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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30)화 (30/214)

30화 

록사나는 여주인의 생각을 깨뜨리고 싶었다.

먼 훗날까지 갈 필요 없이 당신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게 자신이 그리 만들고 말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하나씩 바꿔 나가면서 직접 보여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여주인은 물론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영지민들의 인식도 자연스럽게 바뀌리라.

록사나가 화제를 돌렸다.

“이 근처에 볼 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여행자들은 으레 아름다운 장소들을 찾곤 한다. 그런 장소들을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히 현지 사람들이다.

“오늘 노스로 넘어간다고 했소?”

“네.”

“그럼 노스 가는 길에 있는 세 번째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고 가시구려. 그 근처에 페어리 레이크라는 자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는데 아침에 보면 참 운치가 있다오.”

“페어리 레이크요? 이름이 참 귀엽네요.”

아이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오랜 옛날에 거기서 가끔씩 요정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하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오. 지금은 겨울이라 꽃이 없어서 좀 아쉽지만 제법 볼 만하다오.”

“지나는 길에 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여주인의 친절한 설명에 록사나는 페어리 레이크라는 곳이 궁금해졌다.

요정과 정령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였지만, 자신이 정령사여서 그런지 관심이 갔다.

샤일리가 정령계로 사라지고, 록사나가 다룰 수 있는 자연 원소계의 힘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페어리 레이크에서 뭐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

혹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어 보았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그때 헨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왜 그래요?”

“무슨 타는 냄새 안 납니까?”

록사나 일행의 시선이 여주인에게로 향했다.

“지금 화덕에 올려놓은 거 없는데……. 혹시 모르니 주방에 한번 가 봐야겠구먼.”

여주인이 일어나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이건… 음식이 타는 냄새는 아닌 거 같은데.”

기드온 경이 벌떡 일어나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헨리가 뒤따랐다.

“주방은 이상 없다오.”

막 주방에서 나온 여주인이 말했다.

그때 쾅 소리와 함께 닫혔던 여관 문이 급하게 열렸다.

나갔었던 기드온 경이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빈민촌 쪽에 불이 났습니다.”

록사나 일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보니 정말 빈민촌 방향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어서, 우리도 저곳으로 가요.”

록사나가 서둘러 말했다.

헨리가 어느새 네 필의 말을 그들의 앞으로 끌고 왔다.

“말을 타실 수 있겠습니까?”

기드온 경이 록사나에게 물었다. 긴급한 상황에 느긋하게 마차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어서 가요!”

록사나가 헨리의 손에서 말고삐를 재빠르게 채 갔다.

말에 훌쩍 올라탄 록사나가 손을 내밀어 아이린을 자신의 뒤에 태웠다.

기드온 경과 마르셀, 헨리도 각각 남은 세 마리의 말에 올라탔다. 일행은 빠르게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 * *

“물이 더 필요해!”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저러다 주택가까지 번지겠어.”

“아이고, 이를 어째?”

“아이가, 우리 아이가 안 보여요!”

“저기 불길을 막아!”

빈민촌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우물물을 길어 나르며 불길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까닭에 불을 끄는 속도보다 번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무엇보다 건조한 날씨가 한몫을 하고 있었다.

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린 록사나 일행이 그들과 합류했다.

“헨리, 못 빠져나온 사람들이 있나 파악해서 그들을 반드시 구출해 내세요.”

일행 중 골목길을 가장 잘 아는 그에게 록사나가 지체 없이 명했다.

“네!”

헨리가 바로 자리를 떴다.

“기드온 경과 마르셀은 불길을 잡는 데 힘을 보태세요. 아이린은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도록 해.”

기드온 경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마르셀은 두고 저 혼자 움직이겠습니다. 마르셀, 록시 님을 잘 보필하도록.”

그는 록사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돌아서서 진화 작업을 벌이는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마르셀을 그녀의 곁에 남겨 놓은 건 영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는 걸 록사나도 잘 알았다.

“록사나 님?”

록사나가 빈민촌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마르셀이 뒤따르며 그녀를 불렀다.

“바람이 저쪽으로 불고 있어요. 그럼 저기도 곧 불이 옮겨붙을 거예요.”

바람의 흐름을 느낀 록사나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불길이 미치지 않은 지역으로 화재 현장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예? 바람이요?”

어느새 뛰기 시작한 록사나의 뒤를 바짝 따르며 마르셀이 되물었다. 영주님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셀이 느끼기에는 바람이 무척 잠잠했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고 돌아 록사나의 발걸음이 한곳에서 멈춰 섰다.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없었다. 다행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대피를 한 것 같았다.

록사나가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마르셀, 이 근처에 우물 같은 게 있는지 찾아봐 줘요.”

“알겠습니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마르셀이었지만 신속하게 영주님의 지시를 따랐다.

이해되지 않는 영주님의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았습니다!”

좁은 골목길 안, 작은 공터에서 공용 우물을 발견한 마르셀이 크게 외쳤다.

다른 골목 쪽을 살피던 록사나가 황급히 그리로 뛰어왔다.

빈민가라도 우물이 여러 개 있을 거라는 록사나의 짐작이 맞았다.

록사나가 우물을 덮고 있는 묵직한 나무 뚜껑을 열어젖히려 하자, 마르셀이 재빨리 거들었다.

우물 안쪽으로 록사나가 양손을 뻗었다.

집중하는 록사나의 모습은 마르셀에게 그저 우물에 손을 뻗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레박은 놔두고 대체 뭐 하시는 거지?’

그때였다.

“어?!”

마르셀이 고개를 들어 불길이 한창 피어오르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줄기가 마르셀의 얼굴을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깜짝 놀란 마르셀의 머리칼이 점점 휘날리기 시작했다.

‘분명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영주님은 어떻게……?’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이 점점 그들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덩달아 연기와 불씨까지 날아들었다.

“영주님, 불길이 이쪽으로……!”

마르셀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그의 입과 눈이 찢어질 듯 아주 크게 벌어졌다.

록사나의 두 손을 타고 물방울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록사나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들이 맺혔다.

오랜만에 큰 힘을 사용해 보는 거라 록사나는 물방울을 뜻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물방울의 기운을 느끼고 통제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며 불길이 이는 쪽으로 손을 서서히 움직였다.

‘제발, 도와줘!’

쇳덩이를 매단 것 같은 무거운 양손을 있는 힘껏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쏴아.

물방울들을 따라 우물 속에서부터 이어져 나온 거대한 물줄기가 허공에 커다란 강을 이루었다.

‘저 불을 꺼 줘! 제발 부탁이야!’

록사나가 힘겹게 손짓하자, 물줄기가 불길을 향해 빠르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열기가 치솟는 곳에서 물줄기가 넓게 퍼지더니 장막을 이루며 불길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어, 어!”

마르셀은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풍경이 꿈결 속을 걷는 것처럼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던 록사나가 무언가를 터뜨리듯 두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이야!’

초대형 물방울 같은 물의 장막이 펑 터지며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센 불길들이 서서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자욱하게 대기 중에 퍼져 있던 연기들이 서서히 걷혔다.

시야가 어느 정도 트이며 잔불에 의한 연기만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큰 힘을 한꺼번에 쏟아 낸 록사나의 두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다.

‘이걸로는 부족해. 한 번 더 해야 해.’

록사나가 다시 우물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바람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저 잔불도 무척 위험했다.

혹시 모르니 잔불까지도 모두 소거해야 했다.

“한 번만 더 도와줘.”

우물은 이미 흙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온 무형의 힘이 땅을 뚫고 들어가 수원을 따라 깊이 더 깊이 내려갔다. 그래도 남아 있는 물이 거의 없었다.

록사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물길들을 따라 물이 이 우물 안에 모여드는 이미지를 간절히 떠올렸다.

흐르는 일분일초가 억겁같이 느껴졌다.

퐁. 퐁퐁! 퐁…….

‘됐다!’

천천히 솟아나던 물방울이 펑펑 우물에 차올랐다. 록사나는 모든 힘을 짜내어 다시 한번 물길을 끌어다 하늘 높이 띄워 올렸다.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이 록사나의 의지에 따라 불길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갔다.

주변에 몰아치던 바람도 이리저리로 뻗어 나가더니 물방울들의 움직임을 도왔다. 굵게 올라오던 연기들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르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구에 의해 이런 일이 행해졌는지 모를 수 없었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아.”

“영주님!”

록사나의 몸이 힘없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털썩.

마르셀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 록사나를 받아 냈다.

록사나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코에서는 선홍빛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정령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결과였다.

* * *

웅성웅성.

‘왜 이렇게 시끄럽지?’

더 자고 싶은데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웠다.

록사나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시야가 흐려 사물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록시 님!”

아이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작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영주님!”

“록사나 님.”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들도 그녀가 아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아이린이 등을 받쳐 록사나의 입가에 물 잔을 대 주었다. 목이 칼칼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녀가 물을 꿀꺽꿀꺽 받아 마셨다.

“하아.”

정신이 한층 맑아지며, 시야도 차츰 또렷해졌다. 부축을 받아 침대 머리에 기댄 록사나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낯선 방 안에 아이린, 기드온 경, 헨리와 마르셀, 낯선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자리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기드온 경의 목소리에 잔뜩 걱정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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