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3)화 (23/214)

23화 

* * *

기드온 경의 에스코트를 받은 록사나가 기사단 식당에 들어섰다.

기사와 병사들은 젊은 여성 가주를 보며,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기드온 경이 그들을 어느 정도 단속하고 나서야, 록사나는 식사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록사나와 기사, 병사들이 식사를 마쳤다.

이제 식사가 모두 끝났으니 누군가는 식당 밖으로 나갈 법도 한데,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30명의 병사들이 비장하게 식탁 중앙을 노려보았다.

식탁 중앙에는 결전지로 떠날 여덟 명의 병사를 선발하기 위한 30개의 제비뽑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야 할 여덟 개의 마을 중 가장 가까운 곳은 당연히 영주 성 앞, 캠든 시가지였다.

가장 먼 곳은 말을 타고 빨리 달리면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브레튼 마을이다.

누가 먼저 제비를 뽑을지는 현재 기사단 내 병사들의 실력 순위에 따라서 진행하기로 했다.

순위가 낮으면 가장 늦게 뽑게 되어 누구 하나라도 불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들 무리에 섞여 한 자리씩 차지한 록사나와 아이린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 광경을 구경했다. 물론 그들의 운도 빌어 주었다.

먼저 서열 1위인 병사가 제비를 뽑았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결과가 보이도록 쪽지를 펼쳤다.

그러자 병사들이 그 쪽지를 보더니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엄지를 치켜들었다.

깜박.

아니, 들었다가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저히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쪽지를 확인한 서열 1위가 절규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그는 망했다. 전령으로 뽑히기는 했는데, 똥손이라 하필 가장 먼 브렌트를 뽑아 버린 것이었다.

병사들이 제비뽑기 순서에 불만이 없을 만했다.

“으하하하!”

그 병사를 아주 잠시 천국으로 보냈다가 지옥의 맛을 선사한 동료들이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록사나와 아이린도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따라 웃었다.

병사들이 계속해서 제비뽑기를 할 때마다 환호와 절망이 난무했다. 아직까지는 환호의 외침이 더 많았다.

마지막이 가까워지며 세 명만이 남았다.

지금까지 모두 일곱 개의 마을이 나왔다. 하나 남은 마을은 절묘하게도 가장 가까운 곳인 캠든 시가지였다.

남은 제비를 하나씩 뽑아 든 세 명이 동시에 종이를 펼쳤다.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쪽지를 펼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결과를 확인했다.

“으악!”

중간에 선 병사를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서 있던 두 명의 병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졌다. 그들의 표정은 허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캠든 시가지를 뽑은 병사는 기쁨의 세리머니를 화끈하게 벌였다.

자신의 앞에 영주인 록사나와 어린 소녀 아이린이 있다는 것도 순간 잊어버리고,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일명 엉덩이춤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우승 소감으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 나의 달링, 한나. 내가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오.”

‘한나’는 저 병사의 연인일 거라고 록사나는 확신했다. 병사는 소년 같은 앳된 얼굴이었기에 갓 성년을 넘긴 나이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아내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열렬하기도 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상황들이 뭔가 싶겠지만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오늘 주어진 공고문 속 업무는 일을 다 끝마치고 나면, 거리에 상관없이 곧바로 외근 지역에서의 퇴근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러니까 저 병사는 캠든 시내의 열 곳에 공고문을 붙여야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5시 반쯤 일을 마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덟 명의 병사 중 유일무이하게 조기 퇴근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참고로 그는 병사 서열 30위의 막내였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인간 승리다.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은 사람도, 마을을 뽑은 사람도, 모두들 마지막 병사를 부러움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옆을 보니 기드온 경까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여보세요, 기드온 경? 댁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아닌가요?’

그 모습을 본 록사나가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기드온 경의 집은 아벨리오 성의 정문을 나서면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집이 가까운 건 가까운 거고 퇴근은 누구나 일찍 하고 싶은 거니까.

더군다나 인원이 부족한 기사단에서 조기 퇴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무사히 용맹스런 여덟 명의 병사 선발이 마무리되었다.

록사나는 활기찬 아벨리오 기사단이 마음에 들었다. 자유분방한 것 같으면서도 나름 질서 정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사들의 군더더기 없는 몸은 그들이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앞으로 영지를 꾸려 나갈 때 기사단의 역할은 록사나에게 중요한 점 중 하나였다.

기사단을 나서는 록사나와 아이린은 오늘 하루가 길면서도 짧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겪어 보는 이 상황들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 * *

목욕을 마치고 나와 잠옷으로 갈아입은 록사나가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아이린이 머리를 빗겨 주었다.

“록시 님, 여기 캠든 성 사람들은 다들 재미있고 괜찮은 사람들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재미있어서 더 좋은 게 아니고?”

“그것도 맞지만 실제로 다들 저를 잘 챙겨 줘요. 물론 록시 님보다는 덜하지만요.”

캠든 성에 와서 아이린의 아부가 는 거 같다.

록사나는 혹을 아주 자연스럽게 덧붙인다.

“고용인들이 널 잘 챙겨 주는 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그들보다 너를 더 잘 챙긴다는 걸 좋아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네.”

“아이참! 둘 다 좋아하시면 되죠.”

아이린이 잠시 빗질을 멈추고 까르르 웃었다.

“그래, 현명한 방법이야.”

아이린의 너스레에 록사나도 피식 웃어 버렸다.

“사실 걱정 많이 했었거든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이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록사나는 알았다.

공작 성에서와 같이 이곳의 고용인들이 영주인 록사나를 대놓고 무시하고, 홀대하지는 않을까 많이 염려했을 것이다.

그녀 또한 혹여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내심 긴장했었으니까.

“이젠 그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이곳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

“맞아요.”

머릿속에 카일라니 공작 성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록사나는 그 기억들을 서서히 밀어냈다.

앞으로 아벨리오 영지와 이곳에서 만들어 갈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영지를 꾸려 나가다 보면 그곳에서의 잊고 싶은 기억들은 서서히 빛바래 옅어지리라.

* * *

캠든 영지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뉜다. 남쪽에는 캠든 성이 있고, 그 주변 지역을 통틀어 캠든 또는 서던이라 부른다.

동쪽에 이스트, 북쪽에 노스가 있었고, 서쪽 웨스트는 캠든 성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웨스트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브렌트는 캠든 영지 성에서도 가장 먼 지역이었다.

브렌트의 시가지를 중심으로는 크고 작은 어촌 마을들이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병사 하나가 와서 공고문을 붙이고 가자, 마을 사람들이 게시판 앞으로 몰려들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 남자가 대표로 나서서 공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의 눈이 점점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그가 다 읽고 나자, 사람들이 제각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성에서 웬일로 사람을 이렇게나 많이 뽑는 거지?”

“자네 못 들었나? 영주님이 새로 오셨다는구먼.”

중년 남자의 의문에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영주님? 캠든에는 영주님이 없는데, 뭔 소린가?”

“허허, 이 사람. 어디 산속에서 살다 왔나. 글쎄 어제 온 병사가 이걸 붙이면서 영주님이 새로 오셨다고 촌장님한테 얘기하는 걸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네.”

푸른 머리칼의 청년이 록사나 아벨리오라고 써져 있는 공고문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기 영주님 서명이 있잖아요.”

이때 다른 여인이 끼어들었다.

“그동안 우리 영지는 영주님 없이 지냈었는데, 이게 뭔 일이래요.”

“혹시 영주님이 세금을 올리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글쎄.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우리 영지는 돈 나올 구멍이라고는 없는데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누…….”

사람들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캠든 영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자원, 일감이 적었다. 그나마 다른 영지들에 비해 세율이 한참 낮아서 매번 배를 곯는 경우는 면했다.

그래서인지 세율이 높은 타 영지에서 캠든 영지에 정착하고자 가끔씩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지런히 밤낮으로 일을 한다면 하루 두 끼는 챙겨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영지 자체의 자원이 많지 않다 보니 돈을 모으거나 재산을 축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종국에 그 사람들은 얼마 안 있다가 다시 다른 지역으로 떠나곤 했다.

캠든 영지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영주의 공고문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들뜬 마음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한편으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던 시골 마을에 작은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근데 여섯 살은 일하기에 너무 많이 어리지 않아요? 열 살은 넘어야 할 거 같은데…….”

“새 영주님한테 어린아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런가?”

외진 촌구석에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어린아이라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브렌트는 바다가 접해 있는 지역이었지만, 농사에 더 치중하는 편이었다. 바다의 날씨 상황에 따라 배를 띄울 수 있는 날이 적었고, 어획량도 썩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 일은 어린아이들에게 위험했고, 농사일은 손이 많이 갔다.

농사일을 거들거나, 잡아 온 생선을 손질하는 데 아이들의 손을 빌리는 경우가 흔하긴 했다.

아이들이 열 살이 넘어가면 부모나 가족의 일손을 돕는 걸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농사짓는 것보다 성에서 일하는 게 벌이가 나으니까, 저도 지원해 봐야겠어요.”

“하긴, 캠든 성은 안정된 직장이지. 돈벌이도 훨씬 낫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