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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9)화 (19/214)

19화 

‘그때 우리 처음 만났었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어보았다면 뭐라 대답했을까?’

물어보았다면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추억 속에 잠긴 아스테리온의 두 눈에 아련한 그리움이 진하게 피어났다. 동시에 가슴이 욱신거리며 격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려는 두 다리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두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에 파인 손바닥 안쪽 살에서 붉은 피가 순식간에 배어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몸의 감각은 무뎌지는데 마음의 감각은 자꾸만 선명한 칼날이 되어 아스테리온의 심장을 후벼 팠다.

* * *

아스테리온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마석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붉은색 마석이 몇 번 깜박거리다 멈추었다.

잠시 뒤, 노크 소리와 함께 트레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각하, 저 왔어요.”

대꾸 없이 아스테리온이 그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아, 진짜! 인사도 안 받아 줍니까?”

“말 안 해도 너 온지 알고 있어. 내 눈앞에 있잖아.”

“쳇, 그걸 누가 모릅니까? 인사 건넨 거잖습니까.”

“자네 인사 받아 주면 말이 길어지잖아.”

트레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몇 마디나 한다고…….”

사실 트레버는 인사를 시작으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안에서만 새고 밖에서는 안 새는 철 바가지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공작가에 제1 보좌관으로 발붙이기 어려웠을 거다.

“안 받을 거야?”

아스테리온이 손에 들린 서류를 흔들었다. 트레버가 냉큼 그것을 받아 들었다.

“큼, 이 서류는 뭡니까?”

“이혼 서류야. 오늘 오전 중에 수도로 출발해. 도착하자마자 관청에 제출해서 마무리하고.”

“아!”

‘결국엔 두 분이 이혼 서류를 작성하셨구나.’

트레버가 아스테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차마 괜찮으신 거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답답한 주군을 대신해서 그의 속이 갑자기 꽉 막히는 것 같았다.

트레버는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에 설치된 호출 버튼을 눌렀다.

다시 업무를 보려던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지?”

“흠흠. 아침 일찍 출근하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서요.”

사실 일찍 출근한 건 맞지만 공작가 2층에는 그를 위한 침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요 며칠 제집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그의 상사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 네 집무실에 가서 마시면 되잖아. 네 집무실 탁자에도 호출 버튼이 잘 설치되어 있을 텐데.”

귀찮아하는 아스테리온의 기색을 감지했지만, 트레버는 여기서 꼭 차를 마시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차를 마신 다음, 상관인 공작님과 아침 식사까지 함께 하는 건 당연하게 예정된 수순이었다.

괜찮은 듯 구는 주군에 대한 트레버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각하 집무실에서 호출하면 차가 더 빨리 나오더라고요. 차 맛도 더 좋고.”

웃기지도 않는 핑계에 아스테리온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상관을 우습게 아는 보좌관을 볼 때면 정말 자신이 그의 주군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

물론 자신과 트레버는 상하 관계이기 이전에 친구로 시작을 했었다.

그렇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행동하는 아스테리온이었다.

둘이 티격태격 말씨름을 벌이는 와중에 칼리드가 차를 들고 왔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익숙하다는 듯 그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은은한 차향이 종이와 잉크 냄새가 배어 있는 집무실에 퍼져 나갔다.

칼리드가 차를 우려낸 두 잔 중 한 잔을 아스테리온의 집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른 한 잔은 그가 손을 대기도 전, 어느새 트레버의 앞에 옮겨져 있었다.

“차를 드시고 내려오시면 두 분의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칼리드의 말에 트레버가 답했다.

“역시 칼리드 집사님 덕분에 살인적인 업무에도 제가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되네요.”

제1 보좌관의 너스레에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아스테리온과는 다르게 연륜이 묻어나는 칼리드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칼리드가 두 사람에게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트레버가 따스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캠든보다 더 큰 영지를 주실 줄 알았는데요.”

보좌관인 그는 이혼 합의서의 내용을 아스테리온과 함께 검토하고 작성했었다.

“벌레들이 꼬이니까.”

트레버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스테리온을 쳐다보았다.

저 말은 캠든 영지보다 더 크고 수익이 높은 중소 도시급 영지를 주게 되면 전 공작 부인의 재산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이 많이 생길 거라는 의미였다.

공작 령 남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캠든은 인구가 대략 오천 정도 된다.

교통의 중심지인 쿠엔틴 백작 령의 앨론드라 시에서 마차로 두 시간쯤 떨어진 위치다.

그렇기에 낯선 사람들의 출입이 덜하고 치안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시에라 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산맥이 영지에 포함되어 있어 실제 땅의 크기는 백작 령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트레버는 나름 신경 써서 영지를 골라 위자료로 건넸다는 걸 깨닫고 아스테리온의 새로운 면모를 본 기분이었다.

그는 집사나 자신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보여 주는 편이었지만 전 부인에게만큼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 차가운 무표정으로 대했다는 것이 맞다.

트레버가 한 모금 정도 남은 찻물을 호로록 마셨다.

카일라니 공작 부부의 이혼 서류를 수도 관청에 제출하고 나면 그 소식이 곧장 사교계로 퍼져 나갈 거다.

벌써부터 트레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 * *

록사나는 아이린과 공작 성을 떠나 캠든으로 향하고 있었다.

출발 전에 마부에게 물어보니 날씨가 좋으면 도착까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공작 성은 레드포드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캠든은 남동쪽 끝자락에 있었다.

마차의 내부는 덩치 큰 남자 네 명이 누워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흔들림이 미약해 편안했다.

칼리드가 신경 써 준 티가 났다.

그는 록사나를 호위할 네 명의 정예 기사들까지 대기시켜 놓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호위 자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우직한 칼리드는 마지못해 호위를 물렸다.

마차에 오르기 전, 록사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었다.

“록시 님.”

“응?”

스쳐 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록사나의 고개가 아이린 쪽으로 향했다.

“캠든 영지는 어떤 곳일까요?”

“한 번도 안 가 봐서 나도 잘 몰라. 내 눈으로 직접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서 물어보지도 않았고.”

“무척 기대돼요!”

“나도 기대돼.”

록사나가 살며시 웃으며 화답했다.

자신이 침울해질까 봐 일부러 말을 더 거는 것이겠지.

지난 이틀간 캠든을 주제 삼아 나누었던 대화는 잊었다는 듯, 아이린은 3일 째에도 같은 화제를 꺼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대견해서 록사나도 처음 듣는 질문처럼 부지런히 호응해 주고 있었다.

이 또한 언젠가 소소하고 따뜻한 추억으로 두 사람의 마음속에 남을 테니까.

이제 캠든까지는 3일 후 도착한다.

귀족가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록사나의 아침 치장 시간은 상당히 짧았고, 여관에서 늘 출발을 일찍 서둘렀기에 하루에 예상보다 더 먼 거리를 이동했다.

또한 시간이 단축된 데에는 두 사람의 부지런함과 마부의 마차 모는 솜씨가 한몫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록사나는 그동안 마부와 아이린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령의 힘을 사용해 왔다.

마차 이동 중에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 뒤에서 밀었고, 바퀴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아이린과 함께 마차를 미는 척하며 바퀴를 들어 올렸었다.

질척한 진흙 구덩이에서 마차가 너무나 쉽게 쑥 빠져나오자, 마부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을 땐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렸더랬다.

우리 둘의 힘이 무척 세서 그런 거라며 아이린이 호들갑을 떨어 대자, 그제야 마부도 운이 좋았다며 사람 좋게 웃어넘기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로 록사나는 더욱 세심하고 티 나지 않게 힘을 발휘했다. 그러면서 정령의 힘은 빠른 속도로 커졌고, 제어력도 성장했다.

여정의 마지막 날인 6일째에 앨론드라 시를 벗어나 캠든으로 방향을 튼 지 한 시간 반쯤 되었을 때, 소리쳐 말하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작님, 캠든 영지가 보입니다.”

그 소리에 록사나와 아이린이 재빠르게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앨론드라 시에서 잠시 들른 과일 가게에서 캠든에 대해 물었을 때, 주인아저씨가 말해 주었었다.

눈에 넓게 펼쳐진 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캠든 영지에 들어서기 직전이라고.

과연, 대로를 따라 달리는 마차 앞쪽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벌거벗은 산을 예상했는데 나무 종류가 다른 건지 나뭇잎은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점점 다가오는 앞쪽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디어 캠든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듯 마차 바퀴가 한껏 신나게 굴러갔다.

* * *

검은색 마차 한 대가 캠든 남작 성의 정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고, 중년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록사나와 아이린이 내려섰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다갈색 머리의 시종 한 명이 록사나 일행에게 다가왔다.

시종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캠든 성의 시종 해리슨입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록사나 아벨리오예요.”

해리슨의 주홍빛 눈이 커졌다.

“아… 아벨리오 님요? 그럼 아벨리오 남작님이십니까?”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잠시만. 아니, 안으로 드시지요.”

해리슨이 허둥지둥거렸다.

“그 전에 필립에게 쉴 곳을 안내해 주겠어요?”

그녀가 중년의 마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록사나와 아이린은 마차 안에서 편하게 왔지만, 필립은 6일 동안 길가의 먼지를 간식 삼아 마차를 몰았으니 일행 중 가장 피곤할 터였다.

“저, 그럼…….”

해리슨의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마부를 먼저 안내하면 록사나를 계속 밖에 세워 둘 수밖에 없으니 고민이 되는 모양이다.

이내 해결책을 찾은 듯 해리슨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는 마부 필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길을 따라 쭉 가시다 보면 오른쪽에 갈림길이 나올 거예요. 그 길로 가시면 마구간이 바로 나옵니다. 거기에 저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가 있는데 콜튼이에요. 콜튼에게 제가 식당과 숙소 안내를 부탁했다고 하면 마부님을 안내해 드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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