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차를 먼저 들도록 해요.”
차는 아직 우리기 전이었다.
아이린이 차를 우려 영주인 록사나의 찻잔에 먼저 따랐다. 이어서 프레드릭에게,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찻잔을 챙겼다.
하인들도 삼삼오오 짝을 이뤄 차를 우려내어 각자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담아냈다.
모두의 찻잔에 차가 담긴 것을 확인한 록사나가 한 모금씩 마시며 음미했다.
다른 이들도 뒤이어 조심스럽게 차를 들었다.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모두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영주님.”
“환영합니다, 영주님.”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받아 봤어요. 모두들 성심성의껏 캠든 성을 잘 관리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은 제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얼굴이랑 이름이 잘 연결이 안 되는데, 각자 자기소개를 부탁해요. 일어서지 말고, 앉은 상태에서 해 주세요. 여기 제 옆에 있는 아이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록사나가 아이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린이에요. 저는 아벨리오 영주님의 시녀이자 보좌관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모두 고마워요.”
인사가 끝나자, 집사의 오른쪽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아이린의 뒤를 이었다.
“영주님, 저는 캠든 성의 총주방장 니아입니다.”
“저는…….”
시종과 하녀들의 연령대는 제법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아이린보다 네댓 살은 어려 보이는 제프리였다. 일을 하기에는 어린 아이로 보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리온 제국에서도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모습은 종종 쉽게 볼 수 있었다. 시골 영지로 갈수록 그 나이는 더 어려졌다.
그다음으로 어려 보이는 케빈은 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써머 룸에 모인 총 열두 명의 고용인들 연령대는 제프리를 제외하면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가 가장 많았다.
삼십 대와 사오십 대로 올라갈수록 인원이 적었다.
육십 대인 프레드릭을 제외하고, 가장 연장자는 마구간지기인 에밀리오 영감이었다.
자기소개가 모두 끝나자, 고용인들의 시선이 록사나에게로 다시 집중되었다.
그들을 태연한 얼굴로 바라보며,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그대들에게 감사해요. 어제 프레드릭과 함께 캠든 성을 둘러봤는데 여러분들이 애써 줬다는 걸 곳곳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적은 인원으로 힘들었을 텐데…….”
록사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앞으로 인원을 충원하면 여러분의 업무량이나 담당 업무에 변동이 있을 거예요. 본인이 원하는 보직이 있으면 지금부터 각자 생각해 보세요. 추후 개별 면접을 통해 조정하도록 할게요. 다만, 충원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업무 조정이 당장은 어려운 점, 양해를 구해요.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다면 해 주세요.”
그때 용감한 샐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록사나가 성에 온 첫날, 응접실로 차를 가져다준 하녀였다.
“영주님, 충원되는 사람은 캠든 영지민 중에서 뽑는 거지요?”
“맞아요. 영지민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받아 고용할 거예요.”
샐리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사람으로는 케빈이 손을 들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지원하면 됩니까?”
“아직 프레드릭과 충원에 필요한 인원을 상의하지 않은 상태라 정확한 날짜는 며칠 후에나 공개가 될 거 같아요.”
록사나가 한 템포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대략적으로는 공개한 날부터 10일 동안 각 마을의 게시판에 모집 안내를 공지할 거예요. 그 후로 일주일 동안 면접을 진행할 거고요. 결과 발표는 그다음 주에 개별적으로 전달이 될 계획이에요. 다른 질문은요?”
그때, 가장 나이가 어린 시종 제프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록사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이들은 언제 봐도 귀여웠다.
“제프리, 편하게 물어보렴.”
록사나가 곧장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부르자, 어린 소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록사나와 다른 사람들은 못 본 척했다.
“저… 몇 살부터 가능해요?”
아, 어린 소년에겐 지원 나이가 가장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록사나의 머리에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역으로 물어봤다.
“몇 살부터였으면 좋겠니?”
그녀의 대답 아닌 대답에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너무 어리면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을 거다.
“음…….”
제프리가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식당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프리의 앵두 같은 입술에 집중되었다.
답을 정했는지 제프리가 입을 달싹거렸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제프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소리쳤다.
“여섯 살?”
헉!
이번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훈련받아 질서정연해진 병사들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록사나에게로 향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
그때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록사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반응에 안심을 하면서도 어벙한 표정들을 지었다.
이건 또 뭔 일인가 싶으면서도 영주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가슴 한편을 쓸어내렸다.
제프리의 얼굴이 점점 잘 익은 사과처럼 익어 갔다. 그러더니 부끄러웠는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앉아 있던 시종 케빈이 덤덤히 제프리의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를 해 주었다.
한참을 웃은 록사나가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그녀는 손끝으로 자신의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목소리와 자세를 가다듬었다.
“제프리, 웃어서 미안하구나. 네 대답이 우스워서 웃은 게 아니란다. 그저 네 대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좀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이 말은 록사나의 진심이었다.
참, 순수한 아이의 답변이지 않은가.
반면에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눈을 쉽게 원상 복귀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제프리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이었다. 아이의 입가가 절로 씰룩거렸다.
‘귀여워서’, ‘용서’라는 단어가 제프리의 귓가에 콕콕 박혀 버렸다.
“그래. 제프리의 말대로 지원 가능 연령은 여섯 살부터 하자꾸나!”
록사나의 발언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우리 영주님이 이상하다. 정말 진심이신 건가?
집사님,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사람들의 시선이 백발이 성성한 프레드릭에게로 쏘아졌다.
“여섯 살부터 지원이 가능하고, 제한 나이는 두지 않는 것으로 하면 되겠어.”
록사나가 말을 덧붙였다.
식당에 모인 사람들은 생각했다.
우리 영주님 진심이시다. 뭔가 이상한 게, 망한 거 같다.
반면에 아이린과 집사는 몸과 마음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린이야, 록사나가 돌로 수프를 만든다고 해도 믿을 만한 아이였다.
반면에 프레드릭은 영주님만의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여기며 간언할 생각을 애초에 접었다. 연륜 있는 집사의 품격 있는 선택이었다.
록사나는 제프리의 대답을 듣고 아이가 이 성에 여섯 살쯤에 오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어떤 사연으로 오게 된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여섯 살이라는 나이의 기준이 제프리에게는 중요한 시점이었던 게 틀림없다.
앞으로 아벨리오 남작 성에서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만나게 될 제프리 같은 또 다른 아이들.
여섯 살이라도 일자리가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뭔가 다른 기회를 주고 싶다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그 일자리가 어떤 형태를 띨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캠든 성의 시종과 하녀들은 하루 종일 인원 충원 건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이나, 일가친척 또는 지인들에게 캠든 성 고용인 모집 공고 소식을 사전에 전달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영주님이 여섯 살짜리 고용인을 뽑을지의 여부에 대해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기에 거는 것은 돈이 아닌 소소한 물품 위주였다.
남자들은 보타이나 멋내기용 머릿기름을, 여자들은 리본이나 머리핀, 들꽃으로 만든 수제 향수 등 주로 치장이나 장식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만약 돈이나 금액이 큰 물품을 건다면, 프레드릭의 호된 질책을 면치 못하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캠든 성에 고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혹독한 심층 면접과 수습 기간을 거쳐 채용된 정예 고용인들이었다. 이건 기사단 소속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계약서에는 도박 금지 항목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니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물품들을 내기로 거는 것은 프레드릭도 눈을 감아 주었다. 일만 하기 바쁘고, 놀 거리 없는 캠든 성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조건이 까다로운만큼 급여가 높았고, 근무 시간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제대로 지켜졌다. 만약 초과 근무를 하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추가 근무 수당이 지급되었다.
고용인들은 이 꿀단지 같은 직장에서 계속 꿀을 빨 수 있도록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곤 했다.
고용인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도 그렇고, 이 시골구석의 작은 영지에서 받는 급여가 대도시에서 일할 때보다도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 * *
“흠, 다 되었군요.”
프레드릭이 완성된 공고문을 손에 들었다.
“여기서 제일 먼 마을이 성에서 얼마나 걸리죠?”
“규모가 아주 작은 마을들을 제외하면 웨스트의 브레튼 마을입니다. 말을 타고 가면 예닐곱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꽤 머네요.”
“멀기도 하지만 길이 고른 평지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중간에 지친 말도 쉬어 가야 하고요.”
“그렇군요.”
납득한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에 기사단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병사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일정을 변경해야겠어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프레드릭이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기사단의 점심시간도 다른 고용인들과 동일한가요?”
“네, 그렇습니다.”
기사단을 제외한 시종과 하녀의 점심식사 시간은 12시와 1시로 조를 나누어 식사한다고 했다. 서로 교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록사나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식사를 담당하는 니아에게 물어봐 주세요. 12시나 1시 중 기사단 전원이 식사할 수 있는 음식의 준비가 언제 가능한지요. 기드온 경에게는 시종을 보내 바로 제 집무실로 와 달라고 전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1시에 가능하다는 니아의 대답을 프레드릭이 보고해 왔다.
기드온 경이 집무실을 방문하자, 록사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전혀 문제없다는 기드온 경의 답변에 기사단 식당에서 1시에 식사를 하는 걸로 록사나의 일정이 변경되었다.
기사단 식당은 기사단 내에 있었다.
기드온 경은 이따가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기사단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