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6)화 (26/214)

26화 

* * *

마구간에 도착하자, 건초를 정리하고 있던 에밀리오가 세 사람을 맞이했다.

영주님이 콩을 보러 왔다는 말에 그는 말 먹이를 두는 창고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창고 안쪽에 있던 세 개의 포대가 록사나의 앞에 놓여졌다.

두 포대는 록사나의 무릎 정도 오는 높이였다. 가장 작은 한 포대는 절반 정도의 양만 남아 있었다.

록사나가 큰 포대 하나를 직접 열어젖혔다. 옅은 노란빛을 띠는 콩알들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것이 품질이 좋아 보였다.

록사나는 그때까지 왼손에 꼭 쥐고 있던 콩 두 알과 비교했다. 같은 콩이었다.

“맞아……. 똑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또 한 번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뒤를 바로 이어 환희의 감정이 물결쳤다.

포대 속의 콩을 오른손에 한가득 움켜쥐었다.

록사나의 머릿속에는 콩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이 주르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요리들을 다 하기에는 콩이 넉넉하지 못했다.

결심을 굳힌 록사나가 에밀리오를 바라보았다.

“여기 이 콩 말이에요.”

그녀는 할아버지뻘인 에밀리오에게 말을 높였다.

“네, 영주님. 하명하십시오.”

“한 포대 반은 여기 그대로 두고, 잘 관리해 주세요. 내년에 종자로 쓸 거거든요. 나머지 한 포대는 제가 가지고 갈게요.”

“그리하겠습니다. 포대는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에밀리오가 대답했다.

“고마워요. 주방으로 가져갈 거예요.”

록사나가 이번에는 제프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제프리, 내년에도 저 콩을 키워 주겠니? 콩을 충분히 키울 만한 땅을 따로 내줄 테니까.”

“네, 영주님!”

제프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년부터 작물 키우는 것만 네가 담당하는 것은 어떻겠니?”

“정말요?”

작물이든 약초든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하는 제프리로서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제프리는 식물을 키우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키우는 건 제프리에게 일도 아니었다.

“네가 맡아 주면 고맙겠구나.”

“네, 물론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 혼자서는 힘들 테니까 사람을 붙여 줄게. 그리고 따로 더 키우고 싶은 게 있으면 땅도 원하는 만큼 내줄 테니까 편하게 이야기하고.”

“네!”

제프리는 어서 내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구간을 나선 록사나와 아이린이 본채의 주방으로 향했다.

콩을 든 마구간지기 에밀리오와 록사나를 웃고 울린 일등 공신 제프리가 그 뒤를 따랐다.

갑자기 영주가 주방에 들이닥치자, 니아가 깜짝 놀라며 마중 나왔다.

“아니, 영주님! 주방까지는 웬일이세요?”

“콩 좀 불리려고요.”

“네?”

록사나의 눈짓에 에밀리오가 무거운 콩 포대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록사나가 포대의 입구를 벌리자, 콩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이 콩을 물에 불릴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커다란 통이 필요해요.”

“영주님, 이 콩을 다 불려서 뭐 하시려고요?”

차마 이 많은 콩으로 요리를 해야 하는 건지는 묻지를 못했다.

“‘두부’라는 새로운 요리를 해 보려고요.”

“영주님께서요?”

놀랍다는 듯 니아가 인자하게 주름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리하는 귀족이라니,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맞아요. 소금하고 식초는 충분히 있죠?”

“네. 요리에 기본이 되는 재료니까 당연히 상시 구비가 되어 있어요.”

록사나가 언급한 소금과 식초는 내일 간수를 만들 기본 재료였다.

그때 두 명의 하녀가 커다란 통을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기에도 제법 무게가 나가 보였다.

두 개의 통이 놓이자, 그 안에 에밀리오와 제프리가 포대의 콩을 쏟았다.

눈치가 빠른 하녀들이 통 안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콩이 다 잠기고도 그 위로 한 뼘 정도의 물이 더 부어졌다.

주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에 잠긴 콩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음식으로 잘 해 먹지도 않는 콩을 저렇게나 많이 사용하는 건 다들 처음이었다.

“수고했어요. 내일 오후까지 저 상태로 놔두세요. 내일 이어서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주방장 니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두부’라는 요리에 대한 궁금증과 걱정을 잠시 억눌렀다.

“내일 더 필요한 게 몇 가지 있는데 준비해 주세요.”

“말씀하세요, 영주님.”

록사나가 주방의 화덕에 걸린 큰 솥을 가리켰다.

“콩을 삶는 솥은 저거면 될 거 같고, 삶은 콩을 갈 만한 그라인더 같은 게 있나요?”

“곡물을 대량으로 가는 그라인더가 있어요.”

니아가 눈짓하자, 하녀들이 보조 주방에서 그라인더를 가지고 나왔다.

얼마나 곱게 갈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제법 유용해 보였다.

“나쁘지 않네요. 그리고 깨끗하고 큰 면포가 필요해요. 한 번도 사용을 안 한 것이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록사나가 콩물이 빠져나가도록 걸러 낼 만한 것을 찾아내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짜인 바구니였다.

“이 바구니도요. 얼추 준비된 거 같아요. 내일 오후에 2시 좀 넘어서 내려올게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 시간이면 점심 식사로 분주했던 주방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한산해질 무렵이었다.

영주님이 요리한다는 소식은 금방 캠든 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록사나와 아이린은 다시 집무실로 복귀했다.

“‘두부’라는 요리는 생전 처음 들어 봐요.”

“그럴 수밖에. 나도 다른 데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나 어릴 때 어머니가 특별히 해 주시던 요리야.”

“록시 님 어머님이요? 귀족이셨을 텐데 요리를 직접 하셨다고요?”

“응. 자주 이것저것 만들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두부는 내게 무척 특별한 음식이야. 두부를 만드는 날이면 나랑 아버지가 어머니를 도와서 함께 만들었거든.”

그녀가 열두 살 때까지 경험했었다. 지금 다시 떠올리는 두부와 여러 가지 콩 요리법들은 정확하게 다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록사나는 본인이 기억하는 입맛과 떠오르는 레시피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조합해 나갈 생각이었다.

“두부가 어떤 음식인지 정말 궁금한데, 내일까지 참으면 알 수 있겠네요.”

“그래. 어릴 때 기억으로 만드는 거라 잘 만들어질지는 모르겠어.”

록사나의 괜한 너스레에 아이린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잘못되면 어때요. 다시 말한테 주면 되죠.”

“하하하. 그러네.”

* * *

다음 날 오후, 아벨리오 성의 주방.

앞치마를 단정하게 두른 록사나가 밤새 불린 콩과 물을 일대일 비율로 그라인더에 넣고 갈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아이린이 손을 거들었다. 그라인더는 수동이라 손으로 직접 돌려 줘야 했다.

“영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주방장 니아가 옆에서 안절부절했다.

“아니에요. 점심 준비하느라 다들 수고했는데 쉬세요.”

“괜찮습니다.”

니아뿐만 아니라,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온 시종과 하녀들도 록사나의 행동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영주님이 팔까지 걷어붙이고 직접 노동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물에 불어난 콩의 양도 전날보다 두 배 가까이 되어 보일 정도여서 영주님의 가는 팔이 걱정되기도 했다.

반면, 아이린은 태평했다. 한번 한다면 하는 록사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럴 땐 말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록사나가 민망한 듯,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불편해하는 고용인들을 돌아봤다.

“그럼, 좀 쉬다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부터 도와줄래요?”

“물론이에요!”

니아를 비롯한 고용인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콩이 갈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에밀리오 할아범과 제프리도 섞여 있었다.

지금쯤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를 봐야 하는 고용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록사나는 이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새 영주가 오기 전까지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던 성 사람들에게 하나의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갈린 콩에서 특유의 비린내가 났다. 그 빛깔은 아주 연한 노란빛의 뽀얀 우유 같았다.

절반 정도의 콩이 남기도 전에 하녀들이 록사나와 아이린을 밀어내고 잽싸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잘 갈린 콩물을 커다란 솥에 넣고 불을 때기 시작했다.

그사이, 록사나도 간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린과 니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생수 두 컵에 천일염과 식초를 일대일 비율로 섞어야 했는데, 적은 양으로 여러 번 하기에는 번거로웠다.

잠시 고민하다 그 비율에 맞춰 큰 그릇을 이용해 한꺼번에 만들었다.

니아는 요리사답게 궁금한 점이 생길 때마다 록사나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영주님, 이건 왜 만드는 거예요?”

“이건 간수예요. 한소끔 끓인 콩물을 면포에 거르고 다시 한번 끓일 때 중간에 넣어 줄 거예요.”

나중에는 주방장 니아의 주도 아래에서 두부를 만들 수 있도록 꼼꼼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간수가 들어가면 콩물이 몽글몽글해져요. 콩 성분 중에 일부가 응고가 되는 거죠. 그 응고된 걸 순두부라고 하는데, 물기를 빼면 단단한 두부가 만들어져요. 이따가 만들 때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새롭네요.”

영주님의 말을 들으니 그다음에 이어질 단계들도 무척 기다려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콩물이 끓기 시작하자, 불타고 있는 장작을 우선 빼냈다.

커다란 통에 좁고 긴 나무판을 걸쳤다. 그 위에 펼쳐 놓은 면보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붙들었다. 콩물을 거르기 위해서였다.

다른 두 사람은 끓인 콩물을 면포에 연신 옮겨 담았다. 콩물이 뜨거웠기에 록사나는 안전에 주의를 더욱 기울였다.

면포를 빠져나온 콩물이 통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와!”

주르르 쏟아지는 고운 콩물을 본 제프리가 감탄했다.

수분이 최대한 나오도록 두꺼운 밀대를 이용해서 면포를 꾹꾹 짜냈다.

꽉 짜진 면포를 풀자, 콩 찌꺼기 덩어리가 나왔다.

“이건 콩비지에요. 비지도 요리에 활용할 수 있으니까, 우선 그릇에 담아 보관해 주세요.”

“네, 영주님.”

다 짠 콩물을 솥에 붓고 빼놓았던 장작을 다시 집어넣었다.

콩물이 끓을 때쯤, 불을 약하게 조절하도록 지시했다.

록사나가 기다란 나무 주걱을 이용해 간수를 냄비 안으로 골고루 흘려 넣었다. 콩물에 간수가 잘 섞이도록 여러 번에 나누어서 넣어 줬다. 그리고 주걱을 세워 콩물을 살살 저었다.

“간수를 넣고, 이렇게 살살 저어 주면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지금까지 만드는 데 어려운 건 없네요.”

니아의 말에 록사나가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죠? 손품이 많이 가서 그렇지 과정만 알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어요.”

옆에서 손을 거들던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