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솥 안으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보니까 하녀들과 에밀리오, 제프리뿐만 아니라, 프레드릭과 시종들도 주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기사단을 뺀 고용인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록사나는 별말 없이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내년을 시작으로 영지 전체에 콩과 콩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법의 콩은 추운 겨울철 영지민들의 배 속을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워 줄 것이다.
우선은 콩을 잘 먹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솥 안에 몽글몽글한 작은 덩어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것 봐요!”
“오!”
“와, 신기하네!”
그걸 본 사람들의 눈에 작은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 몽글몽글한 게 순두부에요. 이따가 다들 한 번씩 맛보게 해 줄게요.”
점점 늘어나는 순두부를 보며 사람들은 그 맛을 상상했다. 비린 맛 말고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별 기대가 되지 않았지만, 제법 구수한 순두부 냄새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솥 가득 순두부가 완성되었다.
“자, 다 됐어요. 이제 맛을 한번 봐야죠? 니아?”
니아가 그릇에 맛보기용 순두부를 조금씩 나눠 담았다.
첫 그릇은 바로 록사나에게 건네졌다.
“다 나눠 주고 같이 맛봐요.”
작은 수프 그릇에 담긴 순두부가 어느덧 모두에게 하나씩 돌아갔다. 다들 자신이 든 그릇과 록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많이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봐요.”
록사나가 자신의 그릇에서 순두부를 한 스푼 떴다. 후후 몇 번 불어 식힌 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다른 사람들도 록사나를 따라 스푼을 들었다. 고소한 맛의 순두부가 입 안에 확 퍼졌다.
‘이 맛이야!’
록사나의 두 눈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두부와 거의 흡사했다.
꿀꺽!
“진짜 고소해.”
“맛있어!”
“부드럽고 따뜻해.”
부드러운 순두부를 씹어 삼키던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영주님, 정말 맛있어요. 제 눈으로 안 봤으면 콩으로 만들었다는 걸 믿지 못했을 거예요.”
니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콩은 어렵고 까다로운 요리 재료여서 잘 다루지 않았었다.
“록시 님, 이거 진짜 고소해요.”
아이린도 처음 맛보는 순두부의 맛에 빠져들었다.
“부드럽고 순하면서 속이 든든해집니다. 추운 날 먹는 수프로 아주 제격일 거 같습니다.”
에밀리오 할아범이 자신의 빈 그릇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콩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다니.”
그 옆에서 제프리가 제법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배고플 때면 어쩔 수 없이 마지막에나 삶아 먹었던 콩이었는데…….
콩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솥에 가득 든 순두부로 향했다.
그를 눈치챈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서 순두부는 여기까지예요.”
가차 없는 영주의 발언에 고용인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 순두부로 두부도 만들어서 맛봐야죠.”
이어진 말에 고용인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두부는 또 얼마나 맛있을까?’
“두부를 만들고, 여기 남은 콩비지로 전도 만들 거예요. 곧 저녁 시간이 다가오니까 오늘 저녁 식사 메뉴로 괜찮을 거 같은데, 니아 생각은 어때요?”
“정말 좋아요, 영주님. 순두부가 너무 맛있어서 두부랑 콩비지 전이라는 것도 엄청 기대돼요.”
록사나와 주방 사람들이 다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얼기설기 엮인 나무 바구니에 면포를 깔고 순두부를 부었다.
바구니 틈새로 빠져나온 물이 밑에 괴어진 나무 대를 따라 통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두부가 든 면포의 입구를 봉하고, 그 위에 판판한 나무 판을 하나 올렸다. 그 위에는 물을 담은 큰 냄비를 얹었다.
무게에 눌려 물이 쏙 빠지면 단단한 두부가 완성될 거다.
* * *
두부가 완성되자, 록사나는 콩비지 전도 알려 주었다.
다진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 계란, 밀가루를 콩비지와 섞었다.
여기에 살짝 소금으로 간을 하고, 한 입 크기로 동그랗게 만들어 기름 위에서 지글지글 부쳐 내면 되었다.
주방이 분주해지며 맛있는 냄새가 밖으로 솔솔 퍼져 나갔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마르셀이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주방에 발을 들였다.
“영주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지금은 콩비지 전 만드는 걸 알려 주고 있어요.”
“콩비지 전요?”
처음 들어 보는 음식 이름이었다.
“마르셀, 지금 영주님 바쁘시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리로 와 있어.”
해리슨이 마르셀의 팔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는 마르셀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마르셀의 눈이 커다란 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스무 살은 뒤돌아서면 배고프고, 돌도 씹어 먹을 나이였다.
맛있었다는 사람들의 극찬에 순두부의 맛이 무척 궁금했다.
“순두부 한번 맛볼래요?”
침을 꼴깍 삼키는 마르셀을 본 록사나가 물었다. 그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어느덧, 그의 손에는 따끈한 순두부가 담긴 그릇과 숟가락이 쥐어졌다.
받자마자, 숟가락으로 뜬 마르셀이 냉큼 자신의 입으로 순두부를 밀어 넣었다.
“앗, 뜨…거!”
“저런! 괜찮아요?”
뜨겁다고 말해 주려는 찰나에 이미 일은 일어났다.
“하아……. 괜찮습니다, 영주님.”
뜨거움을 겨우 식혀 순두부를 넘긴 마르셀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마르셀이 이번에는 순두부를 후후 불어 가며 신중히 떠먹었다. 방금 전에는 뜨거워서 제대로 맛을 느낄 새가 없었다.
“우와! 영주님, 이거 되게 부드럽고 고소한데요! 완전 맛있어요.”
마르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까지 순두부를 맛본 이들이 다들 맛있다고 호평해 주니 록사나의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저희 기사단도 영주님이 만드신 콩 요리를 먹고 싶습니다.”
마르셀이 용기를 내 힘주어 말했다.
이 맛있는 콩 요리를 본채에 있는 고용인들만 맛본다고 생각하니 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순간 록사나는 고민에 빠졌다. 30명이 넘는 기사단과 열두 명의 고용인까지 먹기에는 오늘 만든 양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이린과 록사나 자신의 숫자도 더해야 했다.
사실 마르셀의 눈에도 기사단까지 다 먹기에는 양이 넉넉하지 않은 게 보였다.
맞은편에서 마르셀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록사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다음에 해 주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내년에 콩을 수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모든 인원이 다 먹기에는 부족한 양이라……. 새 요리를 맛보는 정도로 한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맛볼 수 있다는 게 어디입니까! 저희는 맛만 봐도 좋습니다.”
“니아?”
“네, 영주님. 콩으로 만든 거는 기사단까지 모두 먹을 수 있도록 맛보기 요리로 내가면 될 거 같아요. 어차피 다른 음식들도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으니 충분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영주님!”
록사나의 확답에 마르셀이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 쪽에 얹으며 기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 뒤 마르셀은 부리나케 주방을 뛰쳐나갔다. 기사단에 이 기분 좋은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영주님이 오시고, 캠든 성의 거의 모든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를 하는 역사적인 첫날이었다.
기사단까지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1층 연회 홀에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비상 경계 근무와 보초를 서는 일부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부득이하게 참석을 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미리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양의 콩 요리와 그 밖의 음식들을 따뜻하게 챙겨 보내 줬다.
모두가 즐겁게 특별한 저녁 식사를 맛보기 시작했다.
순두부를 처음 맛보는 다른 기사단원들의 반응도 이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부 샐러드는 고소하면서 상큼했고, 콩비지 전도 인기 폭발이었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입맛이 달랐지만 순두부, 두부, 콩비지 전 중에서 전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
아무래도 고기와 계란, 각종 야채 등이 들어간 데다 기름에 지졌으니 맛이 더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전은 먹는 인원이 많다 보니 한 사람당 서너 점씩밖에 맛볼 수 없어 다들 아쉬워했다.
시끌벅적한 식사가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아니, 영주님. 요리 천재 아니십니까? 콩으로 이런 맛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시다니, 놀랍습니다.”
기드온 경의 칭찬에 록사나가 쑥스럽게 웃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시던 요리예요.”
“그렇군요. 그럼 영주님 어머니께서 요리 천재셨네요.”
캠든 성의 사람들은 록사나의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가축 사료로나 쓰이던 콩인데……. 허허, 그동안 저희가 좋은 식재료를 두고 천대했습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프레드릭이 자신이 싹싹 비운 순두부 그릇과 빈 두부 샐러드 접시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이거 말고도 콩으로 다른 많은 요리들이 가능해요.”
이번에는 주방장 니아의 반응이 빨랐다.
“다른 콩 요리는 언제 하실 예정이세요?”
“내일부터는 영지 순찰을 해야 해서 당분간은 어려울 거 같아요. 거기다 이 콩은 내년에 사용할 종자만 남겨 놓은 상태예요.”
“그렇군요.”
니아의 얼굴에서는 실망이 가득 묻어났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는 다른 콩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까 해요.”
“좋은 방법이에요, 영주님.”
니아가 기운을 차리며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영지 순찰이 끝난 이후에요.”
“네. 다른 콩들은 제가 종류별로 싹 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부탁해요, 니아.”
자신의 주변뿐만 아니라,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록사나의 눈에 들어왔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면 서로 유대감이 깊어지고, 행복도 커지기 마련이다. 음식의 힘이었다.
“기드온 경, 지금 뭐 합니까?”
프레드릭의 목소리에 록사나, 니아, 아이린, 제프리까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기드온 경에게 쏠렸다.
아담한 손수건에 뭔가를 싸고 있던 기드온 경이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꼼지락거리며 두 점의 콩비지 전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집에 가지고 가려고요.”
“아니, 겨우 두 점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려고요?”
니아의 말처럼 콩비지 전은 딱 한 입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한 점은 부인 주고, 나머지 한 점은 우리 집 귀염둥이들에게 반씩 나눠 맛보여 주려고요. 세 점이면 딱 좋은데, 맛보느라 제가 한 점을 먹어 버렸지 멉니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