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어부가 많은 브렌트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면 배를 곯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어디든 빈부 격차는 존재했다.
농부의 자식은 농부가 되는 경우가 흔했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기회가 된다면 농사를 짓는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고 싶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캠든 성의 채용 공고문은 특히 젊은 사람들을 한껏 들뜨게 했다.
* * *
록사나에게 캠든 성에서의 시간은 편안했다.
억지로 걸친 옷이 아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영지 업무를 파악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쓸데없는 생각들을 할 겨를이 없다는 게 좋았다.
오전에는 보통 프레드릭, 아이린과 같이 영지 업무를 처리했다.
오후에는 주로 영지의 세부 내역 서류들을 살폈고, 오후 3시쯤에는 정기적으로 한 시간 30분 정도의 티타임을 가졌다.
티타임 시간에 하루 서너 명씩 순서를 정해 고용인 면담을 진행했다. 기사단은 제외였다.
록사나는 주로 고용인들의 업무와 관련하여 애로 사항은 없는지, 원하는 보직이 있는지를 물었다.
새로운 고용인들이 들어오면 업무가 변경되는 사람이 생길 것이기에 일을 배정할 때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고용인들은 업무 강도만 빼면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록사나는 높은 급여가 한몫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귀족가에서 고정적으로 일하는 시종과 하녀들은 한 달에 50~60실버 정도를 받는다.
직급에 따라 다르지만 캠든 성에서 일하는 시종과 하녀들의 한 달 급여는 최저 80실버부터 시작했다.
초과 근무가 있는 달에는 추가 수당까지 더해져 수령 금액이 1골드 이상으로 월등히 높아졌다. 1골드는 100실버이다.
4인 가족인 평민 중산층의 한 달 생활비가 1골드인 걸 고려하면 최저 금액인 80실버가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월급만 놓고 따져 본다면 캠든 성의 고용인들은 평민 중에서도 부유층에 가까웠다.
평민들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경제적인 기준점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평균적으로 성인들이 50실버 정도를 벌었다. 그 돈으로 4인 가족이 생활을 해 나갔다.
캠든 성에서 초과 근무는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고, 대부분이 평균적으로 1골드 이상의 급여를 수령했다.
그렇다고 해서 과로가 될 정도의 초과 근무가 아니었다. 그들의 퇴근 시간에서 한두 시간 정도로만 진행되었다.
대부분이 아침 식사를 마친 8시를 시작으로 저녁 식사 전인 6시에 전체적인 업무가 마무리되었다.
주방과 같이 필수적으로 업무 마감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은 교대 근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름 체계를 갖추고 잘 진행되고 있었고, 급여도 높았기에 고용인들의 불만이 적은 편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추가로 더 고용된다고 하더라도 기존 고용인들의 수업이 줄어드는 걸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영지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몇 배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일이 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현 고용인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록사나는 세심하게 이러한 점들을 면담을 통해 알려 주었다.
오늘은 영주와의 면담이 진행된 지, 4일째로 마지막 날이었다.
케빈이 떠나고, 10분 후쯤 제프리가 영주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록사나가 밝은 미소로 제프리를 맞이했다.
“어서 와, 제프리. 여기로 와서 편하게 앉으렴.”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걸어와 소파에 걸터앉았다.
어린 제프리에게는 소파의 높이가 조금 높아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친 모양새가 되었다.
그걸 본 아이린이 소파 뒤로 가서 눈치껏 제프리를 도와주었다. 덕분에 제프리는 편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제프리는 아이린보다 세 살이 어린 열두 살이었다. 마르고 덩치가 작아서 실제로는 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아이린이 따끈한 우유 한 잔을 제프리 앞에 놓아 주었다. 쌀쌀한 날씨에 제격이었다.
혹시 몰라서 록사나가 자신이 마실 차를 들기 전에 물었다.
“우유 괜찮지?”
“네, 영주님.”
제프리가 두 손으로 감싸 우유 잔을 입가로 가져가 마셨다. 우유에 꿀을 넣었는지 달고 맛있었다.
록사나가 후후 웃으며 제프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멋진 하얀 수염이 생겼네.”
제프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개가 절로 푹 숙여졌다.
아이린이 대신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제프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더 놀렸다가는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아 록사나는 장난기를 가라앉혔다.
“제프리, 캠든 성에서의 생활은 어떠니?”
“좋아요.”
제프리가 수줍게 대답했다.
“어떤 게 좋은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을까?”
“밥도 맛있고, 일도 힘들지 않아요. 여기 사람들도 좋고요.”
“그렇구나.”
수줍어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법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역시 며칠 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손을 들고 질문하던 그 패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어렵거나 불편한 것도 편하게 얘기해 주렴. 앞으로 그런 점들을 개선하려고 하거든.”
“음…….”
제프리는 두 손으로 우유 잔을 받쳐 든 채,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이 말할 내용은 영주님이 보시기에 사소한 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록사나는 제프리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불편한 건 딱히 없어요. 그런데…….”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
독려하는 록사나의 말에 제프리가 용기를 내었다.
“제가 후원 쪽에 조그만 텃밭을 하나 가꾸고 있어요. 허락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땅을 사용해서 죄송해요, 영주님…….”
제프리가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풀 죽은 말투에서는 야단맞을 각오가 느껴졌다.
록사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제프리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손에 들고 있던 우유 잔도 어느새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게… 크지는 않아요. 작아요. 정말이에요. 길베르토 아저씨가 거긴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고 해서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서 제가 풀을 뽑고 이것저것 심었어요. 프레드릭 집사님도 괜찮다고 하긴 하셨는데…….”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리는 제프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뜻밖의 화제에 잠시 이게 뭔 소리인가 했던 록사나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어린 소년은 영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한 땅에 대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순진하게 사실대로 고하는 제프리가 귀여웠다.
영주인 그녀가 아벨리오 성에 오기 전에 노는 땅을 활용한 게 큰 잘못은 아니었다.
한편, 제프리는 웃고 있는 록사나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며칠 동안 겪어 본 록사나는 고용인들에게 다정한 영주였다.
그래도 잘못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는 다를지도 모른다. 자신은 잘못을 했으니까…….
“어떤 걸 키우는지 궁금한데?”
록사나가 별다른 질책 없이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제프리의 얼굴이 곧장 밝아졌다.
“전에는 소소한 약초랑 양배추랑 당근, 콜라비, 브로콜리 같은 걸 심었어요. 그것들은 다 수확했어요. 지금은 내년 봄에 수확할 수 있는 양파만 남았고요.”
신나서 재잘거리는 소년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꾼 식물들을 하나씩 열거하는 제프리는 즐거워 보였다.
“많이도 심었구나. 그런 건 왜 키워? 네 일 하기도 바쁠 텐데.”
“제가 정성을 쏟는 만큼 그 아이들은 정말 잘 자라요. 식량으로도 쓸 수 있고요. 하루하루 크는 걸 보면 뿌듯해요.”
소년은 작물 키우는 걸 번거로운 일이 아닌 하나의 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기에 참 신기했다.
제프리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걸 키우면 배고플 일도 없어요. 아니, 제 말은요. 여기 성에서 굶는다는 게 아니에요. 성에 오고 나서부터는 전보다 훨씬 배부르게 먹고 있어요. 음식도 정말 맛있고, 이것저것 아주 잘 나와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요. 먹을 수 있는 걸 키울 줄 알면 어디 가서든 굶지 않을 수 있어요.”
록사나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 * *
이 성에 오기 전인 제프리의 상황이 고용인 서류에 제법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소년은 캠든 영지 출신이 아니었다. 옆옆 영지인 조르제 출신이었다.
제프리는 학대받는 아이였다. 그것도 친부모에게.
기사단장 기드온 경이 조르제 영지를 지나는 길에 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제프리 또래의 아들이 있는 기드온 경으로서는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친부모라는 작자들에게 돈을 조금 쥐여 주고, 제프리를 캠든 성으로 데리고 왔다.
물론 카일라니 공작의 허락하에 제프리의 캠든 성 거주가 결정되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프리의 상황에 대해 떠올리던 록사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분노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아이를 때리기만 한 게 아니라, 밥 먹듯이 굶기기도 한 모양이었다.
제프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록사나는 무거운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그랬구나. 수확한 건 어떻게 했니?”
“니아 아줌마가 요리를 해 줘서 성안 사람들이랑 같이 먹었어요.”
제프리가 가져다준 재료로 아벨리오 성의 주방장인 니아가 요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키운 걸 독식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게 참 기특하게 느껴졌다.
“잘했네.”
그녀의 칭찬에 제프리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 나이 또래의 칭찬 듣기 좋아하는 아이 같았다.
“그럼 제가 텃밭을 계속 가꿔도 될까요? 영주님께서 그 땅을 어디에 쓸지 정하실 때까지만요.”
록사나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느낀 아이는 참 영리했다. 자신의 실속을 챙기면서 영주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잘 돌려 말할 줄을 알았다.
“그렇게 하렴.”
그녀가 흔쾌히 허락해 주자, 제프리가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풋!”
내내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아이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록사나까지 웃는 모습에 제프리가 슬그머니 두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다 마시지 못한 우유 잔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마치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제프리는 예쁘고 상냥한 영주님이 점점 더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