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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5)화 (25/214)

25화 

“제프리, 텃밭을 내게 구경시켜 주겠니?”

문득 어떤 텃밭인지 보고 싶어진 록사나가 물었다.

때마침 우유를 다 마신 제프리가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럼 지금 보러 가실래요?”

아이다운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아이린과 제프리의 시선이 록사나에게로 향했다.

“그래. 지금 보러 가자.”

잠시간 산책을 하기에 좋을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다.

세 사람은 집무실을 나섰다.

제프리가 맨 앞에 서며 두 사람을 후원으로 이끌었다.

아벨리오 성은 웬만한 백작가의 규모를 뛰어넘었다. 후원 또한 넓고 광대했다. 본채를 나와 제프리의 뒤를 따라 5분 정도 걸었다.

제프리가 다른 곳에 비해 흙이 뒤집어져 있는 아담한 공터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기가 제 텃밭이에요. 아차! 영주님 텃밭이요.”

“가꾸는 사람이 제프리 너니까 네 텃밭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록사나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요?”

“그래. 정 못 믿겠으면 ‘제프리의 텃밭’이라고 쓴 푯말이라도 세워 두도록 해.”

“감사합니다, 영주님.”

제프리가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괜찮다며 손을 내저은 록사나가 제프리의 텃밭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작물의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게 작은 농사꾼 제프리의 농사 스타일인 것 같았다.

여러 작물을 재배했다고 해서 좀 클 줄 알았는데 텃밭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화단 같은 크기였다. 그래도 열두 살 아이가 혼자 가꾸기에는 적당했다.

평탄해 보이는 한쪽 땅에는 양파가 심어져 있는 것 같았다.

“여름이나 가을이었다면 더 풍성하고 예뻤을 텐데…….”

땅 위로 흙 말고는 보이는 게 없으니 텃밭은 휑하니 허전했다.

제프리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영주님에게 자신의 텃밭을 보여 준 게 뿌듯하면서도 실망하시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지금도 충분히 멋진 텃밭인데, 제프리는 별로니?”

“아니요!”

제프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영주님이 멋지다고 말해 줘서 너무 기뻤다.

“제프리,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걸 네가 더 잘 알 거야. 여기 심어진 양파는 봄이 가까워 오면 모습을 드러낼 거고, 땅은 잠시 겨우내 쉬었다가 봄부터 생명을 힘껏 피워 내겠지.”

록사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대지의 경이로움을 떠올렸다.

“대지는 우리 인간들이 가지지 못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참 아름다운 힘이기도 하고.”

“록시 님, 너무 멋있어요.”

아이린이 두 손을 모은 자세로 감탄했다. 그건 제프리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멋쩍어진 록사나가 말을 돌렸다.

“아이린, 우리는 이제 그만 돌아가자. 마저 오늘 일을 끝내야지.”

이번에는 제프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제프리, 텃밭을 소개해 줘서 고마워. 벌써 내년 봄이 기대되는구나.”

“네. 열심히 키울게요!”

록사나의 격려에 제프리가 씩씩하게 말했다.

제프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본채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말라비틀어진 풀대 같은 게 록사나의 눈에 콕 박혔다.

그것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던 록사나의 눈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풀대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록시 님……?”

아이린과 제프리가 록사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풀대는 제프리의 텃밭 경계선 즈음에 자리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록사나는 홀린 듯이 무릎을 굽혀 풀대 앞에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열매처럼 달린 것을 잡았다.

메마른 풀대의 뿌리가 뽑힐세라 한 손으로는 대를 움켜잡고 깍지를 잡아당겼다.

툭.

원하는 걸 손에 넣은 록사나의 손이 살짝 떨렸다.

“록시 님, 그건 뭔가요?”

록사나의 펼친 손에 있는 갈색의 기다란 깍지를 본 아이린이 물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프리에게서 들려왔다.

“그건 콩인데…….”

“콩?”

아이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콩하고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 아이린이 봐 왔던 모양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록사나가 두 손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깍지를 벌렸다. 그러자 딱딱한 깍지 안에서 두 개의 노란 콩알이 나왔다.

서서히 록사나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아이린과 제프리가 록사나를 불렀다.

“영주님…….”

“록시 님?”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록사나의 뽀얀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가에 기쁨의 미소가 활짝 피었다.

이 콩은 록사나에게는 무척 익숙한 콩이었다.

어린 시절, 록사나의 어머니는 이 콩으로 직접 그녀와 아버지에게 참 다양한 음식을 해 주셨다.

두부, 두유, 콩나물, 떡, 콩고기, 콩기름 등 손으로 헤아리기 힘들 만큼 그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어린 록사나가 어떻게 콩 하나로 우유도 만들고, 기름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어머니는 마법의 콩이라 가능하다고 했었다.

정말 그랬다. 그녀가 아는 이 콩은 마법의 콩이었다.

희한하게 카일라니 영지나 그 어떤 영지에서도 이것과 똑같은 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직 록사나와 그녀의 부모님이 가꾸던 텃밭에만 있었던 콩이었다.

‘소중한 추억의 콩을 아벨리오 영지에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꿈만 같았다.

록사나는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마음이 너무 설레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

“록시 님, 어디 다치거나 아프신 거예요?”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린이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활짝 펼쳐진 록사나의 두 손을 살폈다.

덩달아 제프리도 심각한 표정으로 록사나의 한쪽을 차지하며 앉았다.

제프리의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영주님이 우시는 게 아무래도 자신의 텃밭에서 자란 저 콩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야. 괜찮아.”

록사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잃어버릴까 봐, 소중하게 콩 두 알을 꼭 움켜쥐었다.

“제프리, 이 콩 어디에서 났니?”

“그건 제가 심은 게 아니라 어느 날부터 나 있었어요. 그래서 안 뽑고 키운 건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영주님?”

심각해지는 제프리의 표정에 록사나가 고개를 옆으로 힘차게 저었다.

“아니야. 이 콩은 마법의 콩이거든.”

“네?”

“마법의 콩요?”

아이린과 제프리 둘 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걸로 두부도 만들고 우유도 만들고……. 아무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 수 있어!”

“예엑!”

괴상한 얘기를 들은 제프리가 깜짝 놀라며 이상한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영주님, 이건 절대 드시면 안 돼요! 사람이 먹으면 설사나 하고 소화도 잘 안 돼요. 게다가 맛도 없고 엄청 비리다고요.”

이 콩을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다른 콩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제프리였다. 그래서 손까지 절레절레 내저으며 록사나를 뜯어말렸다.

그 모습에 록사나가 후후거리며 웃었다.

“그건 가축 먹이로나 쓰는 거예요!”

이어지는 제프리의 설명에도 록사나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이를 보다 못한 아이린이 거들었다.

“어쩌다 흉년일 때나 어쩔 수 없이 먹는 게 콩이에요. 이건 다른 콩하고도 조금 다르고, 제프리 말처럼 콩은 주로 동물이나 가축들 먹이로 사용해요.”

이러한 사실을 록사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길거리 생활을 할 때도 콩만은 절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사람이 먹을 게 절대 못 된다고요.”

길거리 생활이라는 말에 제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이린이 길거리 출신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영주님을 뜯어말려야 했다.

두 사람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콩을 잘 안 먹는 편이었다. 요리 방법도 삶아서 먹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요리법이 발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록사나는 어머니가 해 주신 다양한 콩 요리를 보았고 직접 맛본 사람이었다.

수확하는 철이 되어 콩을 거두어들이면, 세 식구가 도란도란 식탁에 모여 앉아 콩 요리를 즐겨 먹곤 했었다.

혼자가 되고 나서 가장 그리운 건 부모님이었고, 그다음으로 그리운 게 어머니의 콩 요리였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그리고 내 말도 틀리지 않았단다. 내가 마법을 보여 줄게. 그런데 이 콩 두 알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여전히 두 아이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콩이라면 많이 있어요.”

제프리의 말에 록사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정말? 어디에?”

“마구간에요.”

“그럼 마구간으로 가 보자!”

록사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서 몸을 비틀거렸다.

“록시 님!”

“영주님!”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얼른 록사나를 부축했다. 록사나가 숨을 가다듬으며 몸을 바로 했다.

“괜찮아. 갑자기 일어나서 현기증이 났던 것뿐이야. 얼른 가자, 마구간으로.”

마음이 급해진 록사나의 재촉에 아이린과 제프리가 어쩔 수 없이 앞장섰다.

“그런데 제프리, 저기 콩대는 하나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콩이 생긴 거니?”

“아, 그건요. 콩이 생긴 건 재작년이거든요. 처음 보는 콩이어서 그대로 놔뒀더니 작년에 다시 났어요. 콩들이 많이 났는데 너무 바짝 붙어 있어서 잘 자라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간격을 두고 옮겨 심어 줬어요. 그랬더니 콩이 엄청 많이 열린 거 있죠. 수확을 안 하고 그대로 놔두면 콩이 올해는 제 텃밭을 다 뒤덮을 거 같더라고요. 작년엔 일부만 놔두고 수확해서 말 먹이로 줬더니 잘 먹더라고요. 올해도 11월에 수확해서 에밀리오 할아버지한테 갔다 줬고요.”

에밀리오는 말을 돌보는 고용인이었다. 지금이 12월 초니까 수확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주님이 보신 콩 나무는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해서 안 뽑고 그대로 놔뒀었는데… 결국 열매를 맺었네요! 안 뽑길 잘한 거 같아요. 헤헤.”

마구간을 향해 걸어가며 제프리가 말했다.

“맞아. 제프리 덕분에 내가 마법의 콩을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그러게요. 제프리가 잘했다는 건 저도 알겠어요.”

옆에서 록사나와 나란히 걷던 아이린도 거들었다.

두 사람의 칭찬에 제프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헤헤헤……. 새들이나 작은 동물들이 씨앗을 떨어뜨리고 갔었나 봐요.”

“그런가 보다.”

콩에 대한 록사나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기에 이 콩의 씨앗을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오늘은 큰 행운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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