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나름 세세한 설명이었다.
록사나가 필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떠나기 전에 잠시 제게 들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남작님.”
필립은 손에 든 모자를 자신의 배 쪽에 대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이내 마차를 몰고 필립이 현관 앞을 떠났다.
잠시 후, 시종 해리슨의 안내를 받은 록사나가 응접실 소파에 자리했다. 그녀의 곁에는 아이린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옆에 함께 앉자는 록사나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한 아이린이었다.
해리슨이 집사에게 그녀의 방문을 알리러 간 사이, 하녀 한 명이 차를 내왔다.
하녀는 차를 준비해 주고는 바로 물러났다.
록사나가 향긋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이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들어오세요.”
머리가 희게 샌 노인이 들어왔다. 호리호리한 키에 검은색 연미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 중후했다.
록사나 앞에 선 집사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캠든 성의 집사 프레드릭 이스턴입니다. 캠든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준비 없이 아벨리오 남작님을 맞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환영해 줘서 고마워요. 제가 기별 없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집사님의 실수가 아니에요. 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프레드릭이 록사나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이 아이는 아이린, 제 시녀이자 보좌관이에요.”
“아이린입니다.”
아이린이 선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집사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네, 아이린.”
* * *
영주가 사용하는 방은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응접실에 놓인 짐을 본 아이린이 정리를 하려 들자, 록사나는 숙소를 먼저 안내받으라고 지시했다.
프레드릭을 따라 아이린이 내려가고 나니 넓은 공간에 록사나 혼자였다.
침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어두워지는 바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방을 둘러본 록사나가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하루 일찍 도착했음에도 준비 상태가 좋았다.
록사나는 성으로 오면서 보았던 캠든 영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직접 다스려 나갈 영지라는 게 조금씩 실감이 났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억지로 붙잡고 있던 인연의 끈을 놓으니 살아갈 희망과 새로운 길이 조금씩 보였다.
캠든 영지가 그 첫 단추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캠든 성의 노집사 프레드릭은 새 영주님이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하면서 잠시 분주해졌다.
다행히 고용인들이 그동안 부지런히 준비를 해 두었던 덕분에 특별히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없었다.
아이린에게 방을 안내해 주고, 성내에 얼마 없는 상주 고용인들에게 영주님의 도착 사실을 알렸다.
시종 해리슨이 이미 그 소식을 동료들에게 전달했기에 프레드릭이 전한 말은 확인에 불과했다.
프레드릭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또한 당장 영주님의 저녁 식사 준비를 명하고, 이것저것 지시도 내렸다.
혹여 부족한 부분은 없나 하는 조바심에 성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저녁 업무를 처리하기 전에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에구구. 오늘은 이놈의 무릎이 말썽이군.”
소파에 몸을 묻은 프레드릭이 자신의 무릎을 통통 두드렸다.
예순을 넘어서니 안 결리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자주 휴식을 가져 줘야 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새 영주인 록사나 아벨리오를 떠올렸다. 까탈스럽거나 예민한 성격은 아닌 거 같았다.
‘어찌 그리 얼굴에 그늘이 많으신지…….’
프레드릭은 록사나의 사정을 웬만큼 다 알고 있었다.
록사나가 캠든 성으로 출발했다는 파발을 받았을 때 그는 성의 일원들에게도 새 영주님이 카일라니 전 공작 부인이라는 걸 알렸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다 알게 될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프레드릭은 카일라니 공작가의 정보부 소속이었었다. 선대 카일라니 공작이었던 데미안이 은퇴했을 때 그도 같이 은퇴를 했다.
그 이후로 그는 주군이었던 선대 공작의 배려로 캠든 성에서 안온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캠든 영지가 록사나 아벨리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자신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주군의 아들인 현 공작은 그에게 계속해서 캠든 영지의 집사 자리를 맡아 주십사 하고 청했다.
만약 록사나가 그에게 집사직을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그때 다른 곳에서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겠다고 여러 가지 약조를 했다.
‘에잉, 편히 살기는 글렀네. 어째 그 두 부자는 자꾸 이 노구를 부려 먹을 생각들만을 하는지 원. 유유자적을 꿈꾸었던 내 노후는 이미 글렀다, 글렀어!’
속으로 투덜투덜 카일라니 부자를 흉보는 노집사 프레드릭이었다.
* * *
록사나와 아이린은 영주의 방에 딸린 응접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장거리 이동에 지친 새 영주를 배려한 노련한 집사의 섬세한 조치였다.
“록시 님, 저 캠든 성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성이 이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디 백작 성에 온 줄 알았다니까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아이린이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니?”
“그럼요! 지금까지 둘러본 곳이 응접실하고 주방, 식당밖에 없지만 규모가 장난 아니에요.”
아이린의 말처럼 캠든 성은 남작이 아니라 백작가의 성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 본관만 해도 다락 공간까지 합하면 무려 7층 규모였다.
지어진 지 100년이 훌쩍 넘는 이 고성은 먼 옛날 많은 군대가 주둔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프레드릭이 그녀를 방으로 안내하며 설명을 해 주었기에 첫 성문을 통과하면서 보았던 길고 높은 성벽이 이해가 되었다.
정문에서 영주 성까지는 총 세 개의 커다란 성문이 존재했고, 캠든이 카일라니 공작가의 레드포드 령에 포함된 지는 60여 년 정도가 되었다.
록사나가 이혼으로 받은 이 영지는 이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아벨리오 남작 령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린, 정말 시녀랑 보좌관을 겸할 수 있겠니? 업무가 과중해질 텐데.”
“문제없어요!”
그녀의 작은 친구는 의욕이 충만했다.
활기 넘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한편으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캠든으로 오는 길에 록사나는 아이린에게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고 싶은데 어떠냐고 의견을 물었었다. 그러자 아이린은 보좌관도 좋지만 록사나의 시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사실 록사나는 아이린의 총명함을 높이 사 시녀보다는 전문적인 인력인 보좌관의 길을 열어 주고 싶었다.
작위를 가진 여귀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듯이 여보좌관도 아주 소수지만 존재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아이린이 시녀와 보좌관 일을 당분간 병행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유는 아이린이 캠든 성에 적응하는 동안, 록사나에게 익숙한 자신이 시중을 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록사나도 아이린의 의견에 대해 동의했다.
아이린은 어느 순간부터 록사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아이린도 그녀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종종 느꼈다.
나중에 아이린이 커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서로 떨어져 살아야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녀의 곁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기를 록사나는 바랐다.
* * *
다음 날 오전, 마부 필립이 캠든 영지를 떠나기 전 록사나를 찾아왔다.
록사나는 1층에 있는 응접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차를 들라고 권하며, 자신도 차를 마셨다.
“하룻밤이지만 쉬는 데 불편함은 없었어요?”
“남작님의 배려로 푹 쉬었더니 몸이 가뿐합니다.”
“그랬다니 제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필립은 캠든 성에 도착한 뒤로 내내 정말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작 성의 고용인들이 친절하기도 했지만, 아델리오 남작이 나서서 그를 직접 챙겨서인지 극진했다.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부터 말을 돌보고 마차를 점검하는 것을 마부 콜튼이 전담해 주었다.
숙소에서는 뜨거운 물에 그가 피로를 풀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줬고, 저녁과 아침 식사로 준비된 음식은 풍성하고 맛있었다.
심지어, 떠나는 길에 먹으라며 간식거리까지 이미 넉넉하게 챙겨 주었다.
“필립 덕분에 저와 아이린이 편안하게 왔어요. 고마워요.”
“소인의 마차 모는 솜씨를 인정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제가 귀부인들이나 영애분들은 많이 모셔 봤어도, 여남작님은 처음이라 큰 영광이었습니다.”
필립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훗날 이 일화가 그의 말처럼 그에게 영광스런 날이 되리라는 사실을 이때는 몰랐다.
록사나가 본 그는 평민임에도 껄끄러운 귀족을 대하는 데 있어 우직하고 소탈한 이였다. 그래서 그가 더 마음에 들었다.
록사나가 제법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아이린에게서 건네받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가는 데 여비에 보태세요.”
“아닙니다, 남작님. 저는 이미 공작가에서 충분한 사례를 받았습니다.”
필립이 손사래를 쳤다.
“그것은 제가 준 것이 아니잖아요.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은 저고, 이건 저를 무사히 캠든 성까지 데려와 준 것에 대한 제 성의 표시예요. 그러니 꼭 받아 주셔야 해요.”
완곡한 록사나의 말에 필립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가는 길도 무탈하기를 빌어요. 살면서 만약 귀족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이곳 캠든 성으로 연락하세요.”
덧붙여진 뜻밖의 말에 필립은 모닥불 앞에 있는 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평민에게 귀족의 연줄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었기에 그 말이 더욱 감동이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남작님.”
록사나가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떠나는 필립을 응접실 안에서 배웅했다.
【 새 출발 】
록사나는 오후에 프레드릭의 안내를 받아 성을 대략적으로 돌아본 뒤, 4층에 있는 남작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영주의 집무 책상이 아닌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아 있었다.
보고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영지의 전체적인 현황과 수입, 주변 영지와의 관계, 영주 성의 구성 현황 및 재정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세부적인 해당 서류 더미들은 카트에 실려 집무실 한쪽 벽을 차지했다.
“넉넉하진 않지만 영지와 영주 성 모두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군요. 집사의 노고가 컸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