에 있으니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이 당분간은 제 보좌 업무까지 겸해야 할 거 같아요.”

“영광입니다.”

헨리가 제법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의욕적인 영주님을 보며, 영지가 좋은 방향으로 변해 갈 거라는 기대감이 높아진 상태였다.

“먼저 영지의 현 상황과 발전 계획에 대해서 간략하게 얘기할게요.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 영지에는 현재로서는 특산품도 없어요.”

생산되는 작물들은 영지에서 다 소비가 되고 있고, 오히려 부족해서 타 영지에서 들여와 채우는 형국이라는 걸 캠든 영지에서 생활했던 이들은 모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캠든 영지에는 잉여 농산물이 없었다.

“돈이 될 만한 게 없다 보니 영지 수익도 겨우 현상 유지에요. 돈 문제나 영지 수익을 늘리는 건 이번 논의에서는 우선 제외할게요.”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여 호응했다.

“우리 영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에 의지해서 살아가요. 일자리가 다양하지 않고 부족하죠. 거주하는 집들도 다 상태가 안 좋아요. 우선 화재와 난방에 너무나도 취약해요. 이번 화재에서 인명 피해가 없었던 건 정말 하늘이 도운 거나 다름없어요.”

그것 역시 공감했다.

“나는 가장 시급한 주거 환경 개선 공사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해요.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인구가 늘고, 인구가 늘면 영지 발전도 수월할 거라고 봐요.”

록사나가 잠시 숨을 가다듬자, 기드온 경이 대표로 말했다.

“동감입니다.”

“영지의 크기에 비해 인구수가 너무 적으면 성장에 한계가 있죠. 현재 캠든이 그래요. 그리고 영지민들 한 명 한 명은 우리 영지의 소중한 인재이자 자산이에요.”

기드온 경, 헨리와 마르셀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록사나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생겨났다.

영지민들을 ‘인재이자 자산’이라고 칭하는 영주는 그들 생애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영지 발전의 첫걸음이 주거 환경 개선이 될 거라는 얘기예요. 이와 관련된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어요.”

록사나가 말을 다 마치고 나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주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돈 문제는 논외라고 하셨지만, 당장 집 지을 재료들을 살 돈이 필요합니다.”

기드온 경이 현실적인 문제를 꼬집었다.

그의 말은 빈민가 사람들이나 영지민들이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칠 여력이 없다는 얘기였다.

결국에는 영지 예산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예산이라고 해 봐야 턱없이 부족할 게 뻔했다.

“맞는 말이에요. 돈 문제를 제쳐 둘 수는 없죠. 우선은 영지 예산이 아닌 내 사비로 진행할 거예요.”

사비로 진행한다는 말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계시길래…….’

“사람들이 돈을 벌면 쓰기 마련이에요. 결국 돈은 돌고 돌아요. 주택 건설과 영지 정비를 겸해서 도로와 수로 공사를 진행하다 보면 향후 최소 3년에서 5년 동안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제공될 거예요.”

“영주님이 그렇게 돈이 많으십니까?”

마르셀이 패기 있게 물었다. 어찌 보면 사적인 질문이었지만 기드온 경과 헨리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물음이기도 했다.

“네, 나 돈 많아요. 주택 건설 사업과 도로, 수로 공사를 마칠 정도는 돼요.”

“네엑?!”

괴상한 비명을 내지른 마르셀뿐만 아니라, 기드온 경, 헨리, 심지어 아이린까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결혼 생활 중 매달 지급되는 공작 부인의 예산은 온전히 록사나의 몫이었었다.

그 돈을 그녀가 아는 상단을 찾아내서 지난 9년 동안 투자했다.

사실은 결혼 전부터 시작한 투자가 결혼 생활을 거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투자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성인이 되어 카일라니 공작가를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혼한 상태지만, 카일라니 공작과 결혼하는 바람에 그 돈에 손댈 일이 없었다.

투자한 상단은 어마어마한 대성공을 거두었고,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커졌다.

벌어들이기만 하고 쓰지를 않았기에 그동안 쌓인 돈이 상당했다.

물론 그녀가 받은 위자료도 어마어마했다.

이 사실들까지 굳이 세세하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영지 공사를 사비로 진행하겠다고 한 것은 자신의 돈을 퍼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투자였다.

제일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기드온 경이 입을 열었다.

“허허허. 어떻게…….”

위자료를 많이 받으신 거냐고 직접적으로 차마 묻지 못하는 기드온 경이었다. 그래도 궁금해서 말끝을 흐렸다.

“상단에 투자를 좀 해서 벌었어요.”

“대단하십니다.”

헨리의 감탄에 같이 앉아 있는 아이린의 어깨가 덩달아 으쓱거렸다. 자신이 모시는 상관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니 확실히 기분이 달랐다.

“자, 그러니 돈 문제는 그만 얘기해요. 영지민들의 거주지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개선할지 논의해 보자고요.”

록사나가 화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영주님께서는 한 집당 어느 정도 크기를 생각하고 계세요?”

아이린이 물었다.

“일차적으로는 가족의 수에 따라 집의 규모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

“제 생각도 같습니다. 가족이 많은 집은 그만큼 필요한 방 수도 다르니까요.”

기드온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럼 한 지역이어도 집의 규모를 다 다르게 지어야겠군요.”

이번에는 헨리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때 마르셀이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스트의 빈민가부터 공사를 시작하실 겁니까?”

“그래야죠. 아직 다른 영지들을 다 둘러보지 않았지만 화재가 발생했던 이스트 지역이 가장 시급하니까요.”

일행들의 머릿속에 집 짓는 과정이 떠올랐다. 두서없지만 각자 자신의 생각들을 하나둘씩 펼쳐 놓았다.

다들 집 짓기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들의 장단점을 기억해 내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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