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괘… 음. 괜찮아요.”
“연기를 조금 들이마시셔서 목이 좀 따끔거리실 거예요. 목의 통증을 줄이는 약초를 달인 물인데 드시면 말씀하시기 한결 편해지실 겁니다.”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록사나의 앞에 약 그릇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옆에 있던 아이린이 대신 약 그릇을 받아 들었다.
“록시 님, 약 먼저 드시고 말씀하세요.”
아이린의 재촉에 록사나가 약을 받아 마셨다. 쓴맛이 혀를 강타했다.
“으으.”
눈치 좋은 아이린이 단것 하나를 록사나의 입 안에 쏘옥 넣어 주었다. 단맛이 돌기 시작하며, 한결 입 안이 개운해졌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영주님. 저는 약제사 애슐리입니다.”
애슐리가 허리를 숙여 록사나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영주라고 부르는 걸 보니, 기드온 경이 그녀의 정체를 밝힌 모양이었다.
“이스트의 촌장인 마테오의 딸이기도 합니다.”
기드온 경이 설명을 곁들였다.
“저는 켈빈입니다. 여기 있는 애슐리의 남편이고, 의원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애슐리의 곁에 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목의 따끔거림이 한결 가라앉은 록사나가 제 목소리를 내었다.
“두 사람 모두 만나서 반가워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렇게 맞이해서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고개를 내젓는 두 부부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경외가 깃들어 있었다.
“화재는 어떻게 되었어요?”
“시내 쪽 주택가로 번지지 않고, 모두 진압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불길이 거세지기 전에 대부분이 대피를 했었다고 합니다. 몇몇 부상자들을 제외하고는 사망자도 없고요. 촌장은 지금 나머지 뒷수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아. 다행이네요.”
록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셀이 쓰러진 영주님을 모시고 와서 우선은 가까운 촌장의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기드온 경은 큰오빠가 어린 여동생을 나무라듯 가볍게 그녀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제 간이 콩알만 해졌지 뭡니까. 마르셀을 영주님 옆에 남겨 놓지 않았더라면 아주 큰일 날 뻔했습니다.”
록사나는 기드온 경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녀도 자신이 안일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쓰러진 이유에 대해서 기드온 경은 묻지 않았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마르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초지종을 기드온 경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숨기기 힘들었겠지. 문제는 누구누구가 아느냐는 건데…….’
절로 머리가 아파 오고 생각이 많아지는 록사나였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선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대책을 세우는 건 그다음이었다.
“기드온 경하고 마르셀만 남고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어요?”
록사나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마르셀이 록사나의 앞에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쿵.
얼마나 세게 꿇었는지 바닥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쓰러지시고 눈을 계속 못 뜨셔서 기드온 경께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셀이 털어놓지 않았으면 제가 그의 팔다리를 분질러 놓았을 겁니다.”
기드온 경의 강경한 말투에서 그냥 하는 허튼소리가 아님이 느껴졌다.
“일어나요, 마르셀.”
록사나의 부드러운 말투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마르셀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어서요.”
마르셀이 살짝 기드온 경의 눈치를 보더니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다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요한 거는 그… 사실과 제가 영주인 걸 아는 사람들이 누구누구냐인가죠.”
“저희 두 사람 말고도 애슐리와 켈빈, 마테오 촌장이 알고 있습니다. 영주님께서 깨어나지 못하셔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하려면 원인을 알아야 했으니까요.”
영주님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는데도 불구하고 고민에 빠져 있던 마르셀을 윽박지르고 어르고 달래서 기드온 경은 겨우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영주님이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 기드온 경은 그렇게 완고했던 마르셀의 고뇌가 절로 이해되었다.
“거기다가 빈민가에서 일어난 기현상이 영주님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이미 그들이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촌장이 그 근처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기드온 경의 표정은 진중했다.
“아이린과 헨리도 영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 있지만 모두 함구하도록 엄중히 입단속을 해 놓았습니다. 이상입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록사나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눈을 다 속일 수는 없을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영주임이 밝혀지는 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까.
반면, 자신이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알게 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그런데 이 이상 알려지면 절대 안 돼요.”
“물론입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영주님이 위험해지실 겁니다.”
옆에서 마르셀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뒤를 이어 말했다.
“맞습니다, 영주님. 거기다 앞으로는 힘을 함부로 쓰시는 것도 위험해요. 하루가 넘도록 깨어나지 못하셔서 걱정돼 죽는 줄 알았다고요.”
“설마… 내가 하루가 넘도록 기절해 있었어요?”
“사실입니다.”
기드온 경의 대답에 록사나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전에 쓰러졌다 오후에 일어난 줄 알았는데…….’
“영주님, 그 사용하신 힘 말입니다. 전설에 나오는 그 정령의 힘이 맞습니까?”
정령과 정령의 힘에 대해 얼핏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던 기드온 경이 확인차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아요.”
“역시!”
록사나를 바라보는 마르셀과 기드온 경의 눈이 경외심에 가득 차 반짝거렸다.
자신들이 목격한 경이로운 힘이 정령의 힘이었다니!
실제 그 힘을 목격했을 때만큼이나 지금 이 순간도 무척이나 감격스럽고 놀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정령의 힘은 지금은 사라진 힘이었다. 전설로만 여겨지는 힘이었기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기드온 경은 그 점을 참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영주님이 행한 일을 무마시키기가 그나마 수월할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기드온 경의 물음에 마르셀도 궁금증이 일었다.
모든 사실을 다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어 록사나는 진실과 허위를 살짝 섞기로 했다.
“나도 어떻게 해서 얻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그저 어릴 때 우연히 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록사나의 얘기를 들으며 기드온 경의 마음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공작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지금 영주님의 태도를 봐서는 모르실 것 같은데…….’
“제가 열두세 살 때쯤 힘이 갑자기 사라졌었는데, 이번에 또 갑자기 힘이 돌아온 거예요. 사라진 이유도, 다시 힘을 쓸 수 있게 된 이유도,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기드온 경이 자신의 턱을 가만히 쓸었다.
‘힘을 잃었다가 이번에 되찾았다면…….’
그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영주님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남모를 고민에 휩싸였다.
기드온 경은 이 외에도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막 깨어난 환자에게 이것저것 묻기에는 양심이 조금 찔렸다.
록사나가 화제를 돌렸다.
“빈민가 상황은 어때요?”
“불탄 집이 30여 채 정도 됩니다. 다친 사람들은 치료소로 보냈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임시 막사를 지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촌장의 말에 의하면 불탄 집 잔해를 치우고 거기에 다시 집을 지을 예정이랍니다.”
록사나는 추운 날씨에 임시 막사 생활을 할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특히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이 더 염려되었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기드온 경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캠든 성에 구호물자를 요청했는데, 오늘 새벽에 일부 도착해서 지급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화재의 원인은 밝혀졌나요?”
“현재로서는 난방이나 취사를 하다가 불씨가 옮겨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 고의로 불을 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계속 수고해 주세요. 그리고 촌장이 돌아오는 대로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주세요.”
화재 대책뿐만 아니라, 저와 관련된 사실도 다시 한번 철저히 단속해야 했다.
록사나의 뜻을 알아챈 기드온 경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이 방 안에서 물러났다.
바로 아이린이 들어와 록사나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 * *
이스트의 빈민가 화재와 정령의 힘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다행스러운 점은 사람들이 정령의 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화재가 난 그 지역에만 비가 내리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와전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퍼지는 데는 촌장 가족과 록사나 일행이 물심양면으로 한몫씩 해냈다.
신이 도와 때마침 비가 내렸고, 그래서 화재가 빠르게 진압될 수 있었다는 내용을 암암리에 퍼뜨렸던 것이다.
록사나가 정령사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함구한다는 맹세를 했다.
강제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 것은 말뿐이었지만, 그들이 캠든 영지에 적을 두고 사는 이상 지킬 수밖에 없었다.
캠든 성에서 추가로 구호물자를 보내왔고, 록사나의 지시 아래 화재를 당한 이재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필품을 지급했다.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은 여관방과 남는 집들을 영주의 이름으로 빌려 그곳에서 겨울을 나게 했다.
그들의 거주 비용은 록사나의 사비로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여관 여주인은 자신의 여관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좋아했다. 겨울철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벌이가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12월의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불탄 집들이 새로 지어지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렇다고 노약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마냥 천막 생활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우선은 이스트의 치안대가 사용하는 건물을 개조해서 이들의 임시 숙소로 삼게 했다. 아마 최소한 봄까지는 그곳에 머물러야 할 거다.
빈민촌 화재 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록사나는 계획했던 나머지 일정들을 소화하기로 했다.
약제사인 애슐리와 의원인 켈빈의 도움으로 이스트의 약방과 의원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모든 것이 열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