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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21)화 (21/214)

21화 

그동안 영지 살림은 집사인 프레드릭 혼자서 담당해 왔었다.

캠든은 공작가의 직솔 관할지였었고, 당연히 영지와 관련된 모든 보고는 그동안 카일라니 공작에게 올라갔었다.

경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하나의 영지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프레드릭은 육십 대의 노구였다. 건강해 보이지만 체력적 한계가 만만치 않았을 거다.

“이제 캠든의 모든 것은 영주님의 소관 아래 놓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주인 록사나의 지시를 따른다는 말이었다.

“앞으로 영지 운영은 제 손으로 처리할 거예요. 당분간은 프레드릭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프레드릭에게는 영주 성 관리를 전적으로 맡기고 싶은데, 어떤가요?”

“맡겨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보필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영주 성 내정 관리만 하고 싶었습니다.”

프레드릭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노후를 편히 즐기고 싶을 텐데… 도와주신다니 든든해요. 고마워요, 프레드릭.”

“별말씀을요.”

록사나가 고용인 서류를 집어 들고 눈으로 훑었다. 기사단의 인원은 제쳐 두고, 시종이 여섯 명, 하녀가 다섯 명으로 집사를 제외한 총 인원이 열한 명에 불과했다.

“일 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성을 보수하거나 대청소할 때는 영지민들을 단기로 고용했었습니다.”

“성 관리에도, 영주민들에게도 좋은 방법이네요. 부족한 인원은 차차 영지민의 지원을 받아 충원할 거예요. 그 전에 기존 고용인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시간을 갖고 싶은데, 내일 오전 중에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아침 9시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장소는 어디로 하시는 게 편하십니까?”

“음, 써머 룸이 좋겠어요.”

록사나가 성 내부를 둘러보다 본 식당을 떠올리며 말했다.

써머 룸은 스무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중간 규모의 식당이었다.

“알겠습니다.”

“다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간단한 다과도 준비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5시에 만나는 기사단장의 보고 외에 오늘 남아 있는 다른 일정이 있나요?”

“없습니다.”

“일주일 뒤부터 영지 시찰을 나갈 거예요. 그에 대한 준비를 해 주세요. 기사단장에게는 제가 전달할게요.”

“알겠습니다.”

중요한 보고들이 마무리되었다.

세부 사항은 록사나가 직접 살펴보고 프레드릭에게 따로 질문을 하기로 했다.

* * *

프레드릭이 물러가고, 아이린이 다과를 내왔다.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었다.

“저걸 언제 다 살피죠?”

보고 내내 록사나 옆에 함께 있었던 아이린이 서류 더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는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록사나는 카일라니의 선대 공작 부인이었던 엘리노어와 함께하며 본 것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공작가에서 처리되던 서류의 양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록사나였다.

물론 결혼 생활 중에 그녀에겐 내정 관리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영지의 업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엘리노어 덕분이었다.

엘리노어가 병석에 눕기 전까지 1년 반 정도 그녀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었다. 또한 엘리노어의 허락하에 자유롭게 서재의 출입도 가능했었다.

선대 공작 부인의 죽음 이후 기댈 곳이 없었던 록사나는 책을 벗 삼아 배움을 이어 갔다.

록사나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카일라니 공작 령의 칼리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녀 일을 시작했을 때 그녀에게 서재 관리를 맡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었다.

“그러네요. 우리 록시 님 정도면 충분하지요.”

밑도 끝도 없는 아이린의 믿음이 소녀의 말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에 록사나가 후후 소박한 웃음꽃을 피워 냈다.

그 앞에서 아이린이 차를 한 모금씩 홀짝홀짝 들이켰다.

록사나가 한때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린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아이린이 보기에 록사나는 다른 귀족보다도 더 귀족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말을 편하게 하시라는 프레드릭의 말을 록사나는 거절했다. 연장자에게는 원래 존댓말을 쓰는 게 편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실은 그 안에 나이 지긋한 집사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아이린은 잘 알고 있었다.

* * *

오후 5시가 되자, 캠든 성의 기사단장이 록사나의 집무실로 왔다.

기사단장 기드온 경을 처음 본 순간, 록사나와 아이린은 깜짝 놀랐다. 카일라니 공작보다 더 거구의 사내였기 때문이다.

키가 최소 2m는 넘어 보였다. 눈앞에 넘을 수 없는 벽 하나가 세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가 소파에 앉자, 커다란 착시 효과도 생겨났다.

소파가 장난감 의자가 되고, 솥뚜껑 같은 손에 들린 찻잔은 딸의 소꿉놀이 장난감을 빼앗아 든 것처럼 보였다.

기사단장을 만나기 전 살펴본 인적 사항에 따르면 실제로 그에게는 소꿉놀이할 만한 나이의 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는 실제로 보이는 외모와 차이가 나지 않는 서른두 살이었다.

“흠흠.”

록사나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던 게 순간 민망해졌다. 그래서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기드온 경은 이런 상황에 많이 익숙한지 태평스러웠다.

“차 맛이 좋습니다, 영주님.”

목소리도 굵직했다.

“입맛에 맞다니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드디어 모실 주군이 생겨 앞으로 일할 맛이 날 것 같아 기대됩니다.”

“앞으로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해야겠군요.”

“아, 그래 주시면 좋겠습니다.”

돌직구에 솔직한 성격인 듯했다.

“집사가 건네준 서류에서 기사단에 대한 보고서를 훑어봤어요. 단장님 포함 기사 다섯, 병사 삼십, 종자가 두 명이던데요. 영지 치안 운영에 무리가 없는지 궁금하네요. 단장님이 추가적인 설명을 해 주시면 기사단을 운영하는 데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기드온 경이 다 마시고 난 빈 찻잔을 내려놓자, 아이린이 다가와 새로운 찻물을 따랐다.

“기사단 인원이 적다 보니 캠든 전체를 순찰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각 마을마다 자체 치안대를 결성해서 운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치안대 운영비는 영주 성 예산으로 처리됩니다. 전대 기사단장님 때부터 그렇게 이어졌고요.”

기사단과 관련된 내용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기드온 경이 말을 이었다.

“기사단에서는 정기와 비정기로 나누어 치안대의 훈련과 감찰을 담당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기적 훈련과 감찰은 2월과 10월, 1년에 두 번 정도 진행합니다. 비정기적인 횟수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해마다 다르기도 합니다.”

기드온 경이 자신의 무릎을 탁 내리쳤다.

“아, 올해 8월에 몬스터가 산 밑으로 내려왔었다는 보고를 듣고 순찰을 나갔었습니다.”

“몬스터가 얼마나 자주 출몰하는 건가요?”

“많지는 않습니다. 평균적으로 1년에 한두 번 정도입니다. 인명 피해보다는 농작물 피해가 주를 이룹니다.”

피해라는 말에 살짝 어두워지는 록사나의 표정을 보며 기드온 경이 덧붙였다.

“시에라 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맥치고는 캠든 영지 산맥은 몬스터 개체 수가 적은 편입니다. 그래도 몬스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보니 기사단에서 두세 달에 한 번씩 야외 훈련 겸 몬스터 동향을 살피고 있습니다.”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영지를 지키는 데 있어서 기사단이 정말 큰 역할을 해 주고 있네요.”

“하하하, 하하!”

기사단을 칭찬하는 말에 기드온 경이 기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영주님은 기사단을 볼 줄 아십니다.”

“이제 제 기사단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지요.”

“기사단을 둘러보고 싶은데, 내일 오후에 방문해도 될까요?”

“영주님이 방문하신다는데 시간이 대수입니까. 어느 때고 괜찮습니다.”

“내일 오후 3시 반쯤 방문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부터 영지 시찰을 나갈 거예요. 일정과 동선 짜는 걸 단장님께서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저한테 안 맡기시고 남작님이 하신다고 하셨으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하하!”

“그러게요. 하하하.”

농담이라는 것을 알기에 록사나도 따라 웃었다.

“일행은 저와 단장님, 여기 제 보좌관 아이린이에요.”

“저와 함께라면 걱정이 되지는 않지만, 영주님께서는 초행이시니 호위를 두 명 정도 더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갑자기 영주가 나타나면 영지민들이 당황스러울 거예요. 저도 평상시 모습 그대로의 영지를 둘러보고 싶고요.”

“그러면 평범한 일행인 것처럼 꾸며 동행하는 건 어떠십니까?”

“그게 좋겠어요.”

록사나가 빙그레 웃었다.

“기사단의 인원을 충원하려고 하는데, 기드온 경의 생각은 어때요?”

“정말 충원해 주시는 겁니까?”

그의 주홍 빛깔 눈동자가 과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 눈, 왠지 익숙하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록사나가 무의식적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

록사나의 태도에 기드온 경이 급시무룩해졌다.

“뭡니까, 영주님. 설마 농담이셨습니까?”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에 빠졌었어요. 미안해요. 충원 계획은 사실이에요.”

“역시 그렇지요?! 전 농담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광대가 하늘로 치솟는 기드온 경을 보며 록사나는 다시 생각했다. 저 주홍빛 눈이 왠지 시종 해리슨과 꼭 닮았다고.

‘설마……. 형 동생 사이라기엔 골격 차이가 너무 나는데…….’

* * *

십여 명의 고용인들이 캠든 성의 써머 룸에 모여 있었다. 다들 공손히 서서 영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록사나가 아이린과 함께 써머 룸으로 들어섰다.

“앉아서 기다리지, 왜들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록사나가 상석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영주와 고용인들의 공식적인 첫 대면이었다. 고용인 입장에서 고용주가 오기 전에 먼저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부담되었다.

그걸 알지만 서서 기다리는 그들을 보니 록사나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기에 꺼낸 말이었다.

프레드릭이 정중하게 빼 준 의자에 록사나가 자리했다.

“자리에 앉아 주세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말은 프레드릭과 아이린도 앉으라는 소리였다.

집사 프레드릭이 록사나의 왼쪽에, 보좌관 겸 시녀인 아이린은 오른쪽에 앉았다.

두 사람이 앉는 걸 본 시종들과 하녀들도 기다란 식탁 주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각자의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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