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영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며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듣는 것도 중요했다.
“동물들은 염소나 양, 소, 돼지, 닭, 거위를 주로 키우고요. 큰 가축을 한두 마리 키우는 집이면 웬만큼 먹고살 만한 집입니다.”
“가축 키우는 집들이 많지 않다는 얘기인가요?”
“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데 가축 먹이까지 대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식량이 넉넉한 편이 아니니까요.”
“그렇겠군요.”
“저기 푸줏간들을 보니까 규모가 다들 작은 편이네요.”
아이린이 가리킨 곳에 푸줏간 몇 개가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고기들이 고리에 걸려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는데 양이 풍부하지는 않았다.
푸줏간들을 지나자, 생선 파는 작은 가게 두어 개가 보였다. 주로 마른 생선과 말린 해산물을 팔고 있었다.
한 생선 가게 앞으로 록사나 일행이 다가갔다.
상인이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쇼. 무얼 드릴까요?”
“이 생선들은 어디에서 온 건가요?”
“주로 시로난 마을과 메러딘 지역에서 온 것들이라오.”
중년의 상인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시로난은 캠든 영지인 웨스트에 속하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고, 메러딘은 레드포드 영지 내에서 규모가 큰 어촌 지역이었다.
시로난과 접해 있는 메러딘은 큰 항구가 있어 타 지역과의 무역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으로 부유한 항구 도시기도 했다.
록사나가 생선들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물이 거의 없네요.”
“지금이 겨울철이라 그나마 이 정도라도 있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소금에 절인 생선 위주로 많이 가져오고, 겨울에는 추운 날씨와 바람 때문에 바다에 나갈 수 있는 날이 적어서 그래요.”
헨리가 상인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젊은 청년이 잘 아는구먼.”
“하하. 네.”
헨리는 자신이 웨스트 출신이라서 잘 안다고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다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 든 상인의 눈에는 유독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가씨는 귀티가 흘러넘쳤다.
딱 봐도 아가씨가 상전이고, 다른 두 사람은 그녀를 수행하는 고용인들로 보였다.
“요즘은 명태가 제철이라오.”
생선 상인의 권유에 록사나가 마른 명태포를 가리켰다.
“이거 한 묶음 주세요.”
“바로 싸 드리리다.”
상인은 명태포를 끈으로 단단하게 묶어 건넸다.
아이린은 상인이 말한 가격을 지불하고 명태포를 받아 들었다.
“고맙소, 다음에 또 오시오.”
한 묶음씩이나 팔게 되어 기분이 좋아진 상인의 배웅을 받으며, 록사나 일행은 생선 가게를 떠났다.
아이린이 록사나 옆으로 붙었다.
“록시 님, 이 생선으로는 뭐 하시려고요?”
“먹어야지.”
“여관의 주방을 빌릴까요?”
오늘 요리를 해 먹으려고 샀다고 생각한 아이린이 재차 물었다.
“아니, 지금 말고. 성으로 돌아가면 그때 해 먹자. 마음 같아서는 생물을 사고 싶었지만, 아무리 겨울이어도 들고 다니다 보면 상하잖아.”
사실은 다른 곳보다 생선 가게에 사람이 별로 없어 보여서 팔아 준 것이었다.
먼 거리를 이동해서 가져와야 하는 생선은 인근 마을에서 조달되는 식재료들보다 단가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 * *
소득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싸고 익숙한 식재료들을 주로 사 먹기 마련이다.
정감이 가는 시장과 거리의 풍경에 시골 영지의 소박함이 묻어났다.
록사나는 앞으로 발전시켜 나갈 캠든 영지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영지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부강한 영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되려면 영지민들의 삶이 먼저 안정되어야 한다.
삶의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교육과 의료, 교통 시설 등 각종 인프라의 구축이 필요하다.
영지민들은 록사나가 보듬어야 하는 사람이자, 캠든 영지와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줄 소중한 이들이었다.
영지의 풀 한 포기조차도 허투루 쓰지 않고 살펴야 한다. 모든 것은 다 그 쓰임이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절한 인재 발굴이 중요하고 시급했다.
록사나 일행은 시장 이곳저곳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이스트의 중심가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길이 좁아졌다.
그 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촌이 나타났다.
흙과 돌을 섞어 지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음식을 해 먹고 추운 겨울철을 나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하니 빈민촌에서 나무 같은 게 남아날 리 없었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심한 악취가 풍겨 왔다.
반사적으로 코를 막는 록사나와 아이린을 보며 헨리가 말했다.
“노스와 웨스트는 이보다 더 심합니다.”
“캠든 성에서 가까운 지역이 이 정도면 그보다 더 외진 지역은 아무래도 더욱 열악하겠지.”
“비바람을 피할 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거리를 떠돌던 시절이 떠오른 아이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사실은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쓰러지고 허물어진 담장이나 벽들은 천을 깁듯이 잡동사니 같은 물품들로 덧대어져 있었다.
중심가에서부터 합류한 기드온 경이 록사나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기드온 경의 진가는 빈민가에 들어서면서부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빈민가의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 길을 걷는데 마주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록사나 일행을 피해 달아났다.
시간이 흐르며 해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기온도 점점 내려갔다.
추위를 피해 다들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스산한 골목은 적막했다. 가끔씩 창문이나 문틈 사이 또는 얇은 벽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전부였다.
지저분한 오물들을 피해 걸으며 록사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먹는 거하고 주거 환경부터 가장 먼저 개선해야겠어.”
록사나는 자신의 두 눈으로 빈민촌을 직접 살펴보며, 의식주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사실 캠든 영지 정도면 그래도 살 만합니다. 영주님이 말씀하신 대로만 된다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겠지요.”
기드온 경의 말에 다른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가 가지고 있는 자원도 중요하지만, 어떤 영주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그곳의 운명이 달라진다.
그들은 주변 영지들의 상황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아 왔다.
캠든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영지에는 욕심이 가득한 영주들의 배를 채워 주느라 헐벗고 굶주리는 영지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 *
겨울 해가 짧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록사나 일행은 숙소인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일은 어느 구역을 둘러보실 예정이십니까?”
기드온 경이 물었다.
“약방이랑 의원 두어 곳이요. 그리고… 헨리, 이스트에 보육원이 있죠?”
“네, 한 곳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육원도 가 봐야겠어요. 그러고 나면 오후에는 많이 늦지 않게 노스로 출발할 수 있겠죠?”
록사나가 기드온 경을 올려다보았다.
“네. 일정이 늦어져도 노스로 가는 중간 마을에서 숙소를 잡으면 됩니다.”
“알겠어요.”
무사히 첫날 시찰을 마친 록사나는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두 번째 날이 밝았다. 푹 자고 일어난 록사나는 몸이 한결 가벼웠다.
록사나 일행은 여관 1층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차를 주문했다.
중년의 여주인이 차를 한 잔씩 사람들 앞에 내려놓았다.
갓 우려낸 차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여주인이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차향이 무척 좋네요. 이건 무슨 차인가요?”
“메리골드 꽃차라오. 내가 직접 따서 만들었어요.”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록사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 얘길 들으니 이 차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호호호. 그렇소?”
기분이 좋아진 여주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스트는 조용한 지역인 거 같아요.”
록사나가 자연스럽게 운을 떼었다.
첫날인 어제는 자칫하면 외부인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기에 이스트에 대해 일부러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었다.
록사나 일행을 서던에서 온 여행자로 알고 있는 여주인이 입을 열었다.
“시골이 다 그렇지요.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라오.”
“그런 거 같아요. 촌장이 좋은 사람인가 봐요.”
“평판이 나쁘지는 않다오. 그것보다 우리가 이 정도라도 먹고사는 건 캠든이 다른 영지들보다 세율이 낮아서요.”
“그렇군요.”
옆 테이블에 아예 자리를 잡은 여주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새 영주님이 세율을 높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오.”
아이린이 록사나를 거들기 위해 질문했다.
“농작물 생산량이 많지도 않고… 다른 자원이 나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과연 그럴까요?”
여관에는 록사나 일행밖에 없었지만, 여주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우리네 사정까지 알게 뭐요. 한 10년 가까이 영주 자리가 비어 있을 때가 좋았지…….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 이제 다 간 건 아닌지 모르겠소.”
이때 마르셀이 나섰다.
“제가 건너 건너서 들었는데요. 새로 오신 영주님이 좋은 분이시래요.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소. 별 볼 일 없는 우리 영지가 레드포드 영지처럼 떵떵거리고 사는 날이 올지나 모르겠구먼.”
여주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록사나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폈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영지인 레드포드는 리온 제국에서 수도 다음으로 시설이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곳과 비교를 당하면 어느 영주가 좋아하겠는가.
더군다나 현 카일라니 공작은 록사나의 전 남편이었다. 그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록사나의 일행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앞날이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잖아요. 캠든 영지가 리온 제국에서, 아니, 더 나아가 이 대륙에서 가장 잘 사는 영지가 될 날이 머지않았을 수도 있어요.”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두 눈은 묘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동안 그렇게 되는 건 바라지 않소. 나 죽고 우리 자식 세대나 손자 세대 때라도 그리된다면 그건 기적이 아니겠소?”
여관 주인 메리는 젊은 처자의 말이 허황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영지 형편이 나아질 거라는 작은 기대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일자리를 찾아 큰 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장성한 그녀의 세 아들도 현재 도시에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